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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키워드는 ‘공동체’ 그리고 ‘따듯함’ (2017.2)



키워드는 

공동체’ 그리고 따듯함












김병선 선생님 (협동학습연구회)

 


인터뷰_조창완  사진,정리_김현경

 


 

학생 김병선의 이중생활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밝은 아이었다고 기억해요. 그런데 6학년 때 굉장히 무서운 선생님을 만나면서 조용해지고 내성적이 됐어요. 하지만 교회에서는 달랐죠. 성극도 하고 합창도 하고 성가대도 서고요. 굉장히 적극적이었어요. 지금 이유를 생각해보면 교회에서는 제가 뭔가를 하고자 하면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특히 중고등학교 땐 같이 신앙생활했던 삼총사가 있어서 행복했어요. 성탄절이면 같이 새벽까지 뭐 만들고, 밤엔 라면 끓여먹고, 김치 없으면 목사님 댁 장독대에서 몰래 가져다 먹기도 하고요. 학교에서 누리지 못했던 안정감과 따듯함을 교회에서 많이 누렸던 것 같아요.

4~5살 때부터 어머니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학창시절까지 자연스럽게 신앙을 이어갔죠. 그런데 대학교에 들어가니 새로운 세계가 열리더라고요. 교회에서 신앙생활만 하는 것이 고리타분하게 느껴졌고 교회는 소심한 사람들만 있는 집단이라고 느껴졌어요. 저의 대안은, 교회와 세상을 걸쳐서 살자는 것.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 있어야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였죠. 사회과로서 데모도 많이 하고 그러면서 밤엔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시국을 얘기하기도 하고요.

 

좋은... 교사?

그렇게 대학 시절을 지나고 학원을 다니며 임용을 준비했어요. 한 다섯 번 떨어졌는데, 내내 학원과 고시원 아르바이트로 강의 듣고 숙식을 해결했어요. 그러다가 31살에 임용 합격하니 너무 좋은 거예요. 처음으로 월급도 받아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느낌도 들었고요. 아이들도 선생님 말에 순응하고, 무서울 게 없더라고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수업했어요. 그러면서 유흥문화에 젖어서 살았었죠. 그런데 그 삶이 썩 행복하지 만은 않았어요. 2~3년 지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왜 교사를 했지?’ 이렇게 교사생활 할 거면 교사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참 그런 고민할 때였는데 떠오른 것이 있었죠.

신규연수가 있었는데, 거기서 어떤 분이 좋은교사잡지를 한 권씩 나눠줬어요. 그 당시 제가 기독교사를 보는 관점은, 소심하고 무능하고 사회에 대해 소극적인 사람들그래서 거부감이 많이 들었어요. 받고 제목을 딱 보는 순간, 이런 건 나약한 너희들이나 봐라 하고 쓰레기통에 버렸죠. 그리고 2년이 지났는데 그 책자 제목이 어렴풋이 생각나는 거예요. 포털에 검색해서 전화를 했어요. 안양 지역에 만날 수 있는 사람을 소개해 달라,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요. 그때 김현섭 선생님을 소개받았어요. 그렇게 2~3년차, 교사를 그만두려던 시기에 안양 기윤실과 협동학습을 알게 된 거예요. 감사했던 건 힘들다는 느낌을 스스로 무시하지 않게 하시고 좋은교사라는 이름이 떠오르게 하셨다는 거죠.

 

이런 삶도 괜찮겠다

처음에 협동이나 기윤실 모임에 갔을 때 되게 답답했어요. 사람들을 만났는데 너무 약해 보이는 거예요. 특히 자기들 삶을 나누는 게 진짜 이해가 안됐어요. 더군다나 남자 선생님이 이야기 들으면서 아유, 선생님, 그러셨어요~” 이러는 모습을 볼 때.(웃음) 그런데, 이 사람들 하는 얘기가 교육에 대한 얘기네? 학교에 대한 얘기도 하고? 이렇게 약하신 분들이 어떻게 학교와 교육을 바꾼다는 거지? 이런 갑갑한 마음이 들었죠.

그런데도 제가 여기에 나갔던 것은, 제 말을 들어준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학교에서는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여기선 들어주니까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렇게 1년 정도 다니면서 분위기나 나누는 대화 내용이 익숙해지고 맥락이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그제서야 참 좋구나, 생각했죠.

또 하나의 큰 계기는 기윤실의 꿈섬’(꿈꾸는 섬김이) 3기 수련회였어요. 저는 사실 마음이 없어서 매달 있는 모임에 참석을 안했는데, 수련회를 앞두고 정철모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셨어요. 제가 하도 안 가니까.(웃음) 제가 이런 온정적인 것, 부드러운 것에 되게 약하거든요. 그래서 수련회에 참석하게 됐죠. 저는 거기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선생님들이 우리를 섬겨주시는 거예요. 비판 같은 건 받아봤지만 섬김은 처음 받아봤거든요. 섬기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이런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새롭게 생각했죠.

 

따듯한 교실을 만들기 위하여

한편 신규 때는 제가 수업을 되게 잘하는 줄 알았어요. ‘초장에 잡으라고 하잖아요? 저는 아이들 전부 90도로 앉아서 수업 듣게 했죠. 엄하게 하고. 그게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아이들 사랑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아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나름대로 먹을 것도 사주고 생일날 노래도 불러줬죠. 수업도 열심히 준비했었어요. 수업시간 중간 중간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말해주고 그럴 때 아이들이 웃는 모습 보는 것이 정말 행복했었거든요. 좀더 내면에 있는 부드러움으로 아이들을 대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마음에 있어요.

협동학습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수업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어요. 지금까지 13년 정도 하고 있는데, 협동학습을 하는 이유는 수업 중에 아이들의 미소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보통 수업시간엔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고개 끄덕이고 있는데, 협동학습을 할 땐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아이들이 모두 미소 짓고 있어요. 그게 너무 좋아요. ‘미소라는 건 서로 간에 소통이 이루어지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곧 배려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요. 아이들한테 물어봤어요. “재밌는 수업이 뭘까?” 참여하는 수업이 재미있다고 말해요. 그래서 참여라는 것이 뭔지 아이들에게 더 들어 보았더니 내가 말할 수 있고, 내가 한 말이 수용되는 느낌을 말하는 거였어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죠. ‘자기 말이 수용되고 실제 교실에서 공유될 때 아이들은 재미있어 하고 뿌듯해 하는구나. 그런 면에서 협동학습은 재미있는 수업일 수 있겠다.’

그러면서 두 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관계를 세워가는 놀이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한 가지는 공부에 관심 없는 아이들을 어떻게 깨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었죠.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를 하면서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 다음으로 생긴 문제의식은, 놀이를 할 때 모둠을 만드는데 모둠이라는 것은 교사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잖아요. 그 안에서 아이들의 관계를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죠. 관계가 세워지고 나면 공간이 따듯해지고 아이들과 학습은 부드러워지거든요. 그런데 관계를 세우는 활동이 협동학습 내에서 많이 개발되지 않았었어요.

이 두 가지 문제의식으로 시작해서 관계놀이라는 이름을 짓고 지금까지 40개 정도의 놀이를 정리했어요. 당시에 제가 근무했던 학교가 공부를 안 하는 분위기의 학교였어요. 그곳에서 실제로 아이들과 관계놀이를 해보면서 정리할 수 있었고, 마침 협동의 필요에도 잘 맞아들었던 것 같아요. 관계놀이는 수업에 뿐만 아니라 교사 연수에도 적용할 수 있어요. 관계가 세워진 후에 연수를 시작하는 것과, 연수자가 그냥 곧바로 연수를 시작하는 것이 많이 다르죠. 앞으로도 관계놀이를 계속 공부하고 싶어요. 50개 정도 더 정리하면 좋지 않을까요?

 

공동체, 성공과 실패

저는 지금까지 공동체속에서 변해왔어요. 협동과 기윤실에서 10여 년간 공동체를 통해 수업과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섬김의 의미를 알게 되었죠. 그런데 학교에서는 그런 공동체를 경험한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옆 선생님한테 물어봤죠. “선생님 행복하세요?” 안 행복하대요. “그럼 우리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만나볼까요?”해서 2012년도 3월에 선생님 다섯 명이 모였어요. 딱히 하는 것 없이 만나서 수다를 떨자, 그래서 교사들의 수다, ‘교수다라는 이름을 짓고 점심시간마다 만났어요. 다섯 명이 한 주마다 돌아가며 점심을 준비하고 같이 먹으면서 아무 주제 없이 생각 없이 막 수다를 떨었어요. 놀라웠던 건, 11월이 되니까 수다의 수준이 달라지는 거예요. 처음에는 학교 뒷담화로 시작했는데 점차 학교에 대한 비전으로 바뀌고, 이해되지 않는 아이들 얘기를 점차 나누다보니 아이를 향한 시선이 달라졌죠. 이 모임이 우리 학교의 대안이 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2013년도에는 전체 선생님에게 메신저를 쐈죠. “만나서 수다 떠실 분?”했더니 전체 58명 교사 중에 19명이 모이게 되었어요. 선생님들이 같이 나누고 싶어 하는 얘기는 크게 수업과 생활지도, 두 가지였어요. 그래서 매주 모이면 전처럼 같이 밥 먹고(19명이 21조로 돌아가며 점심을 사왔는데, 누군가를 위해 식사를 대접하는 기분이 들어 음식을 사면서 뿌듯했대요) 협동학습에 대한 강의를 하고 수업을 나누었어요. 나중에는 감정코칭에 대해 5개 팀으로 나눠서 독서토론을 했고요. 여기서 관계놀이도 한몫했어요. 놀이로 모임을 시작하고 삶을 나누니 선생님들이 수욱~’ 하나 된 느낌이었죠.

이 공동체를 통해 전체 학교가 굉장히 따듯해졌어요. 그때 느낀 건, 학교라는 공간을 충분히 다 행복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가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거죠. 이 경험이 저에게는 신선하고 행복했어요.

2015년도에는 연구부장을 하면서 정식으로 전문적 학습공동체를 세웠어요. 이때는 60%의 성공이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실패의 경험인데, 이때 저는 리더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방향성이 확 달라진다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서 리더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고, 리더가 세워졌다면 이 리더들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 고민했죠. 그 역할을 제가 했어야 했는데 그걸 제가 잘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아요.

 

따마네의 시작

학교 내 공동체까지 맛을 보았잖아요. 점점 마을이라는 공간에 대해 관심이 갔어요. 사실 전부터 관심이 있긴 했어요. 5년 전에 좋은교사운동에서 북유럽 탐방을 갔을 때, 각 마을에서 학교를 세우는 것이 너무 부러운 거예요. 마을마다 청소년센터가 있는 것도 너무 부러웠고요. 그러다가 한국에도 좋은 청소년센터(공릉동)가 있는걸 보았죠. “우리 동네에는 왜 없지?” 이 생각으로 처음 공동체를 만들게 되었어요.

지역사회의 청소년을 위한,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센터를 만들기 위해 도의원을 찾아가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많이 말했어요. 그러면서 많은 분들이 연결되었죠. 그렇게 아홉 명의 운영위원이 꾸려져서 1~2주에 한 번씩 만나 함께 고민하고, 역할을 나누면서 발족식까지 하게 되었어요. 마을이 따뜻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따마네’(따듯한 관양마을 네트워크)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어른이 만들어 놓은 놀이시설 말고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만드는 놀이시설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클래식 기타리스트를 모시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함께 하는 따마네 음악회도 하고, 마을 축제도 열었어요. 앞으로 음악회도 꾸준히 열고 싶고, 동네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도 추진하려고 해요. 시작한 이후로 사람들이 연결되고 있죠. 지금은 회원이 55명 쯤 되고요. 자원봉사자가 20여 명 있고, 주변 교회가 연합하는 움직임도 있어요.

 

비전은 따듯함

마을 공동체를 시작하고 나니 할 일이 무궁무진해요. 앞으로도 계속 이곳을 섬기고 있을 것 같아요. 제 비전은 청소년을 위한 교육센터를 세우는 건데요. 아이들이 찾아왔을 때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안에서 따듯함을 느끼는 공간을 만드는 게 꿈이에요. 누가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에 아이들이 그저 참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하고 편하게 놀 수 있는 곳이요. 또 청소년과 선생님을 섬기고 싶어요. 소통교육전문가를 꿈꾸고 있죠. 우리의 회의 문화, 조직 문화에 관계놀이를 연계해서 따듯한 문화를 만들어 가고 싶어요. 제 비전은 한마디로 따듯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