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만남

‘화난’ 샘에서 ‘환한’ 샘으로(2018.10)

 

 

화난에서

환한샘으로

 

 

이재경(안동 풍천중학교)

 

 

 

인터뷰·사진 김정태

 

 

 

 

너는 넙덕풀쎄기(여자)!

위로는 학자 타입의 오빠, 아래로는 밝고 귀여운 여동생을 둔 다섯 가족의 장녀입니다. 보수적인 지역 정서 탓에 오빠, 여동생에 비해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랐어요. 두 살 차이 나는 오빠는 만 원, 세 살 차이 나는 여동생과 저는 오천 원씩 용돈을 받고 나서 항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할머니의 답변이 너는 넙덕풀쎄기(여자)이기 때문에였지요. 한번은 할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할머니 부채에 할머니 성함을 조사해서 적어 드렸다가 아끼는 부채에 낙서했다고 크게 혼나고 집에서 쫓겨났어요. 하루 종일 대문을 서성이며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 후천적 요인이 아닌 어떤 것으로 인해 받는 불공평한 대우는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습니다. 모태 신앙을 가지고 있어 어렸을 때부터 일상처럼 교회를 다녔는데 하나님은 사람과 달리 공평하시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도 큰 위로가 되었어요.

 

시험 끝나면 무조건 맞아야 했던 중학교 시절

초등학생 때 여름 방학 과제로 스타킹을 재활용하여 꽃 만들어 오기가 있었어요. 교재를 보고 만들어 오라는데 아무리 봐도 도저히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고, 친구들한테 전화했더니 만든 친구도 없고, 만들어 가겠다는 친구도 없었지요.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개학을 앞두고 며칠을 엉엉 울고 다녔더니 보다 못한 아버지께서 집에 있던 철사와 스타킹을 이용해 커다란 꽃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개학날 의기양양하게 그 꽃을 들고 학교로 갔는데 막상 선생님은 그 꽃을 보시더니 3초간 말씀이 없으셨어요. 그리고 , 그래. 진짜로 만들어 왔구나. 잘했다.” 하고는 꽃을 받지도 않고 교무실로 들어가 버리셨습니다. 그때 어린 제가 느낀 감정은 실망도 섭섭함도 아닌 분노였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보니 선생님들이 아주 무서웠어요. 시험만 치고 나면 타작기간이라며 온갖 종류의 체벌을 하셨습니다. A 선생님은 체구가 아주 큰 남자 선생님이셨는데 그 무서운 선생님들 중에서도 최고였습니다. 맞기 싫었던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반에서 최고점을 받았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제 번호를 부르더니 나오라고 하셨어요. 의아해 하며 교실 앞으로 나갔는데 갑자기 솥뚜껑만한 손이 제 볼 위로 날아들었습니다. 이유는 학반 번호를 작은 글씨로 써서였습니다. 시험 전에 크게 쓰라고 안내를 하셨나 본데 공포에 젖어 시험 내용을 외우느라 여념이 없었던 저는 그 말을 듣지 못했던 거죠. 백번 양보해서 공부를 열심히 시키기 위한 체벌은 납득한다 하더라도 맞지 않기 위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은 그 폭력을 피할 방법이 없었던 교실 안에서 저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또 분노했습니다.

 

초임 학교는 내 인생의 첫 광야였어요

신규 발령을 소위 아주 빡센곳으로 받았어요. 첫 해는 매일 울었습니다. 나름 살면서 고생을 좀 했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완벽한 착각이었습니다. 이전에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 먹을 때와 잘 때였는데 식욕이 뚝 떨어지고 다음날 출근할 것을 생각하면 너무 두려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처음에는 다 그렇게 힘든 거라며 격려하던 부모님도 나중에는 저게 저러다 어떻게 되겠다 싶은 마음에 겁이 덜컥 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5월 말, 가족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재경이가 학교 출근을 너무 힘들어 하니까 대책을 마련하자는 것이 안건이었어요. 방에 앓는 듯이 누워 건넌방에서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질병 휴직을 신청하자니 병원에서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진단서를 떼어야겠다는 누군가의 발언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이건 아니다 싶어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 3일만 견디면 토요일, 일주일만 견디면 빨간 날, 한 달만 더 버티면 방학, 하는 식으로 하루하루 말 그대로 버텨 내던 중 수업 때문에 제일 힘들다는 결론을 내리고 연수에 목숨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2012 기독교사대회에서 길을 찾다

2012년 기독교사대회도 사실 교사 연수의 하나로서 접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사들만 모이는 교사 연수가 있다 하여 흥미를 가지고 신청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머릿속에는 수업 기술, 생활지도 팁 등을 얻어 가겠다는 목표밖에 없었어요. 기독교사대회에 가니 그곳에서만 채워지는 것들이 있더군요. ‘사람을 바꾸고 변화를 시키는 것은말씀이 아니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어요. 교사가 바뀌고 아이들이 바뀌는 것도 말씀이 없으니 안 되더라는 지점을 만났죠. 그래서 저는 기독교사가 참 좋아요.

2012년 대회 때 학급경영에 관한 선택 강의를 듣던 중 머리를 쾅 내리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요. “하나님이 그 학생을 사랑하시는데.” 그 다음 말은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학생을 그런 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바라보아야 한다는 도전이 너무나 신선하고 무겁게 다가왔어요. 저는 직장과 교회를 철저하게 분리해서 살아오고 있었구나! 매일 이 광야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 광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구하느라 모든 예배와 부흥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그렇게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마음, 그 사랑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의식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엉엉 울면서 회개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받은 은혜를 그냥 두면 3일 안에 다 흘려버릴 것 같아서 기독교사 공동체를 찾던 중 당시 살던 지역에 TCF가 있다는 것을 알고 대표 선생님과 연결된 것이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어요.

 

너무나 부러웠던 캐나다 학교 시스템과 우리 학교

캐나다에 몇 달간 머물면서 그곳의 학교 시스템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어요. 제가 배치되었던 학교의 교감, 교장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어요. 일단 그곳에서는 수업 교사와 행정 교사(관리자)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고 각자 자신이 맡은 분야의 업무를 확실하게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수업 교사는 매 시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수업 지도안을 작성하고, 각자의 수업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고, 수업을 참관해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 당황하거나 “No”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불시에 찾아가도 기꺼이 교실 문을 열어 주고 수업 후에는 피드백을 원하는 등 열린 마음으로 수업 활동 논하는 것을 즐거워했어요. 한편, 교장, 교감선생님은 두 사람이 동시에 학교에 있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어요. 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학교의 모든 출장을 가기 때문이죠. 현장체험학습을 가게 되면 버스 회사와 연락하고 각종 서류들을 챙기는 작업을 교감이 직접 합니다. 학교 행사가 있어 지역 신문사에서 기자가 찾아오면 응대부터 설명 등 모든 관련 업무를 교장이 처리하고요. 아마 한국에 있으면서 거기는 이렇더라고 말로 들었으면 별로 공감이 안 됐을지도 모르겠는데 직접 눈으로 그 시스템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그 시스템 하에서 학교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잘 돌아가는지 확인을 했기 때문에 그 문화가 너무나 부러웠어요.

요즘 우리나라 곳곳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일 터지고 있어요. 특히 학교와 군대에서 왕따, 자살, 폭력 등 많은 문제들이 보고되고 있는데 전문가들이 그 이유로 지목하는 것 중 하나가 두 집단 모두 선발(screening) 과정이 없는 것이라고 해요. 학교는 모든 학생을 받아요. 가려서 받지 못한 각양각색의 학생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교육을 해야 하니 힘이 들 수밖에 없지요. 학교가 많은 문제를 품고 있는 것은 뒤틀린 사회 구조와 깨어진 가정에 그 일차적인 원인이 있어요. 그런데 거꾸로 생각하면 학교는 그 모든 학생들, 그리고 그들의 학부모에 대한 접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니까 어떻게 보면 이것은 학교가 하나 더 가지고 있는 것’, 즉 기회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부모 교육에도 학교가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엉망인 것 같아도 학교에는 희망이 있다 생각해요.

 

그런 정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1학년임에도 알파벳을 떼지 못하고 올라온 학생이 있었어요. 수준별 수업을 하고 있지도 않고 학교 사업 일정과 교육과정이 너무나 빡빡한 탓에 아침 자습 시간과 점심시간을 활용해 따로 공부를 봐주려고 해 봐도 사정이 여의치 않았죠. 그러던 중 월간 좋은교사에서 기초학력 향상 문제를 다루었던 글을 읽고 영감을 받아 여름방학에 영어 부진 학생들을 위한 영어캠프를 일주일간 열었어요. 일주일 만에 그 학생이 알파벳을 떼고, 파닉스를 떼고, 혼자 영어 단어를 외우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보람도 있었지만 사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어요. 이렇게 일주일만 제대로 투자해 주면 할 수 있는 아이를 한 학기 내내 방치했다는 얘기잖아요. 결국은 제도의 문제인데 학교 현장의 수많은 교육 활동들이 비본질이 본질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보니 사실 기초학력 향상만 해도 각 교육청마다 해당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수많은 지원 방안을 쏟아내고 있지만 실제 피부에 와닿는 효과는 미미한 실정이죠. 관에서 제공하는 사업들 덕분에가 아니라 그런 정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교육 활동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어려움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어요. 이런 부분들과 그 개선 방안이 요즘 저의 주요 관심사입니다.

 

섬기는교사로 기억되고 싶어요

알차고 보람 있는 수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 주어진 업무를 열심히 하면, 교회 봉사와 공동체 활동에 충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여겨 왔어요. 또한, 특정한 자리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에 따라 일의 결과가 달라지겠다고 생각했죠. 제가 부장을 맡고 기존 사업의 틀을 깨면서 선생님들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때 그 생각이 더 굳어졌던 것 같아요. ‘그래, 이 정도면 잘하고 있어.’라고 자족하려던 찰나. 이번 2018 기독교사대회 둘째 날 저녁 집회에서 묵직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출애굽기 말씀 속 중보자로 서 있던 모세를 얘기하시며 그동안 당신들은 뭘 했습니까! 무엇을 위해 기도했습니까!”라고 도전하시는 배덕만 목사님의 질문에 아차 싶은 것이 있었어요. 말씀을 듣고 보니 제 삶에 방향성이 부족했음이 보이더라고요. 개인의 열심은 그냥 점이에요. 점이 제 아무리 커도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두 개의 점이 모이면 선을 이룰 수 있지요. 또 그 선이 여러 개가 되면 도형, 모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구조의 문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저 혼자만의 열심을 넘어서 공동체, 연대의 힘을 봐야 한다는 새로운 목적 의식을 가지게 되었어요. 앞으로 저는 이 땅의 다른 기독 선생님들과 함께 작은 모세로, 학교와 한국 교회를 위해 중보하는 교사로 섬기다가 조용히 잊히는 그런 존재로 살고 싶습니다.

 

 

교사, 육아 중인 아줌마 교사, 거기에다 학교 안의 여러 가지 시스템이 보이는 중견 교사가 되면 학교와 사회의 뒤틀린 구조가 보입니다. 잘못된 구조로 인해 피해를 입는 이는 결국 약자입니다. 여성으로, 엄마로, 기독교사로서 말씀으로 버텨 보다가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되는 상황에 이르면 결론적으로 화가 날 수밖에 없어 본인을 화난 샘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기독교사대회 때 기숙사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한 분이 , 환한 샘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앞으로 선생님의 화는 그저 자조적인 화가 아니라 개선을 위한 화, 문제의식을 가지고 뒤틀린 것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에너지가 되는 화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환한선생님을 통해 새로워지고 환해질 경북 교육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