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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일기

사랑할 시간은 아직 남아 있어

작은 학교, 큰 이야기 10

사랑할 시간은 아직 남아 있어

 

 

 

배열이 뭐지?

우리 반은 소수의 학생들로 구성된 학급이어서 그런지 공부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을 막론하고 자유롭게 대화하는 경우가 많다. 교사와의 상호 작용뿐만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서의 상호 작용이 활발하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끼리도 서로 어려운 부분을 가르쳐 줄 때도 많다. 때로는 교사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생각하지 못하거나 아이들이 받아들이기에 어렵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아이들끼리 서로 이야기하면서는 오히려 어려운 문제를 쉽게 이해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어느 방과 후 한자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열심히 한자 단어를 외우고 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모르는 한자 단어가 나오면 서로에게 뜻을 묻고 답하거나 국어사전을 찾아 가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채연이가 처음 보는 단어를 보고 궁금해 하며 묻는다.

“배열이 뭐지?”

나도 단어의 정확한 뜻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잠깐 고민하며, 다른 아이들의 대답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한글을 읽고 쓰는 데 조금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다문화 가정의 순성이가 의외로 자신 있게 답을 알려 준다.

“곰!”

그게 아니라는 다른 친구들의 핀잔에도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필리핀에서 배워 온 영어, R 발음을 유창하게 구사하면서.

“Bear, 곰 맞다니까!”

 

사랑하는 그대에게

분교장님께 꾼 돈 천 원을 갚을 일이 있었는데, 천 원만 따로 드리기가 부끄러워서 감사의 마음을 담은 책 한 권을 같이 드렸다.

제목은 ‘사랑하는 그대에게’였는데 참 좋은 책이었다. 분교장님이 책 선물을 받은 것을 다른 선생님들에게 자랑하자 내가 얼마 전에 생일 선물로 책을 주었던 5학년 선생님이 장난스럽게 따지듯이 말한다.

“선생님 지난번에 저한테 ‘오늘 더 사랑해’ 주셨잖아요. 와, 그새 마음이 변한 거예요?”

“아니…. 그건 그때 ‘오늘’이고….”

 

개학 날을 기다리며

얼마 전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을 읽고 나서 내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한 해 동안 생일을 챙겨 주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부랴부랴 준비한 생일 케이크보다 더 귀한 예수님을 잘 전해 주었는지,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주며 그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반성해 보았다.

며칠 전에는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에 뒤늦게 학급 책꽂이에 복음에 대한 어린이 동화와 만화를 몇 권 가져다 놓았다. 학기 말의 정신없는 바쁜 업무와 학교 시설 공사 때문에 방학 날에도 몇 마디 대화도 못한 채 아이들을 쓸쓸히 떠나보냈다. 곧 전학 갈지도 몰라서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아쉬워하는 몇몇 아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밟힌다. 손가락을 잘 빠는 순성이가 나에게 달려올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그 손을 더 따뜻하게 잡아 주지 못했던 것도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아직 끝나지 않은 학년 말. ‘그래 사랑할 시간은 아직 남아 있는 거야.’ 2월의 겨울 방학에 개학 날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