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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다시 말씀 묵상의 바다에 빠지다(2017.07)

정병오 칼럼

 

다시 말씀 묵상의 바다에 빠지다

 

 

말씀 묵상을 글로 정리해 나누기 시작

3월부터 매일 아침 말씀 묵상한 것을 글로 정리해서 가족 채팅방과 내가 소속된 지역모임인 기윤실 강남모임 단체 채팅방, 페이스북과 교회 홈페이지 등에 올리고 있다. 말씀 묵상한 것을 글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가족들의 생애 주기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자라서 청년 대학생이 되고 막내도 고3이 되니 가족기도회 시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졌다. 아이들의 개인 일정이 다 달라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 나이가 50을 훌쩍 넘기다보니 저녁 식사 후 쏟아지는 잠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냥 쓰러져 잠드는 경우가 많아졌다. 현실적으로 가족기도회는 주 1, 주일 저녁에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사실 아이들이 청년, 대학생, 고등학생이 되고 스스로 부모로부터 독립할 나이가 되었지만, 부모가 보기에는 영적으로 굳건히 선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는 진학, 취업, 결혼 등 인생의 정말 중요한 관문을 통과하는 나이기 때문에 더 많은 기도와 영적 분별력, 믿음의 싸움이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고, 부모로서는 뒤에서 더 많은 기도의 후원을 하지만 인생의 선배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자신의 삶의 고민과 진로를 위해 씨름하도록 돕기는 점점 더 힘든 상황이 되었다. 더군다나 매일 드리던 가족기도회를 드리기 힘들어지니 이 기회는 더 줄어들었다.

그래서 매일 내가 말씀 묵상한 것을 가족 채팅방에 올려서 아이들이 말씀 가운데 자신의 삶의 문제들을 풀어가는 데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자고 생각한 것이다. 이왕 말씀 묵상을 글로 정리했으니 이를 교회나 지역모임 선생님들, 그리고 페이스북 친구들과도 나누기로 한 것이다.

 

말씀 묵상과 나눔의 추억

이렇게 매일 빠짐없이 말씀 묵상한 것을 글로 정리하다 보니 처음 말씀 묵상을 배우던 대학생 시절이 많이 생각났다. 처음 대학에 입학한 후 들어간 기독 동아리에서는 매일 아침 820분에 모여 30분 정도 아침기도회를 가졌다. 선후배들과 같은 본문 말씀을 읽고 서로 묵상한 내용을 나누고 그 내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는 이 시간은 내게 꿀 같은 시간이었다. 돌아보면 대학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이 아침기도회에 거의 빠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특별히 한국성서유니온 초대 총무를 역임했던 윤종하 총무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말씀 묵상과 나눔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 1학년을 마친 겨울방학 때 잠실역 근처의 한 교회당을 빌려 기독 동아리 겨울수련회를 가졌는데, 마침 그 근처에 살던 윤종하 총무님은 4일 동안 매일 새벽에 오셔서 성경묵상의 원리와 더불어 구체적인 적용 방법에 관한 워크숍을 인도해 주셨다. 이후 윤 총무님은 우리 동아리 전체 모임이나 수련회 단골 강사로 오셔서 말씀 묵상 뿐 아니라 개인 성경공부,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교제하는 삶, 성경을 어떻게 보고 해석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주옥같은 말씀을 해 주셨다. 이런 모든 훈련 덕에 대학 4년 동안 내게 말씀을 보는 시각이 열리고 말씀을 묵상하는 맛에 푹 잠길 수 있었던 것은 내 삶 전체에서 가장 고귀한 자산이 되었다.

 

말씀에서 기도로, 영성의 중심 축 이동

이러한 말씀 묵상의 풍성함은 대학 졸업 이후에 잘 이어지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매일 아침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은 거의 빠지지 않았지만 대학생 때와 같이 아침기도회로 모여 내가 묵상한 것을 내 입술로 고백하고 나누는 과정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묵상한 말씀이 내 가슴에 새겨지지 못하고 그냥 흘러가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직장 일은 물론이고, 자녀들이 태어나면서는 가정의 일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침 말씀 묵상 시간이 점점 축소되었다. 급기야 출근길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읽는데 급급하게 말씀을 보았다. 깊은 묵상이 될 수가 없었다.

또 한 가지 변화도 있었다. 내 영성의 중심이 말씀 묵상에서 기도로 옮아가기 시작했다. 살아가면서 현실의 삶을 감당하기가 점점 버거워지고 여러 곳에서 책임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지면서 나의 한계와 무능력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현실의 절박함에 말씀은 즉각적으로 응답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말씀을 아전인수 식으로 적용할 수는 없었다. 이에 비해 기도를 하면 나의 절박함을 언제 어디서든 아뢸 수 있었다. 그래서 새벽이든 밤이든 출퇴근길이든, 교회당에서든 집에서든 학교 내 조용한 공간에서든 길 위에서든, 이야기하고 부르짖고 호소할 수 있었다. 물론 말씀 묵상과 기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기에 말씀 묵상을 가지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다가 말씀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어쨌든 영적 중심은 기도에 더 있었던 것 같다.

 

자투리 시간에 반복해서 읽으며 질문하기

올 들어 말씀 묵상한 것을 글로 정리해서 가족 채팅방과 페이스북을 포함한 몇 매체에 올리면서 마치 대학생 시절 아침 기도회 때 내가 묵상한 말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때와 같이 말씀이 내 속에 새겨지는 경험을 한다. 말씀 묵상이라는 것이 묵상 자체만으로는 흘러가기가 쉽고, 그것이 글이든 말이든 자신의 몸을 통해 고백되고 표현될 때 몇 배 더 강력하게 자신에게 새겨지는 것 같다. 더군다나 페이스북에 말씀 묵상한 것을 올리다보니, 나와 같은 본문으로 묵상을 하고 매일 그 내용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세 명의 동역자를 만났다. 그 분들은 다 개인적으로도 알고 신뢰하는 분들이라 다른 사람이 묵상한 것을 읽으며 다시금 대학 시절 아침 기도회 때 서로의 묵상한 것을 들으며 은혜가 배가 되던 그 느낌을 받고 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글로 정리하려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여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여력은 여전히 없다. 그래서 말씀 묵상을 정한 시간에 깊이 하는 것이 아니라 틈나는 대로 반복해서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본문을 읽고 출근길에도 읽고 퇴근길에도 읽고 자기 전에도 읽는다. 여유가 있을 때는 당일 본문 뿐 아니라 다음 날 본문을 미리 읽어보기도 한다. 읽으면서 계속하는 작업은 질문 던지기. “하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 “다른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여기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시지?” “이 사람은 하필 이렇게 행동(반응)했을까?” “왜 이 부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렇게 강조를 했을까? 그리고 이 부분은 정말 궁금한데 생략했을까?” “본문이 기록될 당시 상황에서는 이 본문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그리고 오늘 상황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등 질문이 끝이 없다.

이렇게 반복해서 읽고 읽으면서 질문을 던지다 보면, 처음 읽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나중에 보이는 것들이 읽고, 처음에 도무지 잡히지 않던 것들이 깨달음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그러면 그 깨달음이나 나에게 강하게 다가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글로 정리를 한다. 그리고 마음에 새기고 기도를 한다. 또 본문이 이어지다 보면 그 문맥과 흐름 가운데서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글 정리 역시 굳이 정한 시간이나 조용한 공간일 필요는 없다. 집에서도 쓰고 출퇴근길 지하철에서도 쓰고, 학교 일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쓰기도 한다. 스마트폰의 편리함을 마음껏 활용한다.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고 글로 정리하고 나누는 시간이 너무 좋다. 그리고 이 일이야말로 내가 참 좋아하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비록 여러 여건상 이 일에 집중해서 시간을 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고, 또 말씀을 통해 내 마음껏 질문을 던지며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은혜를 누리며,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주변 사람들과 나눌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왕 시작한 이 일을 좀 더 지속하고 좀 더 깊어지길, 이 일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복 주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