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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내 삶의 방향, 좋은교사(2017.4)



내 삶의 방향,

좋은교사






장선희 선생님 (화정고등학교)


─ 




인터뷰,사진 김영식

 


 

월간 좋은교사창간호 표지 모델!

정말 순간의 선택이 20년을 좌우하네요. 그때가 2000, 교직 2년차인데요. 그해 제가 몹시 몸이 안 좋았어요.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는데 당시에 제겐 하늘같은 송인수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급히 사진 한 장만 찍어달라고. 입원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는데도 명함 정도의 사진 하나만 찍어주면 된다고 간곡히 부탁하시는데, 가슴 깊이 존경하는 분이라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퇴원하는 날 거의 화장기 없이 검정색 원피스를 입고 겨우겨우 스튜디오에 나갔습니다. 사진기사 분이 그런 저를 보고 깜짝 놀라시고 굉장히 난처해 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도 잡지 표지에 나갈 거라는 사실은 절대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나서 2000년 역사적인 기독교사대회에 참석했지요. 그런데 사방팔방에 제 얼굴이 돌아다니는 거예요. 너무 깜짝 놀라고 당황스러워 숨어버리고 싶고 송인수 선생님께 당장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었죠. 하지만 오죽 급하시면 입원했던 제게 부탁하셨을까 싶어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고 실물이 더 낫다고 하셔서 위로가 되었죠. 하하하! 그나저나 이제 17년이나 지났으니 좋은교사 창간호 표지 모델이라는 수식어는 그만 들어도 될 듯싶은데. 그래도 우연히라도 창간호 표지 모델이 되었다는 것이 감사해요. 제 인생의 큰 영광이고 기독교사로서 살아가야 할 삶의 무게감을 늘 깨닫게 해주네요.

 

빈 그물을 씻고 있던 나의 시절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까지 저는 냉담자였어요. 어머니가 맹목적으로 신앙에 매달리는 것 같아 보였고 전혀 과학적이지 않고 비합리적인 교리가 저를 설득하지 못했어요. 결정적인 건 왜 나를 이렇게 태어나게 해서 고생시키는지,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따지고 싶었어요. 고등 시절에는 겨우 엄마 손에 끌려 어른예배만 참석했지만 낙서하는 시간이었어요.

대학 입학 후에는 가끔 청년부 예배만 나가면서 제 마음대로 살았어요. 심지어 제발 저를 내버려두세요. 저는 제 마음 가는대로 살 거예요. 그러니 저에게는 간섭도 말고 신경도 꺼주세요.’라고 기도했던 기억이 나요. 대학생활은 최선을 다했어요. 전공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자격증 하나 더 따겠다고 교직이수도 하고 전국 대학 전산인 연합회에 들어가 신문 제작 활동을 하면서 재미있게, 열심히 살았죠.

그러다 임용시험 실패하고 취직했던 회사에서 힘들었어요. 그때쯤 저를 챙기고 전화를 주던 교회 언니가 생겼어요. 초등교사였던 언니는 교사로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아이들에 대한 고민을 터놓고 얘기하면서 제가 교사의 꿈을 꾸도록 도와주었어요. 그때부터 저는 자발적으로 말씀을 보기 시작했고 누가복음 5장에서 빈 그물을 씻던 베드로를 찾아주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죠. 20대 중반까지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허탄한 마음으로 빈 그물을 씻고 있는 제 모습이 베드로와 겹쳐지면서 제 귀에 대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직접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때 얼마나 통곡하며 울었는지 몰라요. 제 인생의 허무함을 아시는 것 같았고, 그동안의 수고와 아픔을 모두 받아주시는 느낌이었어요.

 

진짜 교사가 되고 싶지 않았답니다

학창시절 만난 선생님은 딱 한 분 기억이 나요. 초등학교 시절 가난에 위축된 저를 대부분의 선생님이 주목해 주시지 않았어요. 반장, 부반장이 되면 엄마가 학교에 오셔야하고 학교에 돈도 내야 한다고 해서 늘 기권했었죠. 그런데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이셨던 최경련 선생님은 임원이 아닌 제게 심부름도 시키시고 판서도 맡기시고 숙제검사도 시켜주셨지요. 정말 날아갈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이후 학창시절 선생님들은 학생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서 저는 진짜 교사가 되고 싶지 않았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교사가 되고 싶었다면 수학이나 과학계열 학과를 갔겠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전자계산학과에 들어가서 이력서에 자격증 하나 더 쓰려고 교직이수를 했던 저를 기독교사로 부르신 건 기적과 같은 일이죠.

교회에서 청소년부 교사를 시작할 때 다른 선생님들이 어려워하던 학생들을 맡았어요. 말씀을 나누면서 그 아이들과 맛있는 것도 먹고 영화도 보면서 정말 친해졌어요. 거칠고 세상을 삐딱하게만 쳐다보는 가난한 아이들은 흡사 어린 시절의 저를 보는 것 같았지요. 제 청소년기의 아픔을 다시 마주하면서 치열한 경쟁 속에 꿈 없이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청소년들을 도와야겠다고 결단했어요.

회사를 다니면서 임용고시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제대로 공부가 안되었어요. 결국 상황을 말씀드리고 사직서를 준비했는데, 과장님께서 다들 힘들어서 싫어하는 지방 출장을 주로 맡아주는 대신 회사에서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제안하셨어요. 과장님 덕분에 회사를 다니면서 출장 사이사이 임용고시를 준비할 수 있었지요. 공부할 분량이 너무 많아 막막해질 때마다 기도하면서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지혜를 간구했어요. 그래도 주께서 내 삶을 이끄신다는 확신을 주셔서 행복하게 공부했어요. 임용고시 보던 날, 떨려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초췌한 얼굴로 시험장에 갔는데 전공과목과 논술에서 제가 뽑아놓은 예상 문제가 모두 나와 쓰러질 뻔했어요. 그렇게 199927, 경기도 고양시의 한 중학교 정보교사로 발령받았답니다.

 

신규 시절의 고민

발령받기 전에 서점에서 민들레라는 대안교육잡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민들레를 구독하고 관련된 대안교육 서적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써머힐에 특히 감동을 받았지요. 저도 학교에 가면 자발성과 사랑의 교육학을 실천하리라 마음먹고 교단에 섰어요. 그러나 임용 첫 해, 학교 정보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혼자 교육정보부 업무를 도맡았어요. 선생님들은 저를 A/S 기사로 보셨죠. 쉬는 시간마다, 심지어 수업시간 중에 프린터 안된다 컴퓨터 안된다 연락하셔서 도와드리고 혼자 학내망 구축과 성적처리, 생기부, 담임업무를 병행하면서 탈진했지요. 이게 내가 꿈꾸던 교직인가 이런 일을 시키려고 저를 교사로 부르셨는가 괴로워하며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며 우아한 교직생활을 꿈꾸던 저는 밤늦게까지 야근하며 마음을 나눌 교사도 없이 각종 장비들이 웅웅거리는 정보실에 혼자 남아 일했었죠.

그 시절 고양시 기윤실교사모임이 없었다면 다시 회사로 돌아갔을지도 몰라요. 제가 다녔던 교회에 기윤실교사모임에서 활약하시던 이상흥 선생님이 계셨고 그분의 안내로 기윤실 고양일산 지역모임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함께 기도해 주신 덕분에 이듬해 학교에 동역자들을 보내주셔서 신우회를 시작하고 그분들도 기윤실교사모임에 함께 나가게 되었어요.

 

좋은교사운동의 과거 vs.현재

요즘 배움의 공동체선생님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요. 그분들이 좋은교사는 지속적인 실천력을 가진 보기 드문 교사 단체라고 칭찬하셨어요. 지금의 좋은교사운동은 배움의 윤리적 실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과거에도 물론 열심히 노력했지만 미시적으로 학급 안에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면 현재는 거시적으로 학교의 교육력 회복과 나아가 우리나라 교육 전반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죠. 학생들의 배움, 교육공동체의 관계 회복, 교사의 전문성 신장, 혁신학교 등 교육의 텃밭을 바꾸는 근본적인 실천을 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쉬운 부분은 첫째로 여러 연구모임이 모여 학교 전체의 교육과정을 통합적으로 설계하고 고민하는 지점이 미흡하다는 점이에요. 좋은교사의 연구모임이 학교교육과정을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고민하여 학교교육과정의 샘플을 구성해보면 어떨까요? 두 번째로, 좋은교사의 학습부진아 정책인 배움찬찬이가 학교와 가정, 지역과 연결된 치밀한 시스템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습부진의 원인은 상당히 넓어 교사의 수업 전문성을 향상시킨다고 해서 해결할 수 없어요. 현재 학교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무기력한 학생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어 수업의 어려움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육청 정책은 의욕적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요. 배움이 어려운 학생들, 자발성이 사라진 학생들을 돕기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을 도입하고 집중해야 학교에서 모두가 행복한 배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을 올인할 곳

정보교과의 성격상 특성화 고등학교에 10여 년 근무하면서 자격증에 많이 휘둘렸습니다. 학생들에게 자격증 취득이 당장 도움되는 것은 알겠으나 수업에서 전혀 재미를 찾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정보교과를 국가교육과정에서 축소시킬 때쯤 타교과로 전과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렇지만 4년 넘게 계속 도전해도 번번이 전과가 되지 않아 좌절했지요. 그때 저의 멘토 선생님께서 선희야, 이제 정보교사로 살아야겠다.”라고 얘기하셨는데 그것이 마치 하나님 음성으로 들렸어요.

현재 인문계 고등학교에 부임하면서부터 비로소 제 교과를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양파주 지역 내 정보교사들을 모아 학교 밖 전문적 학습공동체를 구성하고 지난 3년간 수업나눔과 성찰, 각종 정보연수, 소프트웨어 선도학교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어요. 며칠 전 복직한지 1년 된 여선생님께서 저희 모임이 없었다면 생존이 불가능했을 거라고 울먹이며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는데 정말 울컥하더라구요.

4차 산업혁명으로 세상이 떠들썩하죠. 사람들은 사이버공간에서 가상 자아에 빠져들고 있고 모든 산업은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기계화, 자동화되고 있어요. 저는 이 시대 정보교사들이 4차 산업혁명의 기능인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방향을 읽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가도록 코딩 안에 삶의 가치를 녹여내는 수업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수업을 고민하면서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중입니다.

학교에서의 제 모습은 동분서주라는 표현이 딱 적절한데요, ‘좋은교사로서 바람잡이 역할을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실적이 없네요. 정보교사모임처럼 학교에서도 수업을 중심으로 전문적 학습공동체를 구성해서 수업나눔을 진행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교사 스스로 입시라는 틀을 깨지 않는데다 학교 관리자분들도 생각이 달라 분투하고 있지요.

때로 왜 하나님은 늘 황무지 같은 학교로만 이끄시나 싶어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어요. 아무것도 안하겠다고 요나처럼 삐쳐 숨어버린 적도 있었죠. 그런데 요나처럼 다시 현장으로 토해지게끔 상황을 만들어 가시더라구요. 돌아보면 힘들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소명감을 통해 공급해주셨던 것 같아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꿈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좋은교사로서 살아가게 이끄신다고 믿어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현재의 삶도 이끄심의 한 과정이고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좀더 나은 교육적 토양을 만들기 위해 앞으로도 제 인생을 올인할 것이고 아니, 올인하게 이끄실 것이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을 반드시 보게 하시리라 확신합니다.

 

기독엄마와 기독교사의 사이에서

교사가 되면서 접한 민들레를 통해 대안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기독교적인 대안교육이 무엇인가 고민하며 좋은학교만들기모임에 함께 했었어요. 남편을 만나 꿈을 나누고 결혼하여 자녀를 양육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육이 무엇일까?’ 제 아이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치열한 논쟁 끝에 남편은 제 선택을 존중해주어 공동육아를 시작했고, 지금은 고양자유학교(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요.

저는 기독교의 핵심 가치가 공평, 정의,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기독교적인 대안교육은 그 핵심가치를 내면화하고 실천하는 배움이 있고 또한 민주주의가 작동되는 현장이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무늬만 기독교적인 곳이 아니라 뜨겁게 실천해내는 현재 대안학교를 선택하게 되었지요. 저 또한 부모인지라 아이들의 학력과 진로에 대해서 여전히 고민을 해요. 그럼에도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육이 자본화된 이 시대에 학부모들이 뜻을 같이하여 교육의 이상을 현실로 일구어내는 과정을 함께 하면서 자발성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또한 협력이 얼마나 놀라운지 경험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사이자 엄마, 아내, , 며느리 역할에, 교회, 정보교사모임과 대안학교 학부모까지 많은 역할을 감당하는 게 정말 어렵지요. 그래서 사실 솔직하게 얘기하면 한 개도 제대로 못하고 있어요. 늘 동분서주하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살아가는 제가 참 마음에 들어요. 후배 교사 엄마들에게 아직까지 별 귀감이 될 수는 없을 것 같구요. 다만 하고 싶은 말은 첫째, 빚내서라도 육아휴직 충분히 하기, 둘째, 휴직해서 동네 아줌마들 많이 사귀기, 셋째, 기독교사임을 잊지 말기. 이걸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린 자녀를 양육하면서 교사로서 살아간다는 건 아이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만족감이 떨어져요. 뒤돌아보니 아이의 유아기에 함께 하는 엄마로 살아본 경험은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행복한 경험이었어요. 빚을 내서라도 충분히 육아휴직을 해서 살림도 배우고 아이의 친구 엄마들과 즐겁게 사귀면서 주부로서의 행복감을 경험하시기 바라요. 특히 아줌마들과 친해지면 나중에 복직했을 때 학교로 찾아오는 드센 엄마들이 겁나지 않아요. 그 엄마들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 공감하게 되고 훨씬 친밀해지면서 오히려 지지자로 확보할 수 있습니다. 저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단 1년 밖에 못해 너무 아쉽지만 공동육아를 하면서 아줌마들과 많이 친해질 기회가 있었고 덕분에 가정방문 때도 훨씬 편하게 학급 엄마들을 만나 제 학급운영의 지지자로 세울 수 있었어요.

그리고 기독교사의 정체성은 다시 내 인생을 나답게 만들어주고 일으켜주는 힘이 돼요. 일인다역을 맡고 너무 힘겨워서 기독교사고 뭐고 다 벗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많았지만 역시 제가 돌아올 곳은 기독교사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 처녀 적에 열심히 좋은교사 활동하셨다가 접어둔 채 아줌마 샘으로 전락하신 분들 꽤 계시죠? 머뭇거리지 마시고 좋은교사 연구모임, 수련회, 각종 연수에 기웃거리시고 참여하셔서 좋은교사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장선희에게 좋은교사운동이란

좋은교사운동은 제 삶의 동역자이자 삶의 방향이에요.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마다 다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질 수있게, 그래서 기독교사로서의 기쁨을 회복하게 도와주셨어요. 사랑하는 남편을 이곳에서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귀한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 함께 꿈꾸며 실천해 나가게 하셨지요. 저희 부부는 좋은교사운동에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아 늘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아마 주의 품에 갈 때까지 후원하고 동역하며 살아갈 것 같아요. 비록 지금 저희 부부가 분주하여 저희를 연결해 준 경기도 일산모임도 못나가고 있어 심히 죄송합니다만 늘 빚진 자의 마음으로 좋은교사를 꿈꾸며 치열하게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