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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산책

열정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2


한병선의 아름다운 유산 11

열정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2

 

   

한국에 가면 죽을 거예요

우리는 마리엘라 탈마지 프로보스트 할머니를 통해 그녀의 아버지 되시는 광주 지역 초창기 선교사 탈마지 선교사님과 그분의 사역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탈마지 선교사는 처음 광주에 도착하고 나서 담양에 집을 장만하고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 탈마지 선교사님은 대학에서 공대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지원하셨고 그녀의 어머니 역시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인텔리셨다. 그런 두 분이 한국을 선택해서 선교사로 떠날 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녀의 외할머니였다. 남편이 죽고 오로지 외동딸 하나만 있어 그녀를 기르면서 일평생을 사셨는데 딸이 한국의 선교사로 간다고 하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같이 따라 한국에 입국하였다고 한다. 몸이 약했던 외할머니는 한국에 간다면 죽을 거란 의사의 말과는 다르게 한국에 계시면서 아이들을 거두고 기르는 역할을 해 주셨다. 이 덕분에 그녀의 어머니는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마음 편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그녀가 네 살이 될 때까지 16년을 한국에 살면서 살림을 도왔고, 손주들을 길렀다. 그리고 한국에서 소천하시고 광주 선교사 가족 묘지에 묻히셨다. 이로써 그녀의 외할머니는 탈마지 집안에서 한국에 묻힌 첫 번째 선교사가 되셨다.

할머니 덕분에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방 사역을 다닐 수 있었다. 두 분이 함께 다니시다가 교회가 있으면 종을 쳐서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그 후 설교를 하였다. 그때는 온전한 성경이 없어서 쪽 복음을 갖고 다니면서 팔았는데 하나에 5전 정도 받으셨다고 한다. 무료로 줄 수도 있었지만 무료로 주면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벽지로 사용하기 때문에 원래 성경 가격의 절반인 5전을 받고 파셨다고 한다.

이렇게 사역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남장로회 선교부 대표로 재단의 재산 관리와 운영을 맡으셨다. 문제는 당시 한국이 일본의 지배에 있었고 일본은 선교사들을 아주 미워했다는 데 있다. 일본은 선교사들이 교육을 통해 한국 사람들에게 독립 의지를 갖게 해 주는 것과 일본의 부당함에 대한 선교사들의 비판을 불편해했다고 한다. 그 당시 선교사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한 분류는 일본과 함께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 부류는 일본의 잘못을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을 촉구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는 정치적 참견을 하지 않았지만 일본의 모습 속에 있는 잘못된 부분들에 대한 울분은 있었고 보수적인 성향이 있는 선교회일수록 일본과의 마찰이 심했다고 한다. 광주 지역은 보수적인 남장로회가 중심이 되었는데 일본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일제 시대를 살아 낸 탈마지 선교사 가정

1938년부터 40년대 초 일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면서 선교사들을 추방시키기 시작했고 그녀의 아버지 탈마지 선교사는 끝내 한국을 떠나지 않는 바람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12월에 감옥에 들어가 매일 두 끼의 죽을 먹으면서 7월까지 감옥 생활을 하셨고, 결국 7월에 풀려나면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일본은 선교사를 추방시키면서 그냥 추방시키지는 않았다. 일본인들은 연합군에게 선교사들을 자신들의 포로라고 하면서 일본인 포로와의 교환 조건으로 선교사들을 추방하였다.

아버지가 감옥에 갇히기 전 그녀와 가족은 일본에 임시로 피해 있었지만 7남매 중 3명이 한국에 선교사로 나섰다. 첫째 오빠는 군산과 목포에서 선교사를 시작하셨고 후에는 전주에 가서 선교사를 하셨다. 그리고 나중에 한남대 학장과 숭실대 학장을 지내셨다. 그리고 그녀의 언니와 그녀는 40년대에 목포에 가서 성경 학교 교사를 하였고 그 후 미국에 가서 간호 학교를 다녀 간호사가 되었다. 그 후 둘 다 한국에 다시 와서 언니는 전주 예수병원에서 간호사, 간호원장, 간호 학교 교장을 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의사인 선교사와 결혼해 살다 결국 형부는 한국에 묻히게 되었다. 탈마지 집안에 두 번째 선교사가 묻힌 것이다.

그녀 역시 간호사로 한국에서 재직하다 6․25 전쟁을 겪었다. 그녀의 남편 프로보스트 씨는 군인으로 한국에 왔다 전쟁의 참상을 보고 다시 선교사로 입국한 경우다. 남편과 함께 한국에 다시 와서 그때부터는 경주에 내려가 폐교 직전의 문화 학교를 인수받아 운영하였다. 남편은 후에 경주 문화 학교 뒷동산에 묻혔고 한국에서 사역한 공을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모란장을 받기도 했다.

 

물러서는 것이 저의 역할이에요

나는 그녀에게 당신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봤다. 그녀는 너무도 당당하게 "나는 한국인들이 독립할 때까지 돕는 것이 내 일이었다"고 하셨다. 한국인들이 스스로 독립해서 운영할 수 있을 때 모든 주도권을 한국인들에게 넘기고 본인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 당신의 역할이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일이라고 하실 때, 난 그녀가 정말 존경스럽게 보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도권을 잡으려고, 또 주도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흙탕물 싸움을 할 때 그녀는 아무 조건 없이 한국인들에게 그 권리를 넘기고 남편의 무덤만을 경주에 남겨둔 채 한국을 떠났다.

나는 부르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부르심은 그냥 내가 사용되고 마는 것이다. 내 것도 없고 내가 주장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그게 부르심이고 순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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