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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수업 만들기

기독 교사와 수업 이야기 #1

양영기의 교실 묵상 14

기독 교사와 수업 이야기 #1

 

 

 

 

90년대 단상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90년대 초반에는 보고서를 일일이 손으로 써서 제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90년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한글 프로그램으로 작성해 프린터로 인쇄하여 제출하는 것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이때도 나는 손으로 정성껏 작성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다가 손으로 쓴 이십여 장이나 되는 보고서에 ‘워드로 써서 제출할 것’이라고 빨간 펜으로 써진 첨삭을 본 이후로 손으로 쓴 글씨에서 아우라(aura)를 찾던 고집도 꺾였다.

통신 환경도 지금과 많이 달랐다. 대학생이라면 대부분 ‘삐삐’가 있었다. 발신자 번호만 표시되니 누군지 알 수도 없어 전화를 직접 걸어 ‘015***로 삐삐 치신 분’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서 교내의 공중전화는 늘 줄 서 있는 사람으로 만원을 이뤘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공중전화의 부흥기였다. 고시 공부한다고 도서관에 처박혀 있던 탓도 있지만 그런 모습에 왠지 거부감이 느껴져 전화를 받을 수는 없고 걸 수만 있었던 ‘씨티폰’의 유행이 짧게 끝날 무렵 삐삐를 소지하게 되었다. 삐삐로 상대방의 연락처를 받고 씨티폰으로 전화를 걸던 모습은 한때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씨티폰의 종말을 가져온 것이 PCS폰이다. 바야흐로 발신과 수신이 동시에 가능한 휴대 전화가 등장한 것이다. PCS가 보편화됐을 때도 내 주머니에는 ‘삐삐’가 있었다. 그리고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2000년이 왔다. 주변에서는 연락이 안 돼 불편하다며 볼멘소리로 핸드폰 구매를 권했지만 익숙한 삐삐를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선배 중에 아직도 삐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며 한참을 웃었다는 후배가 있었다. 그 후배가 지금의 내 아내다. 똑똑한(smart) 폰이 등장하면서 내가 사용하는 016 2G폰은 어리석은(stupid) 폰이 되었다. 새것보다는 헌것, 미래보다는 과거,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에 집착하는 성격은 내 학급 운영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헌 학년, 새 학년

매달 20일 경이면 《좋은교사》 편집장으로부터 메일이 한 통 온다. 늦지 않고 원고를 보내 달라는 내용과 소소한 일상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 가지 내용이 더 있었다. 신규 교사나 새 학년을 맞는 교사들에게 적절한 내용의 글을 보내 달라는 의견이었다. 두 낱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신규’와 ‘새’가 그것이다. 반사적으로 ‘헌 교사’, ‘헌 학년’이 머릿속에서 빙 맴돈다. 내 구형 핸드폰처럼 2011년, 교실, 우리 반 아이들 그리고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한 내 마음들이 일순간 헌것이 되는 것 같았다. 이사할 집을 아직 못 구했는데 전세 만기가 다가오는 것처럼 초조하다. 새로운 것보다 지나가는 것에 집착하는 성격이 또 나온다.

다들 새 학년의 기대와 준비로 이 방학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 올해 맡은 우리 반 아이들에게 아직 가르치지 못한 것이, 가르쳐야 할 것이 너무 많은데. 마음이 영 편하지 않다. 겨울 방학을 앞두고 D-며칠을 세면서 조바심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 년간 그려 온 그림이 완성돼 가는데 ‘혹시나 그림을 완성하지 못할까’, ‘실수를 해서 망쳐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고민이 더욱 나를 애타게 했다. ‘하나님, 우리 반 아이들의 마음을 열어 주세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세요.’ 기도에 옹색한 내게도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허락되었다.

학교에서 주어지는 교육 과정이라는 재료로 나만의 복음의 큰 틀을 다시 짠다. 일 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 아이들을 만나는 첫 대면의 순간부터 천 조각의 퍼즐을 그들의 마음 판에 하나씩 맞춰 갔다. 기대와 긴장으로 처음 만나는 첫 시간, 함께 울고 웃으며 보내는 시간, 부족하지만 힘을 다해 가르친 수업들, 한 차시에 한 조각씩, 소중하지 않거나 불필요한 조각은 없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마지막 천 번째 조각을 판에 끼워 넣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다. 일 년 동안 하나씩 하나씩 밝혀 왔던 천 개의 등불이 예수님을 향해 밝게 빛나는 것이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을 때는 알지 못했던 그 의미들, 사랑, 용서, 영원, 예수님의 거친 손, 옷자락, 먼지 묻은 신발, 그 모든 것들이 예수님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지난 일 년을 뒷걸음질 쳐 올려다보면 커다란 그림 안에 우리의 죄를 대신하신 예수님께서 내 앞에 서 계신 것을 보게 된다. 비록 나의 부족함으로 많은 빈틈이 얼기설기 보이지만 소중하고 아름다운 또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 그 그림은 복음의 그림이다. 마음의 캔버스에 새겨지는 생명의 그림이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2,3)

 

연말, 여유 있게 영화도 틀어 주고 운동장에 나가 맘껏 뛰놀게 하지도 못했다. 아이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 대신 교과 담임 선생님들의 수업 진도를 확인하며 ‘진도 마치셨으면 제가 수업할 게요’라고 말하고 한 시간이라도 더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신 언덕을 향해 마지막 힘을 다해 뛰어올라간다. 마지막 시간, 복음을 전하고 일 년 동안 달려온 숨찬 여정이 그렇게 끝났다. 말똥말똥, 알아들었는지, 깨달았는지, 느꼈는지 알 수 없다. ‘주님! 제가 지금 전한 복음이 아이들의 마음에 들어가 피가 되고 살이 돼서 그들 자신이 되게 해 주세요. 그들의 삶이 되고 생명이 되게 해 주세요. 복음의 작은 씨앗을 심었으니 주님 지켜 주세요.’ 입으로는 복음을 전하며 마음으로는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 복음보다는 방학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더 큰 감격을 하는 아이들이 인사를 마치고 삼삼오오 교실을 빠져나간다. 종이 울리자 다 풀지 못한 시험지를 내려다보며 펜을 놓는 심정으로 방학식을 맞았다.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실에는 그 아이들만큼의 부피로 투명한 공기가 교실을 채운다.

다른 선생님들은 이 방학이 새 학년, 새 학생들을 준비하는 시간일지 모르지만 아쉬움과 부족함으로 가득한 나의 지난 1년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여전히 새 학년을 준비할 수가 없고 이 방학 헌 학년이 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또 한 번의 기회를 위해. 솔직하고 용기 있는 ‘리콜’을 해 보고 싶다.

 

교육과 교사의 삶

교사와 학생의 모든 상호 작용은 교육 행위다. 따라서 수업 시간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 점심시간, 등하교 시간도 교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교육의 영역이다. 오히려 수업 시간 못지않게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시간이다. 학생의 삶의 전 영역이 교육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 수업과 같은 통제된 상황에서의 학생들의 행위가 아니라 통제가 사라진 상황에서의 그들의 의지와 선택에 초점을 둔다. 아무리 급해도 빨간불일 때는 건너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학생이 아니라 아무리 급해도 빨간불일 때는 건너지 않는 학생을 길러 내야 한다. 따라서 학생의 삶은 실습의 현장이 된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과 같은 수업 이외의 시간에 학생들의 활동을 유심히 지켜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실에서 멀어질수록 그들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나(교사)의 가르침(삶) 때문에 학생들의 삶과 인생이 달라지길 소망한다. 예수님의 삶이 제자들의 삶과 인생을 바꿔 놓은 것처럼.

다음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교사의 통제가 약해질수록 학생의 자율성의 정도도 증가한다. 또한 학생의 참 모습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교육의 대상이 학생의 총체적인 삶이라면 교사는 수업 시간에 일어나는 일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 점심시간, 학원, 가정 등에서 학생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욕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면 그 배움은 교실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학생이 생활하는 모든 공간에서도 유효해야 한다. 즉, 학생이 살아 있는 한 교사의 가르침은 시공간을 초월해 유효해야 한다. 따라서 참된 배움은 교사의 마음이 학생의 마음이 돼 학생의 가슴속에서 늘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화다.

 

학생들의 삶이 교육의 대상이라면 교사가 가르친다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것 자체다. 교사가 살아온 삶이 교육 과정이 되는 것이다. 동일한 삶을 살며 동일한 것을 깨닫고 느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교사) 그 자체로 차별화된 존재다. 물론 그 차별화된 존재가 학생들에게 매력적인 존재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교과는 체계화되고 추상화된 교사의 삶이다. 교실은 교사의 개별적이고 사적인 삶을 전하는 공식적인 자리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아무것이나 마음대로 가르쳐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1을 2라고 가르쳐서는 안 되며, 거짓을 진실이라고 가르쳐서도 안 된다. 교과를 가르친다는 것은 추상화 과정에서 복잡하게 얽힌 교과를 풀어내는 일이며, 그것은 교과에 담겨 있는 삶을 드러내는 일이다. 수학과 같이 고도로 추상화된 교과에서부터 사회와 도덕처럼 인간의 삶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교과도 결국은 교사의 삶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각 교과는 총체로서의 삶의 한 모습이다. 고대로 갈수록 수학이 철학과 종교 그리고 삶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던 사실은 이를 잘 보여 준다. 황금비나 완전수 등이 그들의 실질적인 삶의 기준이 되었던 것처럼.

한편, 수업은 교과를 통해 교사의 삶을 체험하는 과정이다. 그 삶이 가치 있다고 생각된다면 학생은 교사가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또한 그 과정은 학생에게 있어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묻는 자기반성의 과정이기도 하다. 수업은 교과를 매개로 교사와 학생이 만나는 것이다. 교과는 그 ‘만남의 의미’를 체계적이고 정돈된 형태로 제시한다. 교사는 의식적으로 교과 교육을 통해 학생들과 또 그들의 삶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긴장감을 놓친다면 교과 공부는 시험 점수를 위한 희생양이 될 것이다. 이 만남이 드러나지 않는 수업은 교과가 죽은 형태로 제시되는 것이다. 교사에 대한 존경, 권위, 신뢰의 상실이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