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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물질에 빚진 자를 사랑에 빚진 자로(2017.09)

정병오 칼럼 

 

물질에 빚진 자를 사랑에 빚진 자로

 

 

 

고금리 이자 갚을 돈으로 원금까지

십여 년이 넘은 것 같다. 교회 내 한 가정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 가정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빚 가운데는 은행 대출 외에 카드 현금서비스 대출도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은행 대출은 이자가 낮아 그나마 괜찮았는데 카드빚은 이자가 높아 빚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늘어나는 빚을 막을 수가 없어 절망감에 눌려 있었다.

누군가가 카드빚을 은행 대출로 바꾸어 주기만 하면 카드 이자 내던 돈으로 갚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 가정이 누군가가 되어주자고 생각했다. 마침 목돈이 있어서 그 가정의 카드빚을 다 갚아주었다. 대신 그 금액에 해당되는 적금 통장을 내 이름으로 개설하고 그 가정에게 3년 동안 적금을 적립하게 했다. 그 가정은 카드 이자 갚던 돈으로 월 적립금을 착실히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카드빚 문제가 해결되자 은행빚도 갚기 위해 더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갔다.

결과적으로 우리 가정은 전혀 손해를 보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었고, 그 가정은 자존감의 손상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카드빚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 경험은 우리 가정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이후에도 빚으로 고민하는 가정을 비슷한 방법으로 도울 수 있었고 지금도 돕고 있다.

 

그 시절의 가난, 지금의 부채 사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일정하지 않은 아버지의 수입은 우리 가족이 생활하기에 늘 부족했다. 거기다가 4남매의 학교 수업료는 가계 경제에 큰 부담이었다. 자녀들의 교육비를 부담하기 위해 어머니는 늘 빚을 얻으러 다녀야 했다. 이자가 비싼 사채였지만,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제 때 돈을 갚는 신용을 가졌기에 필요할 때는 빚을 낼 수가 있었다. 덕분에 4남매는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지금의 나도 이렇게 있다.

시대가 흘렀고 한국 사회는 절대 빈곤에서 많이 벗어났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빚이 사회의 거대한 구조가 되어 개인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신용카드가 보편화되면서 정상적인 수입이 있는 개인이나 가정도 한 달치 돈을 미리 사용하고 월급을 받으면 카드빚으로 다 나가버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많은 청년이 대학에 진학하는 순간 학자금 빚을 지고 졸업 후에도 갚지 못해 허덕이고 있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주택을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집을 구입하거나, 전세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빚을 져야 하는 상황이다. 현대인에게 빚은 필수가 되어버렸다. 갚을 수 있는 신용의 범위 내에 있는 빚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용의 범위를 벗어나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을 경우 문제가 된다. 빚이 자신의 신용 범위를 벗어나는 순간은 자신도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돈 문제, 빚 문제는 영적인 문제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도들의 빚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침묵하고 무관심했다. 이해는 된다. 교인 간 다양한 형태의 금전 거래로 인해 교회를 떠나거나 분란을 일으킨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문제를 수없이 보고 자랐다. 교회가 빚을 지고 살 수밖에 없는 교인들의 현실을 무시하고 교인들 간에 금전 거래를 하지 말라는 비현실적인 지침만을 고수했기 때문에 문제가 음성화되어 확산된 것이다.

예수를 믿은 우리도 세상에서 산다. 육을 입고 살기 때문에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살 집이 있어야 하고 자식을 키워야 한다.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실직이나 질병, 자녀 교육, 파산 등의 문제가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온다. 당장 빚을 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최선을 다해 빚을 갚지만 파산의 상황에 몰리기도 한다. 많은 교인이 이러한 상황에 있는데 교회가 빚을 지고 사는 교인이 한 명도 없는 것처럼 어떤 개입도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무언가라도 이야기를 해야 하고 어떻게든 행동을 해야 한다.

 

구조의 변혁과 국가의 책임, 그 너머 빈자리는?

빚 문제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교회가 다 해결할 수는 없다. 국가가 일차적인 책임을 가지고 개입해야 한다. 복지를 더 확충해야 하고 빈곤층에 대한 공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개인의 한계를 넘어선 빚 문제에 대한 대책도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국가가 나서더라도 빈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국가가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만질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빚 문제는 한 사람의 자존심과 책임감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이웃과 사회가 감당해야 하는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교회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확장된 가족이다.

이 문제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우선 소비를 줄여서 빚을 지지 않는 것이 성경적임을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부득이하게 빚에 눌려 있는 사람은 교회 내에서부터 관심을 가지고 도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가 제시한 방법은 하나의 실천 사례이고, 교회 내에서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게 도움 받는 사람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자립심을 키워주며 도와주고 있는 사례가 있을 것이다. 좋은 사례들을 공유하고 원하는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실천하도록 격려하면 좋을 것이다.

 

그럼 나는? 우리 교회는?

이 문제에 개입을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교회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공동대표로 섬기고 있는 기윤실에서는 올해부터 가계 부채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전문가들을 모아 대안을 모색하고, 이를 실천한 교회들의 경험을 모아 몇 가지 모델을 개발하고 있다. 개별 교회의 규모나 상황에 맞는 다양한 실천 모델을 올해 하반기에 제시하려고 한다. 기윤실의 부채해방운동에 개인 차원, 교회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린다.

개인 차원에서도 주위를 돌아보길 권하고 싶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감당하기 힘든 빚으로 신음하는 이웃들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이자를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신상이나 직장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빚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위기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보일 것이다. 모든 사람을 다 감당할 수 없지만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작은 실천을 해보면 좋겠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스스로 벗어나기 힘든 사람들에게 내가 누군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 교회도 누군가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