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히는 문, 열리는 문(2012.08)
정병오 칼럼
닫히는 문, 열리는 문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학 4학년 졸업을 앞둔 나에게 대략 4가지 정도의 길이 열려있었다. 그 중 하나는 교직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교사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그렇게 높지 않았던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국립 사대 졸업생에 대한 의무발령이 나던 시절이어서 많은 친구들에게 교직은 좀 더 나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보장해줄 수 있는 길을 모색하다가 정말 안 될 경우 돌아갈 수 있는 안전핀과 같은 개념이 강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나는 3학년 즈음부터 교직으로 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물론 교사로서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보다는 교직으로 가는 것이 낮은 곳으로 가는 길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길은 신학을 해서 목회자가 되는 길이었다. 이 역시 목회에 대한 강한 소명감을 느꼈다기보다는 선교단체 활동이나 교회 대학부 활동을 과하게 했던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해 보는 그런 수준이었었다. 특별히 3학년과 4학년 때 임원과 리더 역할을 하면서는 전공보다 선교단체에서 후배들을 돌아보고 가르치는 일에 더 집중하던 때라 당연히 이와 관련된 쪽으로 삶을 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담을 약간은 느끼고 있었다.
대학 4학년 여름에 만났던 국제기능인선교학교 역시 당시 내 삶속에 침투해 나를 강력하게 사로잡았던 부담이었다. 가정의 돌봄을 받지 못해 방황하거나 심지어 범죄의 길로 나가기도 했던 사회적 소외계층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복음과 기술을 가르쳐 기능이자 자비량 선교사로 파송하는 사역,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나를 지금까지 훈련시키셨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를 사로잡았다.
마지막으로 미련이 남은 길은 대학원에 진학에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물론 대학 공부를 하면서“저 분 밑에 들어가 학문을 하고 싶다.”는 교수님을 만난 적이 없고,“ 저분야를 파보고 싶다.”는 분야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학문의 은사가 크게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학문을 하는 것보다는 사회로 나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대학 공부의 맛을 조금씩 느끼게 되었고, 이러한 맛을 조금 더 체계적으로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은 늘 내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군종이 아닌 일반 사병으로
원래 대학을 졸업하고 군 입대 전까지 좀 쉬면서 후배들을 돌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찾아온 것은 교직 발령이었다. 그래서 2개월 반 정도 교직 생활을 하다가 군에 입대를 했다. 6주 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위해 대기하던 중 나에게 처음 다가온 기회는‘군종’보직이었다. 자대 배치를 위해 연대에 대기하는 기간에 연대 교회와 사단 교회 예배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두 교회 군목 목사님들 눈에 띄었고, 마침 두 교회 다 군종들이 제대할 시점이 얼마 남지 않아 후임을 구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두 군목 목사님이 차례대로 나에게 군종 제의를 했고 실제로 나를 군종으로 데려가기 위한 행정 절차를 밟아갔다.
이러한 몇 주 동안 이어지는 군목 목사님들과의 만남, 군종으로서의 제안 등을 접하면서 내 마음 속에‘하나님이 나를 군종으로 부르셔서 이 기간 동안 내게 목회자로서의 소명과 자질을 키워 가시려나 보다’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나는 대학 시절 선교단체를 통해 목회자나 선교사로 나가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각 영역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 역시 하나님께 헌신하는 소중한 길이라는 생각을 분명하게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군대에서 군종으로 부르시고 이를 통해 목양의 훈련을 시킨다면 나를 목회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으로 알겠다는 기도를 했다.
그런데 연대와 사단의 군목 목사님들이 나를 군종으로 쓰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연대 내 다른 부서에서 나를 강력하게 요청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주일날 교회에 못 나가기도 하고 또 교회 나가겠다고 우기다가 심한 매를 맞기도 하면서, 또 동기들이나 후배들의 고민을 들어주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는 전형적인 기독교인 일반 사병으로서 군 생활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오히려 나는 하나님이 나를 목회의 사역이 아닌 일반 평신도로서 자신의 직업과 삶의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을 했다.
1년 기도의 결정을 뒤집은 한 마디
군 생활의 절반을 넘겼을 쯤 이었다. 대학 4학년 때 몇 차례 방문으로 관계를 맺었던 국제기능인선교학교가 소속되어 있던 본부 기관인 그루터기 선교회에서 회보가 전해왔다. 그리고 그 때로부터 주간 소식지와 월간 소식지가 매주 매월 날아왔다.그렇게 매 주 매 월 소식지를 받아 읽을 때마다 내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 학교와 그 사역을 섬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사로잡아 견딜 수 없었다. 그 학교로 간다는 것은 내 삶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남은 군 생활 1년 동안 새벽마다 이 기도제목을 붙들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1년의 기도 끝에 내린 결론은 학교에 복직을 하지 않고 국제기능인선교학교를 섬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대 후 바로 이 학교를 찾았을 때 김기열 교장 선생님으로부터“네 뜻은 너무 귀한데 이 사역은 거친 사역이기 때문에 네가 지금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학교로 복직하고 사회 경험을 더 쌓은 후에 와라”는 말씀을 듣고 부랴부랴 학교에 복직원을 냈다. 하나님이 내 삶 후반에 결국 이와 관련된 사역으로 부르실 수도 있지만 지금은 학교에서 내가 맡은 아이들에게 충실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
교직 생활 3년을 마치고 한국교원대학교 계절제 대학원 시험 자격을 얻자마자 바로 시험을 보고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 학교 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는 방학 동안의 대학원 공부를 통해 내 속에 미약하게나마 미련으로 남아있던 학문의 길에 대한 시험을 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원 공부는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학문의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분명한 확신만 더해주었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대학원 자체가 가진 문제라기보다는 당시 가정의 상황이나 기독교사운동을 갓 시작한 상황적 이유가 더 컸다. 그렇지만 나는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학문에 대한 미련은 접고 학교 현장에 충실한 기독교사의 삶과 기독교사 운동가로서의 길을 가라는 사인으로 받아들였다.
가지 못한 길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돌아보면 하나님은 대학 시절 나를 흥분시키거나 내게 강한 부담으로 다가왔거나 혹은 미련으로 남았던 일들에 대해서는 그 일이 귀한 일이지만 내가 평생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아 해야 할 내 일은 아니라는 분명한 정리를 해 주셨다. 그리고 그냥 내가 할 수도 있다는 정도로 생각했던 교직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 계속 여시고 나를 여기에 붙들어 주셨다. 이뿐 아니라 교직 생활 가운데 내게 교사로서의 분명한 소명까지 부어주셨다. 그렇지만 내가 흥분했고, 부담을 가졌고, 미련을 가졌던 이 일들도 나에게서 완전히 앗아가지 않으시고 내 삶의 일부로서 선물로 남겨주셨다. 그래서 내게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과 가끔 이 말씀을 나누고 은혜를 끼칠 기회를 주신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아픔과 부담을 남겨주신 덕분에 여력이 닿는 대로 이곳저곳을 섬기고 있다. 그리고 책을 읽고 공부하는 기쁨은 내가 유일하게 누리고 있는 유희이자 사치이기도 하다. 육을 입고 살아가는 인생의 한계를 잘 아시는 하나님은 어떤 길은 막으시고 또 어떤 길은 여심을 통해 한 인생을 가장 효율적으로 인도하시지만, 그 막은 길 가지 못했던 그 길 가운데 있은 부스러기들은 선물로 남겨주시길 주저하지 않으신다. 오묘하신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