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본질의 홍수 속에서 본질 살리기(2014.5)
정병오 칼럼
비본질의 홍수 속에서 본질 살리기
7년 만의 복직, 뭐가 달라졌나요?
7년 만에 학교에 복직해 보니 가장 달라진 변화는 학기초 업무가 엄청나게 늘었다는 것이다. 3월 첫 2주 동안 아이들에게 배부한 가정통신문만 50종이 넘는 것 같고, 그 중 학부모 회신을 받은 것도 30종은 족히 되는 것 같다. 그러니 이전에 학기초가 되면 매일 아침 자습 시간에 2-3명씩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던 시간은 도무지 가질 수가 없다. 하루에 평균 2개 정도 되는 가정통신문 회신문을 수합하고, 이를 가져오지 않은 학생들에게 재확인을 하다 보면 시간이 다 가버린다. 물론 이 회신문 중에서 꼭 필요한 것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신문은 만약의 사안이 터졌을 때를 대비해서 학교가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학부모의 회신을 미리 받아놓는 면피용 회신서들이다. 관료적 행정 체계 내에서 면피용 서류가 필요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를 학기초 담임의 그 소중한 에너지를 앗아가며, 담임과 아이들의 관계를 교육적으로 비본질적인 요소를 개입시켜 악화시켜가면서 해야 하는지 정답은 분명한데 현실은 점점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뿐 아니라 교육의 본질과 무관하거나 오히려 해치는 생색내기용 업무들도 많이 떨어진다. 교육과정 짤 때 각 단원별 인성교육 덕목과 어떻게 연계시킬 것인지 계획서를 내라든가, 수행평가 계획할 때 진로와 관련된 내용을 일정 비율 포함시켜 제출하라든가 하는 것들은 교사의 교육과정 편성권을 침해하면서 또 하나의 잡무를 만들어내고 있다. 여기서 자유학기제를 위한 수업개선 연수에 차출되어 갔더니 연수는 요약 속성으로 진행하고 교육감 참석 출범식을 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출장을 위해 수업을 앞당기고 아이들 종례도 다른 분에게 부탁하고 왔는데 교육의 본질을 벗어난 교육행정에 화가 날 뿐이다.
잡무의 홍수 속에서 교육 본질 지키기
그래서 학기초 반복해서 나를 다잡은 것은 ‘잡무의 홍수 속에서 교육 본질 지키기’였다. 일단 회신문 수합 등으로 인해 학생들과의 감정이 상하거나 담당자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학부모들에게 문자를 보내 최대한 원활하게 수합을 하고, 각종 제출 서류들 가운데 교육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성실하게 작성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은 재빨리 작성하는 등의 요령을 가지고 대응을 했다. 무엇보다 이 가운데서 학기초 내가 하기로 구상했던 것들을 빠지지 않고 실시를 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학급의 ‘공유된 약속 만들기’를 실시하고, 조·종례 시간에 ‘노래 부르기’를 꾸준히 실시하고, 가정방문도 토요일을 활용해 3월 내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하라고 내려오는 일들 가운데, 그야말로 잡무에 불과한 것들과 잘 활용을 하면 교육적으로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다. 그래서 동아리(계발) 활동에는 좋은교사운동이 작년부터 시도하고 있는 YGA(Youth Global Action)를 신설하고, 이후 이를 기독 동아리와 연계할 수 있는 끈을 만들기 위해 상설동아리로도 신청을 했다. 또 2학기부터 실시되는 자유학기제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인근의 교육 단체들과 연결하는 일도 하고 있다.
독서 동아리, 오! 괜찮은데!
그러던 어느 날 하나의 메신저가 내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선생님, 학급 별로 독서동아리를 만들어 운영해 주세요. 동아리 활동은 생활기록부에 기록이 되고, 소액의 재정 지원도 있습니다.” 하루에도 10여 개 이상 날아오는 메신저 가운데 하나였지만, 내 고민과 맞물려 있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복직을 하면서 올 해 꼭 해 보고 싶었던 활동 중의 하나가 아이들로 하여금 좋은 책을 읽게 하고 그 내용과 관련해 의미 있는 나눔을 통해 성장해가는 경험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는 지난 교직 생활에서 늘 마음에 있었지만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한 부분이었고, 최근 들어 더욱 필요성을 많이 느끼는 부분이었다. 그러기에 학교에서 제시해주는 이 틀을 잘 활용하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정방문을 통해 부모와 아이가 다 독서에 의욕을 가지고 있고 리더십이 있다고 파악된 남녀 1명씩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학생에게 1주일에 1권씩 책을 읽고 선생님과 함께 느낀 점을 나누는 독서 동아리를 운영해보자고 제안하고 함께 할 친구들을 모아 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남자 7명, 여자 5명 학생들이 자원을 해서 두 그룹의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우선 아이들과 어떤 책을 읽을지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이 다 가능한 시간대를 잡아 모임 시간도 확보를 했다. 내가 1주일에 2시간을 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긴 하지만, 이 독서 동아리를 통해 아이들과 어떤 나눔과 성장이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죽은 관행에 생명 불어넣기
15년 전, 고 이오덕 선생님과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선생님은 당신이 ‘글쓰기 연구회’를 창립하게 된 과정을 이야기하셨다. 원래 ‘글쓰기 연구회’는 경북교육청 산하에 있는 여러 관변 연구회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오덕 선생님이 회장을 맡으면서 이 연구회에 자신이 알고 있던 뜻있는 교사들을 멤버로 초청해 모임의 내실을 기하고, 이러한 흐름을 발전시켜 교육청에서 독립된 전국적인 자발적 교사 연구회로 발전시켰다고 했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고스톱을 치는 것은 허용했지만, 교사들이 모여 교육 이야기를 하면 불온시하던 그 어두웠던 시절에 교육청 관변 연구회를 활용해 자발적 교육 연구회를 키워간 탁월한 전략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따지고 보면 좋은교사운동에서 펼치고 있는 많은 교육실천운동 가운데도 좋은교사가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듯, 좋은교사운동의 교육실천운동들도 이미 우리 교육계에 있던 것들이었다. 다만 가정방문과 같이 한 때 우리 교육의 소중한 자산이었지만 내부적인 부패의 문제로 없어졌던 것을 열정과 소통의 정신으로 새롭게 의미부여를 하고, 일대일 결연과 같이 형식화된 것에 진정성을 심고, 학부모에게 편지 보내기와 같이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것을 조직화 운동화 했을 뿐이다. 물론 수업성찰운동이나 회복적 생활교육 같은 것은 우리 교육계에 없던 매우 창조적인 운동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도 우리가 순수하게 창조했다기보다는 교육 외부에 있던 좋은 자원들을 교사와 학교의 시각에서 재창조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관료 행정 업무의 재구성
학교에서 하고 있는 많은 일들, 그리고 교육청에서 내리는 수많은 공문들, 관리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많은 지시들, 이 가운데는 교육의 본질을 떠난 실적이나 전시를 위한 것, 탁상행정에 기반을 둔 것이 많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실적이나 전시, 탁상행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치부할 필요는 없다. 그 가운데는 교육의 본질과 연결된 부분들도 많이 있다. 그리고 혹 그것이 실적이나 전시, 탁상행정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교사 차원에서 잘 거르기만 하면 아이들에게 유익하고 교육의 본질을 살릴 수 있는 것도 있다. 이러한 지시와 전혀 관련되지 않는 것을 처음부터 시작하려면 힘들기도 하고 핍박에 처하기 쉽지만, 위에서 지시한 내용을 근거로 하되, 그 가운데 허식과 전시를 버리고 교육의 본질에 잘 접붙인다면 지지와 지원 가운데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교과서라는 박제된 형태로 내려오는 교육과정도 교사의 전문성으로 재구성을 해야 하듯, 그럴듯한 교육적 명분과 관료적 업적주의가 뒤죽박죽 섞여 교육을 혼미하게 하는 수많은 공문과 행사, 지시도 교사의 교육적 양심과 교육적 본질에 기반한 열정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대충하고, 어떤 것은 잘 따르고, 또 어떤 것은 나의 교육 철학과 잘 버무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좀 힘들긴 하지만 숨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그래서 무언가 열심히 하지만 그 가운데서 교육적 본질은 점점 희석되고 있는 관료화된 공교육 현장 가운데서 부름 받은 기독교사가 해야 할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