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_2012.03.
정병오 칼럼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2012.03.
“선생님, 대표 그만두면 뭐하실 거예요?”
대표 임기 만료가 1년 앞으로 다가오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묻는 질문이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솔직한 대답은 현재 주어진 일을 허덕이며 감당하느라 제대로 생각할 여유를 잘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는 명제는 늘 옳은 말이지만 ‘급한 일을 먼저 하라’는 현실에 늘 쫓기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내게 이 물음에 대한 절박함이 덜한 이유는 ‘복직’이라는 안전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안전판이라는 것은 경제적인 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교사 모임의 대표가 일정 기간 휴직으로 모임을 섬기다가 다시 교직으로 돌아가서 교사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 가운데서 교사로서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인도라는 의미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좋은교사운동의 상근자 혹은 대표로 활동하면서 갖게 된 교육과 시대를 바라보는 안목, 조직과 운동의 경험, 교육계와 교계에 형성된 네트워크 등을 활용해 새로운 사역을 개척하는 일이 요구될 때 이 일에 뛰어들 마음도 가능성으로 열어 놓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공동체적인 결정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가 남은 생을 교사로 헌신을 하든 아니면 기독 교사 운동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든 어떤 자리에 있든 관계없이 내가 삶의 모범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김진홍 목사님과 레슬리 뉴비긴 선교사다. 물론 이 두 분은 목사요 선교사의 삶을 살았기에 교사인 나와는 삶의 영역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이 두 분이 목회자와 선교사로 철저하게 삶의 현장에 뿌리박은 삶을 살았다는 것과 그 삶의 현장에서 얻은 안목을 바탕으로 시대의 문제를 풀어내는 원리를 세상에 제시하고 실제로 그 원리를 바탕으로 시대의 문제와 통 큰 싸움을 싸우는 삶을 살았다는 면에서 내가 본받고 싶은 삶이다.
목민 신학자 김진홍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김진홍 목사님은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붙들고 오랜 씨름을 했고, 예수를 만나고 신학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에는 청계천 빈민가에서 민중교회 사역을 했다. 그곳에서 빈민들과 삶을 나누며 가난으로 죽어 가는 그 사람이 곧 예수님임을 체험하며 총체적 복음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다가 청계천 빈민가 철거 때 빈민들을 이끌고 남양만 간척지에서 두레 마을 공동체 사역에 투신했다. 이곳에서 수많은 실패로 죽음의 위기까지 갔으나 이를 극복하고 이후 설교 사역과 장학 사업 등을 통해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 주며 복음으로 시대를 밝혀 주는 국민 목사로 인정을 받게 된다. 물론 그의 삶의 후반기 두레 마을을 떠나 서울 근교 구리에 교회 개척을 하고 뉴라이트 운동을 통해 정치 운동을 하면서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던 국민 목사로서의 위상은 추락하고 논쟁거리고 남게 된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너무 크다.
김진홍 목사님이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지만 그는 그의 신학을 ‘목민 신학’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는 그가 젊은 시절 체험했던 한국 민중들의 애환과 한, 그리고 이 민중들의 영혼뿐 아니라 삶의 태도, 더불어 함께 사는 나눔의 공동체, 세계를 섬기는 국가적 비전에 이르는 총체적 복음을 담아내는 설교를 했고 이를 신학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설교와 신학화 작업은 민중들의 눈물을 직접 닦아 주며 목숨을 바쳐 사랑하고 아파하며 대안적 삶과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의 삶의 현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엄청난 독서를 통해 세계사의 흐름과 시대정신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연마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대학 4학년 때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가운데 남양만 두레 마을 김진홍 목사님의 집에서 1주일간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의 집 거실 벽면을 빼곡히 채운 책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는 그 힘든 노동과 거친 사역 가운데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노동과 독서, 기도의 균형을 잡으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과 지성, 영성이 버무려져 ‘목민 신학’이라는 신학적 개념이 나왔던 것이다. 다만 이 목민 신학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가 두레 장학회를 통해 길러 낸 신학자들과 각 분야의 학자들, 그리고 실천가들이 채우기를 바랐는데, 그의 삶의 굴절과 함께 이 에너지들이 신학으로 모아지지 않은 것은 그의 삶에 있어서나 한국 교회와 사회에 있어서나 너무 큰 아쉬움이자 손실이다.
레슬리 뉴비긴, 교회의 연합과 선교의 실천적 리더
레슬리 뉴비긴은 김진홍 목사님에 비해 한국 교회에 많이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20세기 세계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 분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대학 시절 회심을 하고 인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그는 비록 성공회 교회 소속 선교사였지만 선교지에 서구의 교파 교회를 이식해서는 안 되고 선교지 국가 안에서 하나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 하에서 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회중 교회 등 여러 교단을 묶어 남인도 연합 교회를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이 남인도 연합 교회의 사제로 섬겼다. 이후 국제 선교 협의회 총무를 하면서 선교는 교회의 사역이어야 하며 교회는 선교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 하에 국제 선교 협의회와 세계 교회 협의회를 통합시키는 데 핵심 역할을 한다. 그리고 세계 교회 협의회의 신학 위원회 위원으로서 당대 최고의 신학자였던 칼 바르트, 라인홀드 니버, 에밀 브루너 같은 신학자들의 신학들을 모아 내고, 세계 교회 협의회 총무를 역임하며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한다. 이후 다시 남인도 연합 교회로 돌아와 주교 사역을 마무리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서구 유럽이 다시 복음 전파가 필요한 선교지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 복음을 잃어버린 서구 사회의 복음화를 위한 신학의 정립과 선교의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레슬리 뉴비긴은 신학자가 아니라 목회자요 선교사였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선교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방향을 제시하고 온 인류를 향한 복음의 유일성을 변증하며, 세계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신학을 정립하고 이를 실현하는 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가 이러한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서구 사회가 아닌 선교지인 인도에서 선교에 헌신하면서 만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경험과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한 몸 된 교회에 대한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와 복음을 잃어버린 서구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그 회복을 위한 대안 제시 역시 아시아 선교사로서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저서들을 읽어 보면 선교사의 경험이 얼마나 그의 신학과 사유를 풍부하게 해 주었는지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렇지만 그는 전문적인 신학자로서의 훈련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선교와 목회 경험에서 얻은 통찰을 신학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세계 신학의 흐름에 결코 둔감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교와 교회 연합 운동을 할 뿐 아니라 거기서 얻은 경험과 통찰을 20여 권의 신학 저서로 남김으로 20세기 교회와 신학에 큰 공을 세웠다.
주어진 자리에서 동일한 삶을 살고 싶다
물론 나는 이 두 분과 같은 탁월성을 갖고 있지도 않고, 철저한 삶을 살아내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들처럼 유명해짐을 추구하겠다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만 나도 하나님이 부르신 교사의 자리에서 내게 주어진 아이들과 부대끼며 이들의 삶을 인도하기 위해 매해 최선을 다했고, 한국의 교육 현실과 이로 인해 고통당하는 아이들과 학부모, 교사들의 고통을 부둥켜안고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해 왔고, 기독 교사 단체들의 연합과 하나됨, 그리고 이 힘을 통한 한국 교육의 대안 제시를 위한 삶을 살아왔고, 또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하기에 향후 남은 인생 내 삶의 자리가 어디든 관계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량을 다해 현장성과 학문성이 겸비된,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하고 운동하여 변화의 열매를 만들어 가는 데 기여하는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