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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2017.3)

정병오 칼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의 고통, 내일의 염려

살다보면 어려움도 있을 수 있고, 모든 일이 다 잘 풀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러한 삶의 이치를 너무 잘 깨달아서일까? 요즘은 삶에 대한 기대가 잘 생기지 않는다. 젊을 때는 나이가 들수록 연륜이 생기기 때문에 삶의 고통을 견디기가 더 쉬울 줄 알았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갈수록 절감한다. 우선 나이를 먹을수록 감당해야 할 짐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 인생의 짐은 항상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무거운 것으로 내게 지워진다. 유사한 짐을 이전에 감당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짐의 무게와 고통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그러기에 짐을 지기 전부터 그 무게를 미리 느끼기에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참 어리석은 존재다. 다가올 고통과 삶의 무게를 미리 염려하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미래에 예상되는 어려움이 나를 억누를 때 이를 떨쳐버리기가 좀체 쉽지가 않다. 성경은 내일 일을 내일 염려하고 오늘 괴로움은 오늘 족하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영적으로 아주 고양된 때가 아니면 이 말씀 위에서 평안을 누리기가 쉽지 않다. 때로 이러한 짐이 너무 무겁게 다가올 때는 도망할 데를 찾기도 한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더 도망할 데가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젊을 때는 내가 현실을 회피하고 도망했을 때 미치는 파장이 작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나의 도망으로 인해 미치는 영향이 더 커지고 그것을 도무지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품으로 달려가다

결국 달려갈 곳은 아버지의 품 뿐임을 알기에 더욱 기도에 매달리게 된다. 이전에 체력과 건강을 핑계로 새벽기도에 게을리했던 것은 그만큼 절박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동시에 이동할 때든 일을 할 때든 약간의 틈만 나면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의 도우심을 간절히 간구하게 된다.

기도의 제목이나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이전에 경건의 훈련이나 영적 균형 차원에서 정기적인 기도를 할 때는 나름의 기도의 틀이 있었다. 가급적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틀을 따라서 기도의 흐름을 잡아보기도 하고, 나를 위한 기도와 타인을 위한 기도의 균형을 생각하기도 하고, 여러 많은 중보기도 제목을 요일별로 분류해서 기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와 미래의 고통들이 한꺼번에 나를 억누르고 이것이 내용적인 변화는 있지만 오랜 기간 지속되고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자 그냥 주님의 이름만 부르게 된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는 기도만 반복하게 된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르짖는 기도도 일정 기간 지속되자 나름의 틀이 형성된다. 우선 맨 먼저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를 반복해서 읊조린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시 다면 주께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상황을 아실 것입니다. 이 상황이 주님이 뜻이 계셔서 내게 주신 것이든, 아니면 그렇게 원하지는 않지만 허용하신 것이든,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도 최소한 주님이 내가 이 상황에 있음을 아시기라도 한다면, 그렇다면 됐습니다. 충분합니다. 혹 내가 이 고통에 맞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실족할 수도 있고, 혹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서 외로이 죽는다 해도 주님이 살아계시고 이 상황을 아신다면 나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라는 식으로 기도가 이어진다. 그러면 말할 수 없는 평안이 나를 덮는다. 나의 문제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반복해서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다음으로 나의 기도는 하나님이 나를 아십니다로 옮아간다. 여기서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나의 연약함을 아신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의미한다. 따지고 보면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은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다. 사실은 내게 감당할 능력이 부족하고, 내 그릇이 작아 충분히 품지 못하고, 내 믿음이 부족해 믿음으로 헤쳐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온 것들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짐과 고통을 안겨주는 상황이 반복되고, 그 상황으로 인해 나의 괴로움이 더 커질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나를 아십니다라는 기도를 반복해서 읊조리다 보면 내 영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한다. “그렇죠? 하나님! 나의 이 연약함과 부족함을 당신이 잘 아시죠? 아니 이 연약함과 부족함도 당신이 주신 것이 아닌가요? ! 하나님 이 작은 자를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드신 건가요? 그리고 하나님, 이렇게 작고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아시면 여기에 맞는 일과 맞는 사람을 붙여주시면 될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과 사람을 붙여주신 것이지요? 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데 왜 이렇게 남들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면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시죠? 제가 저의 부족함과 한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정말로 제 속에 다른 욕심이 없다는 것을. 정말 부족하지만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이웃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를 원한다는 것을.”

 

내 모든 상황 주 뜻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기도는 내 모든 상황이 주의 섭리와 뜻 안에 있습니다로 이어진다. 이 기도를 반복하다 보면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아직도 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내 모든 상황이 통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묘안이 생기거나 지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부분부터 하나씩 풀어가야겠다는 자유함이 주어진다. 그리고 혹 이 상황에서 내가 다시 실수하고 무능함으로 좌절하고 그로 인한 비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모든 상황까지도 주께서는 가장 선하게 바꾸어 가실 것이라는 믿음 위에 서게 된다.

동방정교회 예수 기도의 전통

동방정교회에는 침묵의 기도’ ‘진심의 기도’ ‘예수 기도라고 불리는 기도의 전통이 있다. 이 기도는 예수의 이름을 간구하는 간단하고 단순한 기도로 마태복음 927, 2030, 누가복음 1838절의 맹인들과 마가복음 1047절의 맹인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며 예수께 자비를 호소한 것에서 유래했다. 이 기도에 대해 정교회의 한 자료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예수 기도의 실행은 단순하다. 마음을 집중하여 주님 앞에 서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주님을 부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기도의 핵심은 말에 있지 않고 믿음, 회개, 주님께 대한 자기포기에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이러한 감정으로 주님 앞에 서 있으면 그대로 기도가 된다.”

 

기도할 힘조차 없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광대한 분이시고, 우리 작은 인생 안에는 총천연색의 다양한 삶의 양상이 존재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기도도 정말 다양한 형태와 모양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 한 가지 통로로만 만날 것이 아니라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그 분의 선하심을 만끽할 일이다.

때로 기도할 힘조차 없는 고통과 어려움에 직면할 때는 정말 단순하지만 핵심적인 기도의 내용을 가지고, 때로 그 말을 반복해서 읊조리면서, 때로 그 읊조리는 것조차 힘들 때는 그냥 있는 그대로 내 존재로 그 분 앞에 조용히 서는 것으로, 그렇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그런 기도를 통해 영적 힘을 공급받고 삶의 어려움을 이겨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