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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지금부터, 여기서부터, 나로부터(2018.11)

 

 

 

지금부, 여기서부터, 나로부터

 

 

 

이정우(전 봉명중학교)

 

 

 

 

인터뷰·사진 한성준

 

 

 

크고 작은 직분이 저를 살렸어요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던 것과 교회에 재밌게 다녔던 것이 생각나요. 제가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 사이에 어머니께서 많이 아프셨어요. 심장병으로 중환자실과 일반 병실을 번갈아 가며 투병 생활을 2년 정도하셨어요. 심장 안에 피의 역류를 막아 주는 판막이 있는데 인공 판막으로 수술을 하셨어요. 그때는 정말 안 좋은 일이 있을 뻔도 했지만 다행히 어머니는 지금까지 건강하세요. 어릴 때를 생각하면 이 일이 가장 먼저 생각이 나요. 어린 마음에 아픈 엄마의 모습이 각인된 것 같아요. 지금은 건강하시니 정말 감사한 일이죠.

저는 시골 마을에서 자랐어요. 마을 앞에 논이 있고 천이 흐르는 그런 시골이었어요. 그런 우리 동네에 제가 5살 쯤 됐을 때 교회가 생겼어요. 공주 율정교회라고 지금도 다니고 있는 교회예요. 교회를 어렸을 때는 뭐가 뭔지도 모르고 친구들을 따라 그냥 놀러 따라다녔던 거 같아요. 저와 제 동생이 먼저 교회에 나갔고 저와 제 동생을 통해서 저희 어머니께서 교회에 오게 되시고 그 후에는 할머니도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됐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께서는 원래 절에 다니셨는데 어머니께서 교회를 나오시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핍박도 있었을 것 같고요. 그럼에도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정말 감사한 일이죠. 아버지께서도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면 참 좋겠는데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무 아쉽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신앙과 관련된 추억은 많이 없어요. 교회에서 수련회를 가거나 부흥집회에 다녔던 일들만 기억에 조금 있고요. 운동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중학교 때부터 농구대회나 축구대회에 나가거나 친구들과 자칭 학교 대표 농구팀, 축구팀을 만들어서 옆 학교 학생들과 짜장면 내기 경기를 했던 일들이 기억이 나요.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의 삶에 감동을 받고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부터예요. 믿음이 조금 깊어지면서 교회 안에서 이런저런 크고 작은 직분과 사역을 감당했어요. 우선 주일학교 교사를 10년 정도 했고 지금은 중등부 교사를 하고 있어요. 학생 때는 찬양팀에서 드럼과 기타를 꽤 쳤었고 지금은 찬양으로 예배 인도를 하고 있어요. 차량 운행부터 중고등부 교사까지 교회가 작다 보니 꽤 많은 일들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교회 안에서 자랐고 그 경험을 가지고 대학생 때는 선교 동아리에서 노방 찬양 집회를 하거나 대학교 내 연합 예배 사역을 섬겼어요. 그 후 교사가 된 후에는 대전 지역의 기독교사 모임인 행복교실이라는 교사 선교 단체를 통하여 학생 기독 동아리를 운영하거나 인도 교육 선교를 다녀오거나 하는 등의 사역을 감당해 오고 있어요.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 같지만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저도 제가 직분을 감당하고 여러 사역을 섬기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 제가 맡았던 직분과 사역이 저를 지켜 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크고 작은 직분과 사역들을 감당하며 살지 싶어요.(웃음)

 

빛으로, 소금으로

대학 생활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L&S라는 찬양 선교 동아리 활동이에요. Light & Salt. 빛과 소금 찬양 선교 동아리인데요. 일종의 대학 자생 동아리예요. 우리가 잘 아는 CCCIVF 같은 전문 선교 단체가 아니고 학생들끼리 모여 운영하는 순수 기독교 동아리였어요. 물론 지도 간사님이나 지도 목사님도 없었고요.

L&S 찬양 선교 동아리는 매일 점심 12시에 학교 중앙도서관 앞에서 30분간 찬양하는 사역을 했어요. 당시 기타 반주를 누군가 한 명이 했어야 했는데 제가 기타를 조금 칠 줄 알아서 거의 매일 노방 찬양을 했던 거 같아요. 찬양 후에 동아리 선후배들과 다 같이 학생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가기도 하고 동아리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그리고 대학교 내에 있는 기독교 동아리들이 연합하여 교내 채플을 한 달에 한 번씩 드렸어요. 그때도 찬양팀으로 섬기면서 연합 사역을 통해 학교 내 선교 사역을 조금씩 했었어요. 공주교대, 공주사대 기독 동아리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연합하여 모이곤 했어요. 연합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음악과 교수님들을 찾아 가서 예배 장소를 도와달라고 부탁드렸던 기억도 나네요. 결국 예배 장소를 구하지 못해서 운동장에서 연합 예배를 드렸던 적도 있어요. 그때 연합 사역의 가장 큰 비전은 모든 학과에 기도 모임이 생기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각 과에 한 명씩을 예배 가운데 보내 달라고 기도했었어요. 그리고 교수님들 신우회 모임과 연합하여 연합 예배를 드렸던 적도 있어요. 체육교육과 내에서도 많은 수는 아니지만 약간의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어요. 그들과 연합하여 큐티를 하고 함께 연합 예배에 참여하기도 하고 했어요.

 

2의 인생을 선물해 준 행복교실

신규 교사로 1년을 지내고 군대에 2년 다녀왔어요. 그리고 복직한 후 두 번째 되던 해에 대전의 기독교사 모임(행복교실)에 가게 됐어요. 교무실 동료 선생님의 권유로 모임에 나가게 됐어요. 동료 선생님도 아직 한 번도 나가 보지는 않았는데 오늘부터 기독교사 모임에 나갈 거라고 같이 나가 보자고 해서 처음으로 모임에 나갔어요. 2012년 개강 모임으로 기억하는데 처음 가는 날부터 기타를 주더니 예배 시간에 찬양을 할 때 반주를 넣어달라고 하더군요. 그 후 그 모임에 있는 많은 선생님들과 관계가 깊어지고 교사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2주에 한 번씩 다 같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목장모임 선생님들과 큐티와 교제를 했어요. 그 외에도 수업 연구 모임, 학원 복음화 모임, 교육 정책 모임 등의 소모임을 만들어서 전문성과 영성을 함께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다 20151월부터 인도 교육 선교를 다녀오게 되었어요. 선교에는 정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던 저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너무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인도 교육 선교를 통해 현지에서 고군분투하는 선교사님들의 삶을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선교사님들의 헌신적인 삶이 100년여 전에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웠던 선교사님들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작은 교회에서 워낙 많은 일을 하다 보니 소진되는 것 같았는데 인도 선교를 통해 재충전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작은 교회에서 제가 섬기는 일들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어요.

매년 인도에 교육 선교를 다녀오는데요. 지금은 한국에서의 교직 생활과 인도에서의 교육 선교가 서로 좋은 영향을 주면서 선순환하고 있어요. 인도에 가서 받은 은혜로 삶에 대한 새로운 동력을 얻을 수 있어서 좋고, 한국에서 쌓은 교사로서의 전문성을 인도에 있는 선생님들에게 나눌 수 있어서 좋고요. 해외 선교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단기든 장기든 국내든 국외든 사역에 꼭 함께 동참해 보라고 권유해 드리고 싶어요. 한국의 개교회 중심의 사역과 신앙관에서 탈피하여 하나님의 사역이 얼마나 여러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 타지 땅에서도 이루어져 가고 있는지 느끼는 거 자체가 신앙의 관점을 바꾸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 믿어요.

 

행복한 대전 교육 만들기

대전 교육은 보수 교육감의 손에서 나와 본 적이 없는 거의 유일한 도시일 거예요. 보수가 나쁜 것이고 진보가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회가 발전해 가는 과정은 단순하다고 생각해요. 정반합이죠. 정치적으로든 교육적으로든 너무 한쪽의 관점이 주가 되는 사회가 지속되면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대전 교육에도 진보적인 시도가 이루어져서 그동안 대전 교육에서 잘 해 왔던 것들은 잘 이어받고 한계로 지적 받아 왔던 부분들에 대해서는 과감한 변화를 시도했으면 좋겠어요.

대전 행복교실에서 진행하는 여러 모임에 참여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모임은 정책 모임이에요. 애착이 가는 이유는 교육 정책이 교육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인데 그에 비해 관심을 갖는 교사들이 너무 적어서 현장의 소리가 교육청이나 교육부에 전달되기가 어렵기 때문이에요. 다른 연구는 많은 교사들이 참여하지만 유독 정책만은 소수의 교사들이 관심을 갖고 있어요. 이 점이 아쉽기도 하고 학교 현장에서 느끼는 여러 가지 아쉬운 부분들을 조금씩 바꿔 나가는 데 일조하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신규 교사 때 아니 이건 왜 이렇게 하지?’라고 의아해 했던 많은 부분들을 10, 20년 후 학교에 발령 받게 되는 신규 교사들은 느끼지 않게 만들어 가고 싶어요. 교사들이 납득할 수 있는 교육 풍토가 만들어져 갈 때 학생들에게도 더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다고 봐요.

지방에서 정책 모임을 하기가 쉽지는 않아요. 정책 모임은 20132학기 때 5명의 선생님이 시작을 했어요. 제가 2012 기독교사대회에서 홍인기 선생님의 교육 정책 관련 강의를 듣고 그 해 2학기부터 서울 좋은교사운동 사무실에서 하는 정책 모임에 나갔어요. 대전에서 서울까지 먼 거리였지만 정책 운동을 배울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어요. 그 후엔 5명의 선생님과 꾸준하게 대전에서 정책 모임을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회복적 생활교육을 위한 정책 제안, 학교 평가 개선 방안 연구 등을 했어요. 올해는 업무 정상화라는 주제를 가지고 대전 행복교실교육정책팀 선생님들과 연구를 하고 있어요.

내년부터는 수업 보호권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할 생각이에요. 학생들의 인권만큼 존중되어야 할 것이 바로 학생들 한 명, 한 명에게 부여된 배울 권리라고 생각해요. 학교 현장에서 막무가내로 행동하며 친구들의 배울 권리를 침해하고 교권에 반하는 학생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어요. 이 학생들을 체계적으로 돕고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현재 학교 현장에 거의 없어요. 이렇다 보니 하루하루를 상처 속에 꾸역꾸역 살아가는 교사들이 너무 많아요. 교사 개개인의 능력으로 수업을 보호하고 교사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나 교육청 차원의 규정과 정책 안에서 아이들과 교사들을 보호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제 교직 생활 동안 교사 선교 단체에 어떻게든 계속 몸을 두고 싶어요. 방학이라는 교사로서 받을 수 있는 선물을 선교하는 일에 계속 사용하고 싶고요. 능력이 많지는 않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저의 섬김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다면 교사로서 그보다 더 멋진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이정우 선생님을 만나고 오는 날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신혼여행으로 미뤄 둔 학교 일 때문에 인터뷰 내내 걸려 오는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와 가정과 교회, 그리고 기독교사 모임까지. 그의 일주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부터, 여기부터, 나부터 기독교사로 살겠다 다짐하는 이정우 선생님! 고마웠다. 믿음직스러웠다. 힘을 다해 사는 그가 지어 주는 미소가 왜 그리 아름다운지. 그를 예전부터 지금까지 인도하신,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를 인도해 가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때에 맞는 은혜를 주실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