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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오 칼럼

평신도의 영광과 사명(2018.9)

정병오 칼럼

평신도의 영광과 사명

 

평신도가 아닌 세상 사역자

평신도, 복음, 개혁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10기독법률가대회주제토론 패널 중의 한 명으로 초대를 받아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분에 평신도로 살아온 지난 삶을 돌아보고 정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했던 고민들을 나누고자 한다.

사실,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은 중세적인 개념이고, 종교개혁으로 인해 이미 극복된 개념이다. 굳이 나누자면 교회 사역자세상 사역자로 나누는 것이 더 정확한 개념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들을 역할의 구분 차원을 넘어 종교적으로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여기기도 하고, 성도들 가운데도 그렇게 인식하는 경우도 많이 남아 있다. 반대로 일반 성도들은 이러한 목회자-평신도의 잘못된 이원론 구도에 기대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게으름과 무책임을 합리화하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한국교회가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목회자와 평신도의 잘못된 구분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고 바로잡아 가기 위한 논쟁적 개념으로 평신도에 대한 논의는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평신도도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

목회자는 자신의 목회자로의 부름만 고민하면 된다. 하지만 평신도는 자신이 왜 목회자로 부름을 받지 않았는지를 고민하면서, 동시에 평신도로서 어떤 영역에 부름을 받았는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특히 종교적 열심히 과다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사람을 돌보는 일을 즐겨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나 같은 경우 어릴 때부터 신학을 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는 전공 공부보다는 학생 선교단체 리더로서의 활동에 더 전념하다 보니 외부 사람들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목회자로서의 부르심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군 생활을 하면서 군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다. 사단 신병훈련을 마치고 사단 군종실에서 나를 군종병으로 불렀고, 연대 배치를 받은 후에는 연대 군종실에서 또 한 번 나를 군종병으로 불렀다. 그때 나는 내가 만약 군종병으로 부름을 받아 군종의 일을 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나를 목회자로 부르는 것의 중요한 사인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번 다 막판에 좌절되었다. 연대에서 나를 다른 보직으로 더 강하게 찍어서 불렀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목회의 영역이 아닌 세상의 직장으로 나를 부른다고 확신을 하고 목회의 부르심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 물론 교직에 나온 이후에도 가끔 지금이라도 목회자가 되면 어떠하겠냐는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이런 제안은 현재 하고 있는 교직과 기독교사운동으로서의 부르심을 계속해야 한다는 부르심보다 크지는 않았다.

 

직장(세상)에서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평신도의 삶은 보통 가정, 직장, 교회, 사회로 펼쳐진다. 이 가운데 가정, 교회, 사회는 목회자나 평신도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영역이다. 물론 이 가운데 교회는 목회자와 평신도의 공통의 영역이긴 하지만 접근 방식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보통의 경우 목회자는 교회를 목회의 대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많고, 평신도는 영적 소비자의 자세를 견지하거나 혹은 목회자 의존적인 자세를 견지하기 쉽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을 이루고, 이렇게 한 몸 안에서 각 지체로 장성해 가는 과정과 결과를 통해 세상의 빛의 역할을 하는 교회로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부분은 목회자든 평신도든 자신의 약점과 현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 부르심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직장으로의 부르심은 목회자와 평신도가 확연히 갈리는 부분이다. 직장으로의 부르심의 가장 큰 특징은 그 하는 일이 직접적인 종교 행위와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며, 기쁨과 평화 가운데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그 사랑의 통치 사역에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미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자신에게 맡겨진 일 자체가 주는 것이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든, 혹은 사회구조적인 모순으로 인한 것이든 그 일과 관련해 주어지는 크고 작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분이 주시는 힘과 도우심을 경험해 가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이 과정을 제대로 붙들고 씨름하다 보면 하나님이 교회 안에 갇힌 분이 아니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깊게 알아 가게 된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셔서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하시는 경험은 종교적인 차원의 영적 경험보다 훨씬 짜릿할 때가 많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우연이지만, 실제 그 모든 일을 놓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하나님이 개입하는 것을 경험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통치요, 다스림인 것이다. 이러한 직장과 세상에서 내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목회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평신도의 특권이요,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평신도의 영적 생활

평신도는 자신의 힘과 시간을 종교적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에 많이 쏟는다. 세상의 일(비종교적인 일)을 영적(종교적인) 원리와 에너지로 감당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종교적인 일에 몰입하고 거기서 얻는 기쁨과 힘을 얻는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목회자는 이 일을 직업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영적(종교적)인 일을 세상적(비종교적)인 방법으로 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평신도는 종교적(영적)인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지만 그것을 기쁨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특권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세상(직장)이라는 장이 있기 때문에 그의 영적 몰입의 시간이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일 수 있다. 그는 세상(직장)에서 부대끼고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가지고 영적인 몰입의 시간에 씨름을 할 수 있고, 이 영적 몰입의 시간을 통해 얻은 통찰과 영적 에너지를 가지고 세상(직장)에 적용하기 때문에 훨씬 실제적인 영적 생활을 누릴 수 있다.

물론 이는 평신도가 제한된 시간이지만 종교적(영적) 몰입의 시간을 확보하겠다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각자가 처한 직업의 여건이나 가정에서 자녀의 나이에 따른 생애 주기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쪼개어 정기적으로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적용하기를 힘써야 한다. 긴 시간은 아니더라도 정기적인 기도 시간은 물론이고, 구체적인 삶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 묻고, 간구하고, 묵상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해서 목회자의 설교나 교회의 훈련과는 별도로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근력을 키워 가야 한다.

 

새로운 평신도 사역, 기독전문인 단체의 책임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평신도를 키우는 데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관심을 가진 경우도 평신도의 직장(세상)에서의 부르심과 그에 합당한 삶이 아니라 교회에서 목사님을 보좌하여 교회 봉사에 충성하는 사람으로 키우는 데 초점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목회자들이 은근히 평신도에 비해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목회자들이 평신도의 삶의 본질과 그 작동 원리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지난 20~30년 동안 꾸준히 성장해 온 기독전문인 단체들의 책임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목회자들과 목회자 중심의 교회의 눈치를 보는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고, 목회자나 목회자 중심의 교회가 도무지 할 수 없는 교회의 본질 중 한 부분을 감당해 주어야 하고, 평신도의 정체성 회복과 온전한 자기 역할 수행을 위한 훈련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