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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벌새 교사의 삶(2018.01)

 

 

 

 

벌새[각주:1] 교사의 삶

 

 

 

 

김민자(화순만연초등학교)

 

 

 

인터뷰·사진 조창완

 

 

목포의 눈물

저는 목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정월 보름에 음식 장만을 마친 후 만삭의 몸으로 아버지와 화투를 치다가 진통이 와서 두 시간 만에 저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의 생월생시는 화투시라고 웃으며 소개하곤 해요. 이런 훈훈한 탄생 스토리가 있는 화목한 가정이었지만 아버지는 제가 두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여객선 갑판장 일을 하셨는데 높은 파도에 휩쓸려 배가 좌초되어 변을 당하셨지요. 여섯 살 오빠와 두 살배기 저, 뱃속의 남동생을 두고 그렇게 허망하게 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정신적 충격으로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셔서 늘 병원에 입원하거나 누워 계셨습니다. 당시 어머니 나이가 서른으로 젊으셨기에 주변에선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개가하라고 하였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며 버티셨고 한복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가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너무 가여워서 한번도 말썽 부리지 않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 자란 거 같습니다.

 

믿음의 가정 안에서

어머니가 남편 잃은 슬픔 속에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때 길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은사님을 만나셨습니다. 그분은 교사를 그만두고 목사가 되셨는데 어머니에게 교회에 나올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그 길로 교회에 나가신 어머니는 지금까지 50년 동안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고 나가십니다. 이후 우리 삼 남매는 어머니의 돈독한 신앙의 가르침으로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고 예배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의 모든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였습니다. 그렇게 기독교는 우리 가정의 생활 양식과 문화가 되었고 그래서인지 오빠는 목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저는 중고등학교에 올라갈 때 기독교 학교에 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기도한 대로 목포의 기독교 학교인 정명여중고를 다니면서 신앙의 기초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채플과 성경과목은 학교가 교회처럼 느껴지게 하는 신선한 충격이자 기쁨이었고 종교부장과 합창단 활동 등 적극적으로 학생 생활을 하였습니다. 교회에서도 학생회 활동을하면서 여름 수련회와 겨울 문학의 밤 등을 열성적으로 준비하며 교회와 학교에서 신앙 공동체와 어울리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 땅의 어린이를 예수님께로

교사가 되어 월급을 받았지만 가정을 일으키기엔 턱없이 부족하였고 어머니는 여전히 한복 바느질을 해야만 했습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돈을 벌어도 남들처럼 써 보지 못하는 상황이 삶에 대한 불만으로 나와 교회를 멀리하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을 하게 됩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을 췄어요. 그런데 눈이 빨갛고 흐느적거리는 검은 좀비 같은 형체가 다가와 손을 잡아서 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클럽을 뛰쳐 나왔습니다. 캐럴이 울려 퍼지는 추운 거리를 뛰는 듯이 걷는데 주님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이후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나는 무엇에 내 삶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때 교회 집사님의 권유로 어린이전도협회의 교사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전도하는 방법을 배우고 직접 거리에 나가 아이들을 모아 설교 실습까지 해야 하는 세미나였습니다. 저는 로마서 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말씀을 준비하여 광주공원에서 아이들을 모아 놓고 설교 실습을 하였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 내가 죄인이었을 그때에도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이 마음 깊이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감정이 격해져 설교 실습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보고 있던 같은 조원들도 울고 아이들도 영문도 모르고 같이 울었습니다. 그날 저는 제 인생 가운데 늘 함께하셨던 주님을 실체로 만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세미나 마지막 날 이 땅의 어린이를 예수님께로라고 구호를 외치는데 찰칵하고 강대상 앞에 환상이 보였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양복 입은 손을 쓱 내미는데 그 손에는 전도지 같은 종이가 들려 있었고 저를 초대하듯 내미는 환상이었습니다. 나중에 어린이전도협회 자료를 구입하러 갔는데 제가 본 환상이 책의 표지 사진으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린이 구원 사역으로 저를 부르신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제 이름 아시죠?

서른여덟의 늦은 나이에 결혼하게 되었어요. 남편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는데 저를 따라 교회에 다녔고 세례도 받았습니다.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아이가 어려서부터 뭔가 다르다 싶어 병원에 갔는데 심한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땐 하늘이 노래지고 천 길 벼랑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닥치는 대로 의학 공부를 하고 좋다는 병원은 다 다니고 좋은 약은 다 구해서 먹였습니다. 정말 전국을 돌아다닌 거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병세는 더욱 심해졌죠. 퇴근길에 차를 길에다 세우고 한없이 울면서 하늘을 쳐다 봤던 그 시간들.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절망감으로 제 삶은 지옥을 넘나들었습니다. 집에 오면 딸의 얼굴부터 살피는 친정엄마 앞에서 목 놓아 울 수도 없고, 이제 갓 믿음을 갖던 신랑은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며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학생이 장난으로 저를 학교폭력교사로 신고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습니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자존심과 억울함에 살아 계신 하나님은 왜 다른 사람의 하나님은 되고 나의 하나님은 되지 않느냐며 소리쳤습니다. 제가 그렇게 사모하고 정성을 다해 섬겼던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고, 혹시 제 이름하고 얼굴하고 헷갈리신 거 아니냐고 묻곤 했어요. 전 어린이 구원 사역을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이 제게 이럴 순 없다고 억울해했습니다. 그때는 혼돈, 깊은 골짜기, 광야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 제가 속한 선한교육에서 제자 훈련반을 모집했습니다. 내키진 않았지만 강보형 목사님의 설득으로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제자 훈련을 받으면서 절망의 한가운데를 지날 때 내 삶의 항해에 끝이 되시는 주님을 통곡하며 만나게 되었습니다. “딸아, 너는 너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내가 있을 자리가 없구나.”라는 주님의 음성에 남들 보기에 반듯하게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는 맘몬 숭배의 신앙이 깨졌습니다. 3년의 제자 훈련 과정 중 남편도 목사님과 상담하면서 새롭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어 영적 가장이 되었고 가정의 질서가 세워지면서 지금은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회복적 생활교육을 통해 회복되다

2012 기독교사대회 때 처음 회복적 생활교육을 접하게 되었는데 교직관의 근간을 다시 정립하는 계기가 될 정도로 감동적이었습니다. 2013년 학습연구년을 하면서 회복적 생활교육 1년 과정을 배우게 되었는데 주님이 주시는 통찰과 은혜가 너무도 컸습니다. 광주에서 대전까지 운전하는 차 안은 하나님과의 회복의 장소였고 부흥회 장소였습니다. 지난 고통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 던졌던 끝없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은혜를 직접 교실 가운데 적용해 보고 이를 널리 공유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2014년 학교로 돌아왔는데 학폭위를 일곱 번 열어 아무도 맡지 않으려 하는 5학년과 가장 난폭한 안○○ 학생을 맡게 되었습니다. 배운 대로 차근차근 회복적 생활교육을 학급에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급 약속 정하기, 내 마음을 너에게 전하는 방법 알기, 상대를 평가·판단·비난하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법, 나하고 코드가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어떻게 평화롭게 지내는가 실천하기 등. 아이들은 우리가 특별하다는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서로를 존재로 보는 법에 물들어 갔습니다. 회복적 생활교육을 교육 현장에 적용하면서 아이들은 꽃봉오리처럼 변화되었고 저도 학급 경영이 신나고 재미있었습니다. 수업을 할 때면 하나님이 교실 안에 들어와 계신 것 마냥 평안하고 기쁨이 넘쳐서 저도 모르게 찬양이 흘러나왔고 아이들은 물론이고 학부모님들도 열렬히 호응해 줘서 우리 학급은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선생님들도 우리 반의 변화에 놀라워했고 특히, ○○의 눈빛이 선한 눈빛으로 바뀌었다며 칭찬과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2016년 전국 최초로 회복적 생활교육 연구학교로 지정이 되었는데 1년간 학폭이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늘 학폭으로 시끄러운 학교였는데 말이죠.

이 경험을 보다 많은 선생님과 나누고 싶어 광주 회복적 생활교육 연구회를 결성하였고 1년 과정을 두 차례 실시하며 광주, 전남 지역에 회복적 생활교육을 널리 알리고 있어요. 선생님들의 반응도 너무 뜨겁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저는 원래 굉장히 계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관리자가 되기 위해 결혼 전에 도서벽지 근무를 제외하고 점수를 다 채웠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아들의 건강으로 인해 도서벽지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승진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되돌아보면 하나님은 저의 이런 마음을 원하지 않으셨던 거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계획 안에 제가 있기를 원하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나니 36년간 교실 속에서 아이들과 지낸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지 모릅니다. 2015년부터 수석교사로 활동하면서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어 써야 할 정도로 바쁘지만 전남과 광주 지역의 선생님들을 만나 좋은교사에서 배운 회복적 생활교육과 수업코칭을 나누는 일이 너무 귀해 제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있습니다. 정년이 몇 년 안 남았는데 정년 후에도 계속해서 선생님들을 섬기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을 찾으시는데 저는 회복적 생활교육의 샬롬과 평화의 메시지가 지금 이 시대의 메시지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를 학교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저와 함께하는 사람들과 실천하며 사는 것이 지금 저의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1. 벌새는 회복적 생활교육의 상징으로 숲에 불이 났을 때 입으로 물을 떠 나르는 작은 벌새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하자는 의미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