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이들을 위한 교육
최유강 (티치포올코리아 대표)
한동대학교 국제어문학부 4학년 졸업을 앞두고 교육에 대한 비전을 발견하면서 하버드대학교 정책대학원인 케네디스쿨에 지원하여 공부했다. 이후 밴더빌트대학교 피바디사범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교육 격차 해소를 위한 교육봉사단체인 ‘Teach for America’에 깊은 감명을 받아 한국화 하는 정책을 연구했다. 웬디 콥과 같이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사회, 경제적으로 소외된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기꺼이 헌신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땀 흘리고 있다.
인터뷰/사진·김중훈
저는 늦깎이 대학생이었습니다
저는 대학 진학도 남들보다 늦은 편이었습니다. 군대도 공군으로 30개월을 다녀와서 29살이 되어서야 대학교 4학년이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 전부터 경제적으로 제 자신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저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서 취업 준비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그날그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하루는 과외를 마친 후 캠퍼스에 돌아와 학교 벤치에 앉았습니다.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며 잠시 앉아 있는데 생각해 보니 다음 학기면 졸업이더군요. 문득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아! 이제 한 학기만 지나면 졸업이구나. 내 나이 서른이 되어 가는데 졸업하면 뭘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영어에도 관심이 있고 토론하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어서 미국 로스쿨에 진학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 대학원들은 지원자들에게 SOP(Statement of Purpose)라고 하는 학업 계획서를 제출하도록 하기 때문에 에세이를 작성하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컴퓨터를 켰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는데 에세이를 한 줄도 못 썼습니다. 마음이 낙담되어서 한동대학교 본관 4층에 있는 기도실로 갔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휴” 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로스쿨’이라는 단어가 싹 지워졌습니다. 기도가 깊어지면서 제 마음 깊은 곳에 ‘교육’에 대한 깊은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능 1세대로,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학력고사에 맞춰서 공부를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수능으로 모의고사를 치른다고 하셨어요. 내신제도도 바뀌었고 주요 대학들이 본고사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저는 비평준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이때 여러 친구들이 내신 문제로 안타깝게 자퇴를 했습니다. 입시 제도가 급작스럽게 바뀌면서 힘들어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큰 상처를 받은 친구도 있었습니다. 저 또한 삼수 끝에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지만 고등학교 졸업 이후 재수를 할 때 아버지께서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과외로 돈을 벌면서 대학 진학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이런 상처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시커먼 연기가 되어 올라오더군요. 그때 교육으로 저의 인생 방향이 결정되었습니다. 앞으로 교육 정책을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한 후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고 이때 찾은 학교가 하버드 케네디스쿨과 하버드 교육대학원입니다. 저는 교육 관련 에세이로 대학원에 원서를 제출했고 정말 감사하게도 두 학교에서 모두 합격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책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저에게 맞겠다고 생각해서 케네디스쿨로 진학했습니다.
대학에서 경험한 교육의 힘
제가 ‘교육의 힘’을 깨닫게 된 것은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입니다. 고등학교 기간 동안 입시로 인해 지치고 상했던 마음들이 대학에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에서 저는 좋은 교수님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학생들에게 인생의 비전을 심어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도 몸소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모교인 한동대학교는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학교입니다. 그렇지만 학교는 “공부해서 남 주자”라는 비전을 분명하게 제시하였고 김영길 총장님을 비롯한 많은 교수님들께서 학생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어느 학기에 저는 등록금을 마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때 여러 교수님들께서 조용히 십시일반으로 장학금을 모아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휴학하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받은 한 번의 격려, 한 번의 도움의 손길, “너는 할 수 있어”라는 응원이 한 사람을 살리고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가지고 대학원에 진학했기 때문에 제가 케네디스쿨에서 ‘Teach For America’를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 이런 봉사 단체를 한국에 도입하여 많은 젊은이들을 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대표 대학생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가 케네디스쿨에 진학할 때 준비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일반 대학원들은 보통 학업 계획서를 요구하는데 케네디스쿨은 학업 계획서와 정책 분석 에세이를 함께 제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원 과정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당시 2003년 말에 원서를 제출했고 2004년 2월 21일에 대학교를 졸업하게 되어 있었는데 졸업식 일주일 전에 하버드에서 이메일이 왔어요. 2월 26일에 하버드 입학사정관이 서울을 방문해서 구두 인터뷰와 에세이 테스트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구두 인터뷰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적지 않게 당황했습니다. 구두 인터뷰와 제한된 시간 동안 에세이를 쓰는 것이 부담이 되었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준비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저 나름대로 굉장히 비장했습니다. 교육을 바꿔보겠다고 자신 있게 하버드에 원서를 냈으니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최대한 열심히 인터뷰를 준비하겠다는 각오로 저의 방문에는 이렇게 써서 붙여놓았습니다. “대한민국 대표 대학생”. 어학연수나 교환학생도 안 해본 토종이니 제가 입학사정관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정도가 토종 대한민국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드디어 2월 26일이 되었습니다. 그날 오전 일찍 입학사정관을 만났습니다. 30분간의 에세이 테스트에 이어 1시간 10분정도 구두 인터뷰가 이어졌습니다. 구두 인터뷰를 1시간 넘게 한다는 것은 정말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려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교육 문제로 인한 아픔, 앞으로 교육을 통해 돕고 싶은 학생들에 대해 마음껏 이야기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하버드 케네디스쿨과 하버드 교육대학원 모두에서 합격 통지를 받았습니다. 사실 졸업한지 일주일 밖에 안 된 지원자가 합격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제가 반추해 보건데 저의 경우 하버드에서 저의 교육에 대한 ‘비전’을 높이 평가해줬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합격한 후에도 쉽지 않은 길이 남아 있었어요. 바로 장학금 문제였죠. 하버드에서 공부하려면 한 해에 7~8천만 원 이상이 들어갑니다. 높은 학비와 생활비 때문이죠. 우선 입학을 한 해 연기한 후 여러 장학 재단에 원서를 냈습니다. 그러나 하나 둘 씩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큰 장학 재단에 원서를 넣고 40일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서도 최종적으로 불합격 메일이 왔습니다. 하늘이 노랗게 보일 수 있다는 것과 하늘이 바로 머리위로 내려올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당시 대학 동기의 서울 자취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을 때였는데 불합격 소식을 듣고 한참 울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웃으시는 거예요. 그것도 아무 거리낌 없이 웃으시면서 “안 될 줄 알았다. 네가 실망할까봐 말은 안했는데, 너의 재정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채워질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위로해 주시려고 웃으시는 게 아니라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웃으셨어요. 그리고 그 후에 정말 하나님의 방법으로 십시일반 장학금이 채워졌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제가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도와주신 분들이 100분은 될 거예요. 정말 ‘빚진 자’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제가 ‘교육 봉사’로 가는 것이 맞다는 것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 많은 분들께 사랑의 빚을 지도록 하신 것 같아요.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 ‘토종’ 한인 학생회장
케네디스쿨 입학 첫 해에는 정말 바빴습니다. 미국에서 처음 공부를 하는 까닭에 수업 준비를 위해 예습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더군다나 발표까지 수시로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일 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두 학기를 마치고 여름이 되었어요. 하루는 케네디스쿨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전교생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9월에 개강하면 총학생회장 선거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죠. 처음에는 그냥 무심코 흘려보냈어요. 그런데 그날 오후에 산책을 하면서 오전에 받았던 메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세계 최고의 리더십학교에서 총학생회장으로 섬긴다는 것은 멋진 일이죠. 진지하게 생각지 못했던 일인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고민이 되었습니다. 일 년 동안 공부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리더십으로서 봉사하며 학업까지 병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결론은 ‘일주일간 기도해 보자’였습니다.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때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읽게 되었죠. ‘아, 이거였구나!’ 저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학생회장으로 봉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조금의 리더십 달란트를 가진 것이죠. 그 달란트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달란트가 조금이라도 있으니 그것을 발전시키는 것은 저의 몫이자 사명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런 리더십을 개발하는데 케네디스쿨만한 곳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케네디스쿨은 정책대학원이기는 하지만 리더십학교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어요. 왜냐하면 결과는 중요치 않으니까요. 제가 해야 할 일은 제 달란트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고 결과는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사실 당선 가능성도 희박했죠. 케네디스쿨은 한 해 약 450명 정도의 석사생들을 선발해요. 보통 2년 과정이니까 900명 남짓의 전교생이 재학하는 학교입니다. 신입생들은 가을 학기에 입학하기 때문에 선거에 이기려면 여름방학에 신입생들과 친해져야 합니다. 저는 애초에 선거에 나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신입생들에게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회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 중 두 명이 벌써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기획팀에서 일을 했던 이력이 있었습니다. 이 후보들은 이미 개강할 즈음에 1학년들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제가 외국 학생이라는 것도 그다지 유리한 점은 아니었어요. 케네디스쿨은 미국 대학원이니 미국 학생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당선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마 저를 포함해 한 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가슴 아팠던 ‘조승희’ 사건
제가 학생회장으로 섬기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사건은 버지니아텍의 조승희 사건입니다. 2007년 4월 16일, 조승희라는 한국계 학생이 워싱턴 인근에 위치한 버지니아텍 대학에서 32명을 사살하고 29명을 부상시키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미국에 체류하던 한국인들은 미국 시민들과 함께 가슴 아파 하면서도 혹시나 모를 한국인 대상 증오 범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케네디스쿨 역시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공동체여서 이곳의 한국 유학생들도 조심스럽게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저는 학생 대표자 회의를 곧 열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이번 비극에 대한 위로의 마음을 전달하면서도 한국인들에게 선입견을 갖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던 중 저는 비닐로 된 큰 현수막을 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현수막에 “We Are Here With You -Harvard Kennedy School Student Government-” 라는 글귀를 넣었습니다. 드디어 학생 대표자 회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약 20명의 학생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데 저는 시작하기 전에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 대해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현수막을 펼쳐 보여주며 이야기했습니다. “버지니아텍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에게 우리가 가진 위로의 마음을 전달하고자 현수막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케네디 포럼에 서서 우리 학생들에게 현수막에 위로의 글을 적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저와 함께 하실 분들은 참여가 가능한 시간을 여기 시간표에 체크하시고 내일 그 시간에 나오시면 됩니다.”
다음 날 저는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학교에 나와 오후 6시까지 케네디포럼에 서서 케네디스쿨 학생들에게 위로의 글을 적어달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많은 미국 학생들은 저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애써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습니다. 이 일을 통해 우려했던 일들은 발생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 공동체로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
인생에서 처음으로 쓴 맛을 본 것이 대학 입시에서의 실패인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고3이던 해가 학력고사에서 수학능력평가로 바뀌는 첫해였고, 이 때 내신 체제가 바뀌고 본고사 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총학생회장을 비롯해 고등학교 중창단, 청소년적십자 등 여러 활동들을 활발하게 했는데 입시에 실패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재수를 시작했는데 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시 재직하셨던 회사에서 승진하셔서 지방 사무실의 지점장으로 발령이 나셨는데 첫 출근길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1994년 12월의 일입니다. 제가 한창 본고사를 준비하던 시기였습니다. 그 후 다시 한 번 대학 진학에 실패했습니다. 연속된 실패는 자신감을 빼앗아 가더군요.
이 후 저의 삼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제가 과외를 여러 개를 하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학원비도 내야했고 식비나 도서관 비용도 제가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삼수를 하였지만 저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제가 졸업한 대학이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는 것을 알고 너무 감사하지만 당시로서는 제 모교가 1지망이 아니었어요. 연속된 실패로 마음이 심하게 위축되었죠. 비교적 어린 나이에 경제적 부분까지 책임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집에 어려운 일이라도 생기면 아버지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어요. 문득 문득 아버지가 떠오를 때면 다른 큰 뭔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버지 옆에서 가만히 앉아 아무 걱정하지 않고 TV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냥 아버지가 계시면 제가 집안일에 대해 걱정할 필요도 없고 아버지를 믿으면 되니까 인생의 짐이 훨씬 가벼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위로자가 되기 위해 티치포올코리아를 시작하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로스쿨에 진학하려던 생각이 기도를 통해 교육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제가 경험한 아픔들이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입니다. 저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사람들마다 각자의 방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가령 부모님이 의사나 교수이신데 그런 모습이 너무 좋아서 그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위의 멘토의 조언이 방향을 결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인생의 아픔이 승화되어서 교육에서 ‘위로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 저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케네디스쿨에 진학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티치포아메리카를 알게 되었을 때에는 ‘아, 이거다!’ 싶었습니다. 저는 바로 서점으로 가서 티치포아메리카 설립자인 웬디 콥이 쓴 책을 사서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티치포아메리카를 한국화하는 방안을 저의 석사 논문 연구 주제로 결정했습니다.
한국과 미국은 교육적, 사회적 맥락이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경우에는 유사하게 접근해야 하는 부분도 있고 전혀 새롭게 접근해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그 때부터 꾸준히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졸업하던 2007년 석사 논문을 썼고, 2008년에는 웬디 대표를 워싱턴에서 직접 만났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 웬디 대표의 저서 <One Day All Children>를 번역해서 국내에 <열혈 교사 도전기>로 소개했습니다. 2012년 6월에는 웬디 대표를 한국에 초청해 저희 단체와 간담회를 가지기도 했고 올해 초에는 웬디 대표의 두 번째 저서인 <A Chance to Make History>를 <티치포아메리카 천재들의 교육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소개했습니다.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저희 단체가 본격적으로 학생들을 돕기 시작한 것은 2011년 10월부터입니다. 그때부터 인천의 한 여자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니 벌써 21개월이 되었습니다.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였고 탁월한 자원봉사자들과 저희 전담 스텝이 학교를 담당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이 학생들은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저희 TFA 선생님들이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 중에는 전교 성적이 150등 이상 오른 학생도 있고 언어, 수리, 외국어 영역에서 모두 1등급을 받은 학생도 있습니다. 사교육을 받지 않고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이죠. 그리고 한 특성화고등학교에서는 글로벌 리더반을 선발하여 영어 회화를 집중적으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소개도 어려워하던 아이들이 학기가 끝날 즈음에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와서는 3분 이상의 원고를 외워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여름에는 3박4일 일정으로 새터민 학생 79명을 대상으로 “2013 차세대 통일리더 캠프”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통일 한국 시대에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할 귀한 학생들입니다. 현장 연구를 하면 할수록 새터민 학생들과 이주 노동자 자녀들이 참 어려운 환경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앞으로 이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도울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캠프는 그 시작이 될 것입니다.
교육 복지에 대한 투자는 우리 사회를 위한 최고의 투자입니다
우리가 흔히 소외 계층 학생들을 돕는다고 하면 ‘복지’ 차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를 위한 최고의 투자라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새터민 학생들과 이주 노동자 자녀들의 중고등학교 학업 중단 비율은 한국의 일반 학생들에 비해 매우 높습니다. 미국 컬럼비아 교육대학원 헨리 레빈 교수의 연구 결과를 보면 고등학교 학업 중단자 한 명의 자퇴를 막을 경우 미국 사회가 전체적으로 얻게 되는 사회적 효용은 우리나라 돈으로 무려 4억 3천만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경우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해 납세하게 되고 정부 보조를 받는 저소득층이 될 확률이 줄어들며 범죄자가 될 확률도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 개념이 “인적 자본 개발”이 되었든 “교육 사다리”를 든든히 하는 것이 되었든 소외 계층 학생들을 위한 배려는 우리 사회를 위한 최고의 투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육 봉사 활동을 통해 봉사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이 차세대 리더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기업들도 그 혜택을 받게 됩니다. 사실 교육 봉사의 최고 수혜자는 봉사자들과 기업들입니다. 많은 연구 결과에 의하면 봉사에 참여하는 봉사자들의 리더십, 학업 능력 등이 향상된다고 합니다. 또한 한 연구 결과를 보면 기업들이 대졸자를 선발해 교육시키는 비용이 한 사람당 무려 6,200만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교육 봉사 등과 같이 팀워크를 요하고 학생들과 효과적인 소통을 해야 하며 우리 사회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활동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이나 대학원생들은 기업에 가서도 잘 융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 인재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차원에서 대학생들은 본인들이 일방적으로 봉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함께 배워가고 성장하는 기회로서 교육 봉사를 대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기업들과 정부는 우리 사회를 위한 적극적인 투자 차원에서, 그리고 인재를 양성한다는 차원에서 잘 운영되고 있는 교육봉사단체를 정책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분들의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부러워할 만큼 높습니다. 하지만 사회, 경제적 양극화로 인한 교육 격차는 이미 상당히 심각한 수준입니다. ‘모든 아이들은 사회, 경제적 여건과 상관없이 최상의 교육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으며 최상의 교육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대한민국’이라는 꿈을 위해 무더운 여름, 최유강 대표와 티치포올코리아 스텝들이 함께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들과 함께한 짧은 만남을 통해 저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희망이 넘치는구나!’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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