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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501주년을 기다리며(2017.12)

정병오 칼럼

 

501주년을 기다리며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10년 전, 2007년의 일이다. 1907년에 있었던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교회는 그때의 부흥을 다시 재현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각종 학술 대회를 준비하고 엄청난 예산을 쏟아 대규모 집회를 했지만 100년 전의 부흥은 재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 교회의 수적인 감소와 영적·윤리적인 영향력의 축소 현상이 가속화될 뿐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었다고 해서 그와 유사한 사건이 지금 재현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더군다나 기독교는 직선적 역사관을 믿기에 어떤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인간이 만든 십진법의 주기에 따라 하나님이 비슷한 일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중을 동원하고 종교적 열심을 쏟는 것은 믿음도 헌신도 아니다.

물론 역사적 종교인 기독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끊임없이 기념한다. 구약 성도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해 안식일을 지켰고, 출애굽을 기념해 유월절을 지켰다. 신약에 와서도 주님의 부활을 기념해 주일을 지키고, 주의 죽으심을 기념해 성찬을 행한다. 그러므로 평양 대부흥 100주년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 가운데 당신의 백성들과 교회를 통해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다양하게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때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고 그 가운데 교훈을 얻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본래의 취지에 충실하게 해야 한다. 의미를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다른 목적을 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조용한, 너무도 조용한 종교개혁 500주년

2017년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루터가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여 이후 교황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새로운 교회를 형성하는 불씨를 지핀 지 50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해였다. 개신교로서는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중요한 의미에 비춰 볼 때 한국 교회 내에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은 과도하리만큼 조용하게 지나갔다. 20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과도하게 치른 후유증 때문인지 아니면 현재 한국 교회의 상황이 종교개혁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반성 때문인지 아니면 종교개혁 자체에 대한 무관심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물론 전혀 없지는 않았다. 각 교단별로 종교개혁 관련 학술 대회가 있었고, 관련 연구 출판도 제법 있었다. 한국 개신교의 시작이 19세기 말 미국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종교개혁 본류의 정신과 전통에 무관심한 경향이 있었는데, 종교개혁 관련 학술 대회나 출판이 이런 부분을 보완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교회개혁의 흐름도 없어

아쉬운 것은 2017년 한 해 수많은 종교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종교개혁의 정신에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그에 맞게 교회를 개혁하려는 뚜렷한 흐름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의 정신에 비추어 현재 한국 교회의 문제점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연구나 토론회 등은 많이 있었다. 그리고 일부 교회나 기관에서 몇 가지 문제를 실제로 개혁해 간 사례 역시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미 있는 개혁의 흐름을 만들어 가지는 못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500년 전 종교개혁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교회개혁의 흐름을 만들어 가려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영적인 준비가 있어야 하고 작은 개혁의 실천이 누적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현실은 수적으로는 물론이고 영적인 영향력 면에서도 쇠퇴의 흐름을 타고 있다. 그 동안 대형 교회는 물론이고 중소 교회에 이르기까지 자립이 가능한 교회 가운데 상당히 많은 교회가 담임목사직 세습을 해 온 데다가 올해는 한 대형 교회가 교단의 세습금지법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놓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세습을 강행하고 있어 한국 교회의 영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다.

 

교회를 넘어 세상의 변혁으로 나아가야

또 하나의 아쉬움은 종교개혁 500주년 관련 많은 연구와 논의가 좁은 의미의 종교(교회)’개혁에 국한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개혁이 종교개혁의 핵심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종교개혁 당시 유럽 사회는 종교가 중심이 되어 사회의 모든 다른 영역이 통합된 사회였고, 당연히 종교개혁은 교회뿐 아니라 사회의 전 영역을 개혁한 범사회적이고 총체적인 개혁이었다.

그런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나눈 수많은 논의 가운데서 종교개혁이 사회의 각 영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의가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종교개혁이 사회 각 영역에 미친 영향과 원리의 빛에 한국 사회의 현실을 비추고 한국 사회 각 영역이 개혁되어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종교개혁 500주년 관련 논의가 신학자나 목회자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평신도에 의한 논의가 거의 없었던 사실과 연결된다. 이는 한편으로는 만인제사장설에 기반을 둔 교회가 평신도를 복음의 원리로 세상을 변혁하는 사람으로 키워내지 않고 목회자의 보조원으로 키워낸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영역을 복음의 원리로 바꾸어 내기 위해 몸부림을 쳐 온 평신도 지도자와 평신도 운동의 기반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종교개혁 500주년, 그 이후의 과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일은 500주년이라는 단회적인 행사로 끝날 것이 아니라 501주년, 502주년으로 계속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종교개혁 500주년에 미진했던 것을 501주년, 502주년으로 가면서 조금씩 보완하고 축적해 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501주년, 502주년에 종교개혁의 정신을 보다 의미 있게 살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우선 종교개혁을 이야기할 때 중세 가톨릭에 비판의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현재 한국 교회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종교개혁에 대한 첫 출발로서 역사적 중세 가톨릭의 타락 실태와 이에 맞선 종교개혁자들의 개혁 노력과 성과를 말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지금 한국 교회가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했는지 진지하게 반성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고치고 바꾸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고 하나씩 고쳐 나가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성역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을 상대화하며 고쳐 나가는 노력이 쌓여 가야 한다.

다음으로 종교개혁이 교회를 넘어 사회 각 영역에 어떠한 빛을 비추었는지 깊이 연구하고 이를 교인에게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교인이 종교개혁의 정신과 원리를 교회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삶의 영역 가운데 비춰 보고 개혁해 가도록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평신도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자신이 속한 가정과 직장, 그리고 공공의 영역에서 어떻게 실천해 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같은 고민을 하는 기독인과 연대해 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개혁은 삶의 전 영역에서 실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