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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사랑, 받은 만큼 흘려보내기(2017.08)

 

 

사랑, 받은 만큼

흘려보내기

 

 

김에스더

(남호초등학교)

 

 

 

인터뷰, 사진 김만호

 

 

 

에스더라는 이름처럼 50년 인생동안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선생님. 또한 받은 사랑만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많은 사역을 감당해온 선생님. 교사로, 교회 사모로, 세 아이의 엄마로, 두 개 지역모임의 간사로 섬기는 그를 통해 섬김의 모습을 배워봅니다.

 

 

영화를 보며 갖게 된 교사의 꿈

부모님께서 생후 한 달 된 저를 처음 교회에 데리고 가셨을 때, 갓난아이가 예배시간 내내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자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고 목사님께서 이름을 에스더라고 지어주셨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적 아버지는 피를 토하시며 계속 누워있어야 할 정도로 많이 아프셨는데, 이런 아버지의 병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았습니다. 어린 시절 이런 체험으로 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믿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자라던 저는 어느 해 추석, 사촌 언니 오빠들과 <엄마 없는 하늘아래>라는 영화를 보면서 거기에 등장하는 시골 여선생님을 보고 교사의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친구를 통해 기독이’(교사선교회)에 들어가다

저는 어려서부터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교회와 학교 일에 열심을 갖고 참여하였습니다. 많은 교회 일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저는 대학교(인천교대)에서는 기독인들이 참여하던 기독이’(교사선교회)라는 동아리 모임에는 근처도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같은 과 친구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름이 에스더이며 모태신앙이고, 교회에선 학생회 임원에, 여고에선 기독학생 회장이었으니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의 포스가 철철 넘치는 나에게 구원의 확신을 묻는 질문은 참 당돌한 질문인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이런 신앙의 본질적인 질문을 해주는 그 친구가 좋았고, 그 친구는 나의 평생에 가장 좋은 친구로 남게 되었습니다. 결국 나는 그 친구를 따라 기독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제자훈련을 받았고, 기도와 큐티 등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3학년 때부터 후배들을 양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게 되었고, 눈물이 없던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낯선 땅 미국에서의 광야 생활

1990, 경기도 이천 설성면 6학급의 작은 초등학교로 첫 발령이 났습니다. 이제 막 제자들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2년 가을, 켄터키 루이빌에 있는 신학교로 공부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자비 유학생의 아내였기에 아기를 돌보는 보모를 시작으로, 한인 유학생들의 머리를 깎는 미용사, 주재원 자녀의 과외선생 등으로 생활비를 벌며 살아야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광야의 생활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돌아보면 미국에서 아들 둘을 낳고 키우며 9년을 지내는 동안 주변 사람들을 통해 참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몇 번의 자연유산 뒤 미국에서 첫 아이를 임신하여 꼼짝 않고 누워만 있어야 했을 때 먹고 싶다는 요리를 가져다주시는 분들이 있었고, 많이 아팠던 둘째 아이를 위해 릴레이 금식기도를 해주셨던 전도사님과 목사님 가정, 입원해 있는 아기를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심방을 와주셨던 담임 목사님 부부 등 많은 분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덕분에 무사히 남편의 공부와 사역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돌아온 고국 강원도에서의 광야 생활

한국에 돌아온 20014, 이번에는 강릉시 옥계면에 있는 침례교회 담임목회자로 부임한 남편을 따라 강원도에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그해 겨울 임용고시를 다시 보게 되었고, 합격하여 정선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이제 그동안 받은 사랑을 베풀며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쉽지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했고 또 어느 정도의 훈련을 받았기에 어디서든 사역을 잘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3년이라는 기간 동안 강릉 옥계에서 정선까지 매일 왕복 4시간을 운전하여 출퇴근해야 했습니다. 출퇴근에 지친 나는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지적질만 하는 선생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점심시간에만 웃으시네요?”라는 3학년 우리 반 아이의 말을 듣고 참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발령 나면 학교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학교로 옮기니 이번에는 이해할 수 없는 교장선생님의 불의한 행동에 그분을 정죄하고 미워하느라 학교생활이 하루하루 괴로웠습니다. 학교가 편안하면 부흥되지 않는 교회가 문제이고, 이걸 피하면 저걸 만나고 이 사람도 맘에 안 들고 저 사람도 맘에 안 들고. 결국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이곳에 보내신 것은 손해 보는 거 아니세요?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을 데려다 놓으시지요?” 이렇게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10여 년의 세월은 제게 또 다른 광야의 시간이었습니다.

 

내 인생의 전환점

2012년 어느 날, 기도하면서 그동안 아이들을 많이 사랑하지 못했고 불평하면서 억지로 학교 일과 교회 일을 했던 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이런 나를 위로해주셨습니다. “괜찮다, 에스더야. 그동안 네가 수고 많았다. 나는 네가 그곳에 있는 것을 기뻐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주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께 너무 황송하고 감사해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하나님께 더 잘하고 싶어졌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에야 제가 좀 바뀐 것 같습니다. 혼자서 울컥울컥하며 감격할 때가 많아진 것입니다. 몇 명 안되는 주일학교 아이들을 위해 피아노 반주할 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피아노도 치고, 주일학교 아이들도 잘 가르치고, 밥도 척척 잘하니까 많은 사역자들이 점점 다 떠나가는 시골 이곳을 지키라고 나를 이곳에 보내셨구나.’ 나는 나의 지금 생활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학교에서의 내 모습도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가 이해되기 시작했고, 자기 감정조절이 안 되어 나에게 화를 내는 아이가 가여워 보였습니다. 어느 날 이런 나를 보고 동료교사 한 분이 내 표정이 너무 밝게 바뀌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난 그동안 내 표정이 항상 밝은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었나봅니다.

 

두 개의 교사모임과 학급제자양육

20131, 오랜만에 참석한 교사선교회 수련회에서 참석자 명단을 살펴보다가 문득 강원도에는 교사선교회 모임이 없는데, 혹시 강원도에 교사선교회 선생님들이 있으면 그 분들께 밥 한 번 사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밥 한 번 사려고 모인 그 모임이 지금의 강원도 교사선교회 모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모임을 섬기기 위해 매주 목요일 퇴근하면 밥을 했습니다. 제가 제일 자신 없어 하는 부분이 밥하는 것인데 이상하게 이 일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모임이 가능한 것은 저 혼자만의 생각과 노력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저와 가까운 곳에 발령받은 신규 선생님이 있어 가능했고, 삼척에서 한 시간 반 이상 차를 몰고 모임에 참석하는 선생님이 계셔서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모임에 몇 분의 선생님이 추가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임이 3년을 지나면서 선생님들이 원주와 고성으로 발령이 나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스스로 모임을 갖기 어려운 두 선생님이 원주에 발령이 났으니, 이 두 사람을 위해 제가 원주까지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왕복 4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이지만 남편이 동행해주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2016년부터 원주에서도 매달 한 번씩 교사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두 개의 교사모임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모임을 섬기면서 가장 감사한 일은 처음 양육했던 두 선생님이 작년에 부부가 되었고, 각각 형제팀과 자매팀을 양육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저는 지난 5월부터 학급제자들을 대상으로 디모데양육(제자양육)도 하게 되었습니다. 올해 오랜만에 고학년을 맡게 되면서 디모데양육에 대한 선한 부담이 생겼는데, 5명의 아이들이 참여하겠다고 자원하여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제자양육을 하면서 선생님과 조금 더 친해졌다고 오히려 더 말을 안 듣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을 어떻게 자라가게 하실지 기대하는 마음이 큽니다.

 

쉼센터를 소망하다

저는 몇 년 전부터 하나님의 심정의 관점으로 성경을 공부하게 되면서 하나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남편이 섬기고 있는 아름다운 옥계침례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소망입니다. 우리 교회에 개인이나 가족 단위 손님들이 찾아와 편히 쉬면서 교제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들이 와서 쉬면서 회복되고, 목사님 강의나 성경공부를 함께 하면서 충천할 수 있는 쉼센터가 세워지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강원지역에도 디모데 양육모임이 많아져서 우리 교회가 작은별잔치, 토요학교, 디모데캠프의 거점으로 사용되길 소망합니다. 저는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섬기는 사람이 되길 소망하고요. 지금까지도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시면서 나를 단련하시고 내 걸음을 신실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삶도 평안하게 인도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선생님이 가장 좋아한다는 이 찬양이 바로 선생님의 삶을 그대로 노래한 선생님의 주제곡 같습니다. 선생님의 아름다운 섬김이 천국에 해같이 빛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