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병오 칼럼

가지 않을 수 없는 길(2017.5)

정병오 칼럼

 


가지 않을 수 없는 길

 

 






 

기윤실, 모태신앙(?)

지난 3,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 총회에서 공동대표를 맡게 되었다. 내가 처음 기윤실과 인연을 맺은 것이 기윤실 창립의 맹아 역할을 했던 서울대 교수 성경공부 시절부터였으니 나와 기윤실의 관계는 일종의 모태신앙(?)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5년 무렵부터 서울대 교수 성경공부 모임이 시작되었는데 이 모임에서 학교 복음화를 위해 학생 선교단체들을 많이 도와주고 있었다. 1986년 즈음 내가 선교단체 대표를 하면서 기독교연합 행사 관계로 교수님들 성경공부 모임을 찾아갔을 때 손봉호 교수님의 인도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산상수훈 강해를 열심히 공부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이 성경공부 모임이 2~3년 지속되면서 어두운 시대 가운데서 기독교인이 복음에 근거한 사회적 실천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 모임이 주축이 되어 1987년 기윤실이 시작되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기윤실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군 제대 이후인 1990년부터였다. 당시 기윤실이 펼치던 검소 절제 운동은 내 신앙의 정체성이나 생활방식과 잘 맞아 떨어졌다. 나를 위한 소비를 최소화하는 생활을 하거나 40대가 되기 전까지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는 등 기윤실의 몇 가지 약속은 내 삶의 기반이 되었다. 기윤실이 펼치던 건강한 가정,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내가 속한 가정과 교회에서 실천하려는 노력도 꾸준히 했다. 그리고 기윤실이 펼치던 공명선거운동, 스포츠신문을 포함한 음란물 감시 운동 등에도 시간을 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교사운동이 기윤실에 지고 있는 빚

1992년 기윤실 내에 교사모임이 결성되었고 나도 핵심 멤버로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기윤실에서는 정직운동을 펼치기 위해 각 전문 분과 모임을 조직하고 있었고 교사모임도 그 중 하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윤실이 요청했던 학교 내 촌지와 불법 찬조금 근절, 기타 재정 관련 불법적 관행 근절 운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수업, 생활지도, 학교문화 등 교육 본질을 붙들고 씨름하는 교육운동 단체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역설적으로 기윤실 교사모임이 교육 본질의 문제로 더 깊이 들어가고 기독교사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해지면서 기윤실 본부와의 연결 고리는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교사모임 뿐 아니라 다른 전문 분과 모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에 대해 기윤실은 교사모임을 포함한 각 전문 분과 모임을 기윤실에 붙들어두려고 하지 않았고 기꺼이 독립을 시켜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정치영역의 희망정치시민연대’, 문화영역의 놀이미디어교육센터’, 법률영역의 기독변호사회(CLF)’, 가정영역의 크리스천라이프센터’, 교회영역의 교회개혁실천운동등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많은 기독 단체들이 기윤실의 직간접적인 도움에 힘입은 바 있다.

좋은교사운동만 해도 기윤실에 큰 빚을 지고 있다. 1998년 제1회 기독교사대회를 준비할 때 당시 좋은교사운동은 아무런 조직이 없었고, 10여 명 정도 되는 기윤실 교사모임이 간사단체를 맡아 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기윤실이 사무실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에 당시 기윤실 교사모임 멤버들은 퇴근 후 기윤실 사무실을 기독교사대회 사무처로 활용하면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사대회 기간에는 기윤실이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사무국 간사를 다 투입해서 대회를 섬겨주었다. 그런 보이지 않는 후원이 있었기에 제1회 기독교사대회가 가능했었다.


부르심과 부담

1998년 기독교사대회 이후 나는 좋은교사운동 사역에 집중을 해야 했다. 그래서 기윤실 운동은 개인적 삶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실천을 했지만 조직적으로는 별로 기여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4~5년 전부터 기윤실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기윤실 사무국 조직 내부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조직에 깊게 간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기윤실 공동대표를 맡아 기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지금 기윤실이 처해있는 상황을 생각하거나 내가 가진 은사와 능력을 생각할 때 기윤실 공동대표의 자리는 내게 적지 않은 부담이다. 기윤실은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기독시민단체이고 1990년대와 2000년대 한국 교회의 쇄신이나 한국 사회의 공의를 위해 크게 기여를 했다. 그리고 손봉호, 이만열, 김인수, 홍정길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리더십을 발휘했다. 하지만 30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활동력이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고 조직도 노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선배들의 헌신과 기여는 후배들에게 부담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교사로서 교육운동가로 집중된 삶을 살아왔기에 이를 벗어난 일반 한국 사회의 개혁이나 한국 교회의 개혁에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일반 한국 교회 가운데 리더십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내가 아니면 누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이 지난 30년 동안의 활동과 헌신을 통해 축적해 놓은 기윤실이 갖는 신뢰는 여전히 소중한 한국 교회의 자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신뢰도는 그 어느 때보다 실추되고 있고, 한국 사회는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로 인해 갈수록 비인간화의 길로 가고 있다. 즉 그 어느 때보다 기윤실의 활동을 필요로 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비록 어렵긴 하지만 지금 기윤실이 가지고 있는 자산을 바탕으로 한국 교회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과 직면해 이 문제들을 풀 수 있는 대안들을 만들어가는 일에 누군가 헌신해야 하는 상황임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내가 비록 부족하긴 하지만 좋은교사운동을 통해 경험한 기독운동의 비전과 노하우들을 묵혀 둘 것이 아니고 필요한 곳에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지금 기윤실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도 지난 몇 년의 과정을 통해 부인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기윤실을 처음 시작했던 분들의 당시 나이가 지금 내 나이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그들이 30년 전에 기윤실을 통해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믿음으로 세상을 변화시켜가는 비전과 장을 열어주었던 것처럼 지금은 내가, 우리 세대가 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지금 청년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생각할 때는 나의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깃발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교사운동의 파송을 기다리며

내가 기윤실 공동대표를 맡게 된 이 과정이 한편으로는 나 개인적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좋은교사운동이 나를 기윤실로 파송하는 것으로 여겨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 역시 학교와 교육을 변화시키기 위해 좋은교사운동을 일으키고 헌신하던 그 마음으로 기윤실을 통해 한국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사역을 감당하려고 한다. 동시에 좋은교사운동 회원 대부분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이 일에도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여러 여건의 한계 상 우선 부름 받은 아이들과 학교에 집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내가 이러한 회원들의 마음을 담아 기윤실을 통해 한국 교회와 사회를 바꾸어가는 일에 파송 받아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기에 나를 좋은교사운동에서 기윤실로 파송한 자로 여겨주시고 기윤실에 대한 기도와 후원에 참여해주길 당부 드린다. 우선 기윤실 회원으로 가입하는 것으로 첫발을 떼 주시길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