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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홀로 오롯이 서고 함께 있을 때 더 빛나게 해 주시는 하나님(2017.11)

 

 

 

홀로 오롯이 서고

함께 있을 때 더 빛나게

해 주시는 하나님

 

어남예

(춘천계성학교)

 

 

 

인터뷰·사진 조창완

 

 

11, 인생의 첫 터닝 포인트!

초등학교 6학년까지 강원도 원주 변두리 시골에서 자랐어요. 양돈업과 밭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 1살 어린 여동생과 친구처럼 컸죠. 동네에 구멍가게, 놀이터 하나 없었지만 자연이 주는 넉넉함에 정서적으로 안정되게 자란 거 같아요. 그러다 유치원과 학교를 다니면서 제 인생의 첫 고민이 시작됩니다. 제 이름이 좀 특이하잖아요. 시골에서 조용히 자란 저는 이름 때문에 쉽게 주목받는 것이 굉장히 낯설었고, 장난삼아 놀리는 친구가 있으면 무척 괴로웠어요.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단체 벌을 받다 담임선생님께 들은 훈계가 제 인생의 첫 터닝 포인트가 되었어요. “키가 작은 사람이 있으니 큰 사람이 커 보이는 거고, 꼴찌가 있으니 1등도 있는 거다.” 이 말이 그때 엄청나게 다가왔어요. ‘,정말 그렇구나! 그러니까 난 이름이 이상한 게 아니고 좀 특이한 거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이름 때문에 일찍이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정체성의 개념을 어렴풋하게 알았다고 할까요? 그 후로 저는 성격이 조금씩 밝아지고 5학년 때 합창부 활동을 하면서 자신감도 많이 얻었어요. 저는 대학 면접에서 최근 10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말해 보시오.”라는 질문에 이 경험을 바로 대답합니다. 평소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때 떠올라서 약간 소름이 돋을 정도였어요.

 

선생님이 되면 어떨까?

어렸을 때부터 어린 아이가 좋았어요. 어머니께 동생 하나만 더 낳아 달란 말을 종종 한 거 같아요. 아쉬운 대로 1살 차이밖에 안 나는 동생이 소꿉놀이 할 때 늘 아기 역할을 해 줬죠. 꼼지락거리며 노는 게 좋더니 학교 가니까 미술시간이 제일 좋더라고요. 중학교에 가서는 질 좋은 재료로 수업을 하니 더 재미있었고, 미술선생님의 여유 있는 모습에 저도 미술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를 아예 산업디자인과로 갈까 고민했는데 부모님의 반대로 인문계로 갑니다. 사범대 미술교육과를 가고 싶어서 부모님께 미술학원을 보내달라고 했어요. 한 달은 보내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계속 다니겠다고 하니 아버지께서 그냥 공부하라며 반대하셨어요. 공부도 더 열심히 하겠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어요. 전 굉장히 실망하고 집에서는 입을 닫고 조용히 반항을 합니다. 그렇게 꿈도 없이 대학을 가야 하나 싶었는데 고2 여름인가? 학교 가는 길에 새로 생긴 문구사 안의 종이접기센터를 보게 되었어요. 거기서 토요일 오후 수강생을 받는다는 걸 알고 하고 싶어서 어머니께 말씀드렸어요. 미술을 못하게 된 걸 안타까워하시던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수강료 3만원을 주셨어요. 종이접기는 제게 다시 꿈을 꾸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죠.

어린 아이를 좋아하니 유아교육과 갈까?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친구가 인권영화제에 다녀왔다고 저한테도 가 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본 첫 영화가 척수장애인이 결혼하고 엄마가 되는 과정을 그린 거였는데 인상 깊었어요. 그 후로 계속 특수교육과 장애인에 대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동안 장애인을 본 적이 별로 없는데 특수교육과를 가도 될까 싶어 고3을 앞두고 장애인 시설로 봉사활동을 갔어요. 잠깐이었지만 장애를 가졌어도 제가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아이들로 보여서 특수교육과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모태신앙이지만 모태신앙 같지 않은 나

어머니는 중학교 때 오빠의 전도로 온 가족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대요. 아버지는 착하셨지만 고집이 세고, 술을 좋아하셨어요. 어머니께서 교회 가는 건 안 막으셨지만 저와 동생까지 데리고 가는 건 싫어하셨어요. 교회 때문에 아버지와 갈등을 겪으면서도 신앙생활을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저에게 안타까움을 주기도 했지만, 묵묵한 신앙인의 삶을 보고 자라게 했죠.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교회에 많이 다녔어요. 찬양 동아리, 아침기도모임, 활발한 학생회 활동까지 자발적으로 하는 모습이 문화충격 수준으로 다가왔어요.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가 어색한 제게 한 친구가 찬양집회에 초대하고, 자기가 보는 잡지책이라며 청소년용 큐티 책을 선물해 주었어요. 그렇게 말씀을 보게 된 저는 집을 떠나 대학에 가면 눈치 안 보고 교회를 다니겠다고 결심하죠. 저는 대학에 가서 하고 싶었던 전공 공부와 동아리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도 4년 내내 보람차게 잘 지낸 거 같아요. 제가 대학 오티에서 만난 선배를 통해 에바브라찬양단부터 만난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죠. 학교가 미션스쿨인가 싶을 정도로 동기, 선배, 교수님까지 믿음의 선배를 많이 만났어요. 그런데 손 올리며 찬양하고, 울며 기도하는 모습은 따라하지 못하겠더라고요. ‘하나님, 저는 아직 저렇게는 못하겠어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못 만났다는 게 이런 건가요? 언젠가는 만나겠죠? 저도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요.’라고 기도했던 게 생각나네요. 대학 4학년을 앞두고 학교 기독교 동아리 연합 수련회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저는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 아버지와 어색한 관계 때문에 어렵다는 걸 용기를 내 고백했어요. 그때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수련회가 끝나고 집에 왔을 때 완고했던 아버지께서 남예야, 아빠도 교회 같이 갈까?” 하시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안타깝게도 3개월 뒤 아버지는 지병으로 천국에 먼저 가셨지만 그 과정이 저희 가족을 진짜 믿음의 가정으로 서게 했죠.

 

양양에서 그 달콤 씁쓸했던 10

20053월 양양에 첫 발령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기독교사로 부르심에 대한 생각은 못했어요. 마침 그때 읽은 갈대상자에서 성경에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게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누가복음 14:13~14)하고 말씀하시니 특수교육은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 학문이고 장애 아동을 가르치다 보면 좌절할 때가 많을지라도, 이생과 내세에 약속이 있는 학문을 전공하고 있는 것입니다.”라는 부분이 임용 합격 직후라 그런지 마음에 남았어요.

첫 제자들은 초등학교 5학년 2, 3학년 1명 남자아이 셋이었어요. 첫 만남에서 5학년 아이가 선생님, 열심히 가르쳐 주세요. 저 작년 선생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한글을 뗐어요.” 하는데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동안 공부하며 만났던 아이들과 전혀 달랐으니까요. 셋 모두 장애 등록은 안 되었지만 특수교육이 필요한 아이들이었어요. 그 아이들과 있다 보니 장애 영역에 갇히지 않고 아이마다 개별화된 교육이 특수교육이란 걸 배웠습니다. 그런데 가끔 그게 아픔을 주기도 했어요. 3년차 때 남자아이 1명만 도움반에 있었어요. 그 해 통합 캠프에 참여하려는데 교장선생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는 학교에서 현장학습 같이 가는데 이런 걸 꼭! 따로 가야 하나? 어 선생이 멀쩡한 아이 장애인 만든다고 생각 안 해?” 하시는데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거 같았어요. 교장실을 나오자 눈물이 쏟아지는데 교실로 가지 않고, 교무실로 갔어요. 펑펑 울고 위로 받았죠. 작은 학교에서 특수학급 10년은 가끔 특수교사의 존재를 작게 만들기도 했지만 동료들과 가까워 숨통은 트였어요. 그리고 학교 밖에도 TCF와 교육연극모임으로 마음 나눌 선생님들이 있었어요. 정말 달콤 씁쓸한 나날이었습니다.

 

공동체와 기독특수교사로 산다는 것은

임용 전 신규교사 연수에서 받은 좋은교사를 통해 TCF를 찾아갔어요. PBS를 처음 해 봤는데 성경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생각했고 깊은 나눔도 좋았어요. 2007년에는 MK를 알고, R국 학습캠프도 갑니다. 캠프 시작 전 주일, 초대 받은 한 가정과 예배드리고 교제하는데 한국에서 주일마다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청년부까지 바쁘게 지냈던 모습만 떠올라 눈물 흘리며 다시 하나님을 만났어요. 그렇게 하나님과 공동체를 뜨겁게 경험한 후 TCF에 소속감도 더 생겼어요. 지역모임 대표도 하고, 한동안 끊겼던 R국 캠프를 2013년에 다시 가게 되지요. 캠프 끝나고 한 선교사님께서 우리 아이들이 선교지에 오니 특수교육이 필요한 아이들이 되더라고요.” 하시는데 ! 하나님 마음도 그러시죠? 제가 왜 또 이곳에 왔는지 알겠어요.’ 하며 뭉클했지요. 그런데 그 후 여러 관계의 어려움이 저를 한방에 지치게 만들더라고요. 게다가 2번이나 통과가 안 된 석사논문,30대 미혼의 고민, 집안 문제까지 겹쳐 다 놓고 싶었어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저를 버티게 해 줄 동역자들을 붙여 주셨어요. TCF를 그만하고 싶어 마지막 하소연이라도 하자며 찾아간 간사모임에서는 이미 그런 아픔을 겪으신 분들이 간사를 하고 계셨고, 양양에서 같이 TCF 하자고 다가오는 선생님들, 가까운 이웃사촌이라며 환대해 주시는 라브리 공동체까지 있어 2014년을 버티고, 2015년에 학습연구년을 안식년처럼 선물 받았어요. 그때 다들 부럽다, 축하한다.’ 하셨어요. TCF를 같이 한 선생님이 그래, 하나님께서 남예 샘을 위로해 주시네.” 하시는데 순간 울컥하며 양양에서의 10년이 영화처럼 스쳐지나갔어요.

지금은 양양을 떠나 춘천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있어요. 지역을 옮겼어도 신규도 아니고 그동안 하던 것처럼 하면 되겠지 했는데 초반에 엄청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학부모님께 당신을 특수교사로 믿고 우리 아이 맡길 수 없다!”라는 말까지 들었어요. 상황이 최악일 때 교회도 안 다니시는 옆 반 선생님이 나도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자기는 그래도 교회 다니니까 기도해 봐.” 하셨어요. 그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오다 들리는 찬양 소리에 작은 교회로 들어갔어요. 고개 숙이고 울다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한다는 찬양이 저를 붙잡았고 그때부터 하나님께 원망하던 기도가 모든 일의 주관자이심을 믿고 따르겠다는 기도로 바뀌었어요. 그리고 가족에게도 말 못할 어려움을 공동체 선생님들과 나누며 힘을 얻었지요. 돌이켜 보면 학부모님의 모진 말이 저를 향하긴 했지만 장애 아이를 둔 부모의 고통스런 외침이었다 생각해요. 그래도 왜 내가 그런 일을 겪었을까? 생각하곤 했는데 지난 여름 수련회 말씀 중 요한복음 5장 베데스다 연못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왔어요. 한쪽은 명절이 되어 사람들이 모이는데 장애인들은 잔치보다 기적을 바라며 연못에 있잖아요. 그게 너무 아프게 느껴졌어요. 말씀을 보다 이렇게 아파서 울어본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말이죠. 이제야 저도 고통에 대한 질문이 생긴 거 같아요. TCF 특수교사모임도 그런 의미에서 더 다가옵니다. 더 많은 기독교사와 나누기 위해 2017 기독특수교사축제도 합니다. 앞으로의 꿈은 하나님 나라를 공동체와 함께 하며 제 위치에서 정직한 태도로 사는 것과 마음 잘 맞는 배우자를 만나 꽃길만 걷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