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가포눈눌’의 인문학자 (김응교 숙명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2013.04

좋은교사 2014. 6. 12. 11:31

가포눈눌의 인문학자





 

 

김응교

연세대 신학과 졸업, 연세대 국문과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7분단시대에 시를 발표하고, 1990한길문학신인상을 받았다. 1991풍자시, 약자의 리얼리즘실천문학에 발표하면서 평론 활동도 시작했다. 1996년 도쿄외국어대학을 거쳐, 도쿄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1998년 와세다대학 객원교수로 임용되어 10년간 강의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로 있으며, 트위터(@sinenmul)로 세상과 소통한다.

 

 

인터뷰·문경민 / 사진·김자윤

 

 

 

시사 토크 <크리스천 NOW> 진행자

요즘 CBS TV 시사토크 <크리스천 NOW>을 진행하고 있어요. 역사와 사회에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방송이에요. 그동안 유경재 원로 목사, 한완상 전 부총리, 김동호 목사, 손봉호 교수, 이만열 교수, 송강호 박사, 가수 홍순관, 양희송 대표 같은 분들을 모셨어요. 용산 참사 가족분들을 만나기도 하고 고은 시인을 모시기도 했죠.

이 방송을 하게 된 계기는, 첫째, 지난 학기에 숙명여대에서 제가 맡은 일이 명사 초청과 토론대회였어요. 방송 진행은 학생들을 위해 좋을 거라고 생각했죠. 둘째, 작년 9월쯤에 CBS TV 김동민 PD가 찾아왔는데, 피디님 이력이 맘에 들었어요. 용산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서 상도 받았고, 독거노인들, 특이한 병에 걸린 환자들 얘기를 많이 찍은 분이셨어요. 셋째, 해야 할 얘기를 할 수 있는 방송이었어요. 방송 원고에서 오프닝하고 클로징 멘트 넣는 부분은 백지로 와요. 진행하면서 하고픈 얘길 할 수 있었어요. 넷째, 실은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이 방송을 통해 가 포 눈 눌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죠. 시인 고은 선생님 말씀처럼 진리는 변방에서 태어나요. 공자는 어린 세습 무당의 사생아였고, 석가의 나라 카필라바스투는 조그만 성읍국가였다죠. 예수의 고향 나자렛은 그야말로 핍박받고 소외된 천한 두메였지요. 그 예수께서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18)

예수님께서 힘주어 전하신 메시지예요.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와 눈먼 자, 그리고 눌린 자를 조망하는 방송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가포눈눌과 함께

용산 미8군 근처에서 자랐어요. 주변에 미군과 동거하는 양색시가 많이 살았죠. 미군들이 친구들한테 글러브를 주고 권투시합을 시킨 적도 있어요. 이기는 애한테는 시가 담배를 주었죠.

이후 아버지께서 동대문에서 천장사로 큰돈을 버셨어요. 후암동에 삼층집 짓고 윤택하게 살았죠. 잔디가 깔려 있고 작은 연못도 있는 집이었어요. 때로는 너무 잘 살아 부담스러웠어요. 국민학교에 고아원이나 가난한 집에서 오는 친구들도 있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집을 노아의 방주처럼 생각하셨어요. 실제로 1층에는 동물을 많이 키우셨죠. 오리, , , 거위, 고양이 같은 것들도 키웠어요. 2층에는 가족이 살았고, 3층에는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기도실이 있었어요. 어머니는 집에서도 방언으로 기도하셨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저는 순복음교회 금요 철야 예배에 자주 가곤 했지요. 그런데 그런 오순절 신앙이 대학 들어가서 송두리째 깨졌어요.

아버지가 큰돈을 만져본 경험이 있으셔서 당시 치러지던 큰 집회들의 재정부장을 자주 하셨어요. 갖가지 여의도 대형 집회에서 재정을 담당하셨고요. 저희 집에 유명한 목사들이 와서 회의를 하곤 했어요. 그러면 저는 2층 계단에서 몰래 그 분들 얘기를 엿듣곤 했죠. 그 때 실망을 너무 많이 했고, 결국 집을 나가 서대문에 있는 독서실에서 지냈는데 일종의 가출이었어요.

그런데 예순의 나이에 총신대 대학원에 입학해서 목사가 되셨던 아버지가 뜬금없이 시골 교회를 가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도시에서만 살았던 저에게는 충격이었어요. 부자로 사셨던 아버지가 나무로 불 떼고, 우물물 퍼 드시면서 파주 백석교회에서 목회를 하셨죠. 다음에 철원 평강교회에서 목회하셨어요. 아버지는 설교를 참 못하셨어요. 아버지 설교 듣는 사람들이 너무도 불쌍했어요. 이상하죠?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그 어처구니없는 설교가 그리워요. 제가 나이가 드니 아버지가 존경의 대상으로 바뀌었어요. 설교 이전에 제가 그렇게 살 자신이 없어진 거죠.

연세대학교 신학과 다닐 때, 제 신앙은 조금씩 민중 신학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어요. 학교 끝나면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고 토요일, 주일에는 교육전도사를 했어요. 연세대 국문과 대학원 다닐 때 성북감리교회에서 일했는데, 토요 학생 집회에 가면 학생들이 왜 전도사님 몸에서는 늘 최루탄 냄새가 나요?’라고 묻곤 했어요.

스물일곱 살 무렵, 전도사 할 때 신도에게서 심방 부탁이 왔어요. 그날 담임 목사님이 안 계셔서 대신 제가 갔어요. 길음동 하꼬방집에 소녀가 간질인지 거품을 물고 발작하고 있더라고요. 아버지는 옆에서 뻑뻑 담배만 피우고, 어머니는 제가 뭐라고만 하면 할렐루야! 크게 소리 지르는 거예요. 눈물이 나와야 하는데 눈물도 안 나오더군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쌀 조금하고 요구르트 한 줄 놓고 오는 것 밖에 없었어요. 비틀거리며 판자촌 길을 내려오는데 판자촌 낮은 처마에 긁혀 얼굴이 여기저기 까졌어요. 그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구조개혁을 할 수 없는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고, 사표를 내고 교회를 떠나기로 했죠.

그리고 나서 들어간 게 고() 김근태 선배가 있던 민청련이었어요. 많은 선배와 친구들을 만났죠. 과학부 장관을 했던 김영환 선배, 소설가 김영현 선배, 성공회대학 한홍구 형 등 지금 현실 정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민청련에서 특별 분과에 소속되어 이론을 토론하고 동원, 한솔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백민이라는 가명으로 책을 냈어요. 어느 날 도망치라는 연락이 왔어요. 그 전에 수배 된 적이 있고 불구속 되었지만, 이때는 결국 구속되었지요.

 

사자와 놀던 다니엘

취조받을 때, 자살할지도 모른다며 잠잘 때도 수갑을 채웠어요. 절박한 그 순간에 저를 지키던 경비병이 제가 기도하는 걸 보고 저한테 이 성경을 줬어요. 국제기드온 협회에서 호텔방에 두는 작은 성경이지요. 아버지가 그 협회 회원이었는데, 그때 부자들이 괜한 짓들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성경을 제가 읽기 시작했던 거예요.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검사도 만났어요. 검사는 저를 만나자마자 형사에게 수갑을 풀러주고 나가라 하고는 이렇게 말했어요.

일제 때 독립투사를 가둬야 했던 한국 검사의 마음을 아는가?”

그러더라고요. 검사는 저를 많이 도와주었어요. 국가보안법은 기소 기간 동안에 사적 접견이 안 될텐데, 자신의 사무실에서 부모님 면회를 시켜주기도 했어요. 저를 어떡하든 빨리 석방시키려고 변호사가 아닌 검사가 애써주셨어요. 사자굴에서 사자와 놀았다는 다니엘을 체험한 격이지요.

감옥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이때 얘기는 첫 시집 씨앗/통조림에 실려 있어요. 겨울 끝에서 구속되었다가 그해 가을 무렵에 석방되었지요.

20대에 정치 신학, 민중 신학, 해방신학을 접하면서 오순절 신앙의 반대 축으로 갔다면, 감옥에서 성경을 다시 읽고 나름대로 신앙의 균형을 잡았던 것 같아요. 아직도 제 속에는 오순절 신앙의 열정에 민중 신앙의 윤리가 섞여 있어요.

 

단독자의 삶

감옥에서는 할 일이 없으니까 문자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져요. 그때 독서를 통해 예수의 삶이 가장 위대한 삶이라는 판단을 얻었어요. 온갖 고전은 물론 레닌, 스탈린, 주체사상과 비교 안 될 예수의 삶에는 절대적인 단독성이 있었어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예수가 신이 아니어도 좋다, 죽어서 천국이 없어도 좋다, 단 하루만이라도 예수처럼 살면 의미 있겠다는 확신이 생기더라고요.

흔히 예수를 믿자라고 하는데요, 말만으로는 사실 공허해요. 핵심은 가포눈눌아닐까요. 나자렛이라는 변두리에서 태어나, 가난한 갈릴리에서 지내시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뒤에도 가장 먼저 가신 곳이 가포눈눌의 공간이었어요.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가시잖아요. 제자들한테도 갈릴리에서 만나자 하셨죠. 오늘날로 따지면 용산참사의 현장으로 가신 거예요.

물론 예수님은 부유한 사람도 만나셨죠. 니고데모, 삭개오, 아리마대 요셉처럼, 서울 시의원 같은 사람도 만나셨던 거예요.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만을 위해서 오셨다는 생각은 잘못된 거죠. 하지만 기독교가 가난을 외면한다면 그건 기독교가 아니겠죠. 감자탕 교회에 가면 노숙자들이 따로 밥을 먹지 않고 성도들과 함께 밥을 먹어요. 그리고 이발소가 교회 안에 있어요. 교회 밖에 나가서 이발을 해주는 게 아니고요. 주일에 병원도 있어요. 교회 안에요.

저는 가포눈눌의 마음을 품지 않은 그리스도인보다 가포눈눌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이 예수님 뜻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가포눈눌이 저한테 깊이 꽂혔을 때는 불법체류자나 노숙자들과 함께 지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아내가 당신은 노숙자들과 함께 지내는 삶을 5년 이상 하지 못할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부잣집에서 자랐던 남편의 한계를 아내는 알고 있었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인문학을 통해 사람들 생각을 바꾸는 역할을 하자.’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 때가 40대 초반이었어요.

 

김응교가 보는 한국 사회

철저하게 경쟁적으로 구조화 되어 있어요. 문제가 심각하죠. ‘1%의 경영진 정규직 비정규직 용역 아르바이트 노숙자로 구조화 되어 있어요. 내면적 계급사회가 됐고, 한번 낙오되면 거슬러 오르기 힘든 구조죠.

물론 인간사회에서 계급이 없을 수는 없죠. 무조건 모두 평등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최소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죠. 근데 이 사회는 약자에게 힘들면 죽어라라고 말하고 있죠. 살아있는 죽음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어요. 사람을 자본주의 체제유지를 위한 제물,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 보는 거예요.

함께 나누면 좋겠어요. 비정규직 이하는 사정없이 발로 차서 도저히 위로 건너오지 못하게 해요. 위로 올라갈 사다리를 치우는 거예요. 제가 강의하고 글 쓰고 방송할 때, 이 사회에 그늘/어둠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리곤 하죠. 사람들은 TV나 방송에서 빛의 세계만 보니까, 어둠의 세계는 없다고 생각하죠.

 

사이의 인문학

제가 혼신의 힘을 부어야 할 곳은 숙명여대 교실이에요. 그런데 대중 앞에서 했던 강의가 제 수업을 듣는 대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때가 많아요. 귀국해서 20101월부터 매달 셋째주 월요일에 홍대 근처 카페 바인에서 해온 와와클럽 인문강좌가 이제 3주년, 38회가 됐어요. 100회까지 할 수 있을지요(웃음).

1996년에 유학 갔던 일본에서도 와와클럽 같은 대중 인문 강좌를 했어요. 오사카에서 어떤 분 강연의 동시통역을 마쳤는데, 도쿄에 가는 차를 놓쳤어요. 어떡하나 하고 있는데, 강연장에 오셨던 어떤 여인이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 하셨어요. 근데, 갔더니 원룸이었는데 이 분이 야한 란제리를 갈아입어 아차 싶었어요. 그때 제가 30대 초반이었는데 다행히 그때 어떤 사내가 그 집에 왔어요. 그 남자가 함께 잔다는 거예요. 두 사람이 침대에 눕고 나는 소파에 누웠는데 잠이 오겠어요? 그런데, 둘이서 일본말로 뭐라고 얘기하더니 저한테 자기들이 불륜 관계라고 그러면서, 우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달력 뒷면에다 사인펜으로 아가서를 예로 들며 바람직한 성관계에 대해 설명했지요. 그랬더니 한번 자기들 업소에 와서 성경을 가르쳐 달래요. 실은 자기가 젊은 여자 열댓 명 데리고 있는 살롱 마마라고 그러더라고요. 다음 달에 그 업소에 가서 돈 벌러 온 미니스커트의 미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줬죠. 그랬더니 다음부터 매달 한 번씩 이런 얘기를 해달라는 거예요. 그렇게 시작한 밀알학당을 오사카, 요코하마, 히메지, 도쿄에서도 하게 됐어요. 인문학과 성경 얘기를 했죠. 주로 술집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많았고요. 어떤 데는 교회가 세워지기도 했어요. 요코하마에서 어학원으로 성공한 분이 교실을 제공해서 거기서 강연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대중과 만나는 것이 저한테는 일상이었어요. 대중들의 질문은 늘 실용적이고 현실적이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교실에서 말하면 학생들에게 도움이 돼요. 그리스 학문은 아고라에서 논쟁을 통해서 나왔죠.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도 그랬고요. 라캉은 정기적인 대중강연을 했고 그 강연록이 세미나라는 이름으로 출판되고 있지요.

 

사이의 존재

저는 사이의 존재예요. 작가는 골방에서 고독하게 글을 써야 하지만 그 전에 치열하게 사이에 있어야 하지요. 까뮈나 사르트르처럼, 골방과 거리 사이, 진보와 보수의 사이, 일본과 한국의 사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사이, 대학 수업과 대중 강연의 사이, 교회와 사회의 사이에서 저는 살고 있어요. 저한테 진짜 예배는 주기도문 끝나고 나서 예배당 밖에서 시작돼요. 노숙자들에게 다가가는 과정이 예배였어요. ‘가포눈눌예배의 장은 얼마 전 노숙자 분들과 함께했던 민들레 교실이라는 글쓰기 강좌에도 있는 것 같아요.

20대 말에는 노동자 문학회, 30대는 홈리스들과 밥 나누는 일, 40대 말부터 노숙인들 인문학 교실을 하곤 했죠. 제가 사이에서 숨 쉬는 건, 나를 위한 거예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문학작품의 공통점은 낮은 사람을 만나서 구원받는다는 내용이 핵심이라는 거예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도 로자가 소냐를 만나 구원받는 내용이고, 톨스토이의 부활도 네흘류도프가 카츄샤를 만나서 구원 받는 내용이지요. 레 미제라블에서도 장발장이 세 번의 인격 변화를 겪잖아요. 인간에 대해서 완전히 절망했다가 신부의 은촛대 하나로 사랑이라는 것이 있구나.’ 그걸 깨닫죠. 그리고 판틴을 만나서 구제를 깨달아요. 마리우스를 만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사회 개혁에 참여해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라는 말씀은 오늘날 이 사회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겠죠.

사이의 인문학자로, 가포눈눌의 인문학자로 살아가는 것은 저를 위한 것이에요. 방송을 통해서 어려운 분들을 많이 만나게 돼요. 용산참사 가족들, 쌍용차 가족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지극히 작은 자, ‘가포눈눌의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나 자신과 이 사회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교사들에게 문학이란

교실에서 종교적인 언어를 쓰는 분들이 계신 거 같은데, 저는 그런 방식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바리새인들이 주로 그랬어요. 예수님은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셨어요. “들에 핀 백합화를 봐라라고 하셨던 그런 언어관이 필요해요.

카프카 소설에도 그 안에 역설적으로 숨은 신이 있어요. 니체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렇고요. 풍성하게 즐길 수 있고 뭐가 문제인지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면 좋겠어요. 기독교인이 독선이 얼마나 무서운지, 남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독선적인 사람들은 잘 몰라요. 지금 우리 시대에는 이를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즐기면서 분석하고, 창조하면서 비평하는 힘을 기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늘에서 빛은 더욱 부드럽고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다.

  무성한 나무에 그늘이 들면 생명의 훈풍이 상그럽다.

  따가운 햇살도 연하디 연한 나뭇잎을 뚫지 못한다.

  나뭇잎은 햇살의 공격을 자양분으로 빨아들이고 그늘을 내려놓는다.

  상처를 받아들여 쉼터를 내려놓는 그늘은 경전이다.

   - 김응교 문학 에세이 그늘-문학과 숨은 신에서

 

그의 최근 책 그늘을 읽고 있으면, 문장 하나하나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이 비추고 있는 낮은 세상을 다시 주목하게 된다. 그가 부려 쓰는 문학의 언어가 겸손히 들어 올린 가포눈눌의 세상. 그 세상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