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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사람 노릇, 어른 노릇(2017.06)

정병오 칼럼

 

사람 노릇, 어른 노릇

 

 

 

몇 주 전 이만열 교수님이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 오셔서 오전 예배 설교를 하시고, 오후 모임 특강을 하셨다. 올해 한국 나이로 80세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식은 젊은이들보다 더 날카로웠고, 겸손과 소탈함이 묻어나오는 그의 태도는 노인의 티를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해직교수, 투사가 아닌 신앙인을 만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재학 중이던 19842학기였다. 그는 19807월 전두환 군사 정권에 의해 강제로 해직되었다가 만 4년 만인 19849월에 복직되었다고 했다. 당시 삼엄한 군부독재의 현실을 조금씩 피부로 느껴가던 대학 1학년의 입장에서 해직교수는 범인이 접근할 수 없는 강인한 의지를 가진 투사일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그는 가난한 학생들의 끼니 걱정을 해 주며 짜장면을 시켜주시는 소탈한 시골 아저씨와 같은 자세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그때 그와 나눈 대화의 내용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해직 기간 4년 동안 있었던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강조하셨던 것 같다. 그도 인간인지라 중간중간 분노를 표출하기도 했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오를 땐 테니스를 치면서 그 공이 누구의 머리라고 생각하고 힘껏 쳤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분위기는 그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셨던 일에 대한 증거였다. 내용은 군사 정부 하에서 그가 당한 고난의 이야기였지만 한 편의 설교를 듣는 것 같았다.

 

한국인의 삶에 응답하는 신학을 하라

이후 그는 내가 활동하던 기독동아리 정기모임이나 수련회에 와서 여러 차례 강의를 했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인격적인 중생의 경험을 중시하는 철저한 보수신앙에 기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양에서 형성된 수입 신학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상황에 대한 성경적인 응답을 추구할 것을 도전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교리문답을 신조로 붙들고 있는 우리 기독동아리에게, “이 신앙고백서는 훌륭한 내용이지만 17세기 영국의 상황에서 고민하여 나온 신앙고백이니, 너희는 20세기 한국의 상황에 기반한 새로운 신앙고백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도전하곤 했다. 그리고 당시 보수교회가 이단시 하던 민중신학에 대해서도 나도 이 내용 가운데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그들이 한국 민중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 주목하고 그들의 상황에 대한 해답을 성경에서 찾아 신학화했다는 자체는 높이 평가를 평가한다.”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보수적인 신앙 전통에 있는 우리에게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역사학자로서 교회사를 보는 관점도 남달랐다. 그는 교회사를 선교사 중심으로만 봐서는 안 되고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받아들여서 어떤 신앙고백과 삶을 살았으며, 기독교가 한국 역사 가운데 어떻게 상호작용을 해왔는지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한국교회사가 아닌 한국기독교사라고 서술했으며, 그 관점에서 역사 전공학자들을 모아 한국기독교사연구회’ ‘한국기독교사연구소를 만들어 연구를 주도했다.

 

격려의 사람

내가 대학 4학년 때였다. 그 때 내가 활동하던 기독동아리에 기독 대학생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한국 기독교의 중요 인물을 만나 인터뷰를 싣는 꼭지가 있었다. 그 꼭지를 내가 담당했기 때문에 이만열 교수님을 만나 인터뷰 기사를 실은 적이 있었다. 내가 정리한 인터뷰 기사를 본 교수님은 자신이 이야기를 한 것보다 훨씬 더 정리를 잘 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칭찬 덕에 나는 내게 어떤 내용을 들을 때 그 핵심을 파악하고 그것을 정리해내는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방면으로 나를 더 계발해나갈 수 있었다.

이런 일이 나한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젊은이들을 사랑했고, 그들과 교제하면서 그의 은사를 발견하고 격려하며 그 길을 안내하는 일을 잘 하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학교를 가서 목회를 하라고, 어떤 사람에게는 계속 공부해서 학자로서 기여하라고, 어떤 사람에게는 운동가의 길을 권하곤 했었다. 그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 통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대적 과제에 응답하는 운동

그는 유능한 학자였지만 학자로만 산 것은 아니었고 시대적 화두를 붙들고 그것을 변혁할 수 있는 운동을 일으키고 조직을 만드는 일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래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시작될 때 발기인으로 공동실무책임자로서 섬겼고, 경제정의실천연합이 시작될 때는 직접 임원을 맡지는 않았지만, 진보적인 기독교인들과 보수적이지만 열린 기독교인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연결시키는 일을 감당했다.

남북 통일 문제를 늘 시대적 과제로 생각했기 때문에 보수적인 교회들이 중심이 되어 북한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던 남북나눔운동창립과 이후 활동, 무엇보다 방향을 잡아가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남북나눔운동이 단지 물질적으로 북한을 돕는 사역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알고 다방면의 기독학자들을 연결해서 그들로 하여금 정기적으로 모여 북한과 통일과 관련한 연구 활동을 하도록 격려했다. 그 결과 이 연구모임은 한반도평화연구원으로 발전해 남북 관계 관련 싱크탱크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탈북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그들의 삶을 지원하는 하나로 장학회를 창립해 오랫동안 섬겨오고 있다.

 

자신을 지켜가는 비결

이와 같이 그는 시대를 분별하고 그 시대에 응답할 수 있는 운동을 만들고 섬겨왔으나 그 단체의 리더십을 독점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사람을 모으고 초기 운동의 틀을 만드는 일에 기여했지만 할 수 있다면 후배들이나 혹 더 전문성을 가진 사람에게 리더십을 빠르게 이양했다. 그리고 다시 시대를 보면서 필요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은 영역을 찾아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후배들을 불러 그 일을 하도록 격려하곤 했다.

그는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일평생 일기를 써 온 것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역사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면서 자신부터 자신 주변과 시대를 살피면서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렇게 빠지지 않고 매일 오늘의 역사를 기록한 기록은 후세에 매우 소중한 사초(私草)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길을 따라서

젊을 때 혹은 장년기에 한 시대를 풍미하거나 혹은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은 많이 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나이가 들면서 변절하거나 노욕을 부리거나 아집에 사로잡혀 후배들을 실망시키는 사람이 많다. 그들을 볼 때 나도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에 반해 이만열 교수님은 나이가 들수록 더 선명하게 정의를 말하고 불의를 꾸짖으며 더 지혜로 시대를 분별하여 빛을 비추어주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대접받기를 원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자신을 드리는 드문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많은 후배들이 힘을 얻고 희망을 얻는 것 같다.

나 역시 이런 믿음의 선배, 믿음의 어른이 있음을 알기에 세태를 핑계치 않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나를 채찍질하려고 한다. 제대로 사람 노릇하고 어른 노릇하며 살아갈 수 있길 기도하고 소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