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종료/정병오 칼럼

세월호 속의 세상,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2015.06)

좋은교사 2015. 7. 7. 10:44

정병오 칼럼

세월호 속의 세상,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

 

지난 4월 말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해서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세월호 유가족 초청 간담회를 가졌다. 세월호 유가족 한 분과 세월호 유가족들을 지난 1년 동안 친가족처럼 도왔던 좋은교사운동 출신의 퇴직교사인 강영희 선생님을 함께 모셨다. 주일 점심 식사 후 교회당 내 책상을 치우고 의자만 큰 원을 두 겹 정도 만들어서 어른들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인들이 둘러앉았다. 1시간 아니라 10시간이라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할 말이 많은 유가족과 강영희 선생님에게 각각 3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만 드리고, 그 후 모든 교인들이 돌아가면서 그 분들의 이야기에 대한 반응 혹은 세월호 참사 관련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이러한 교인들의 이야기에 대해 다시 유가족과 강영희 선생님이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한 후 교인들이 돌아가며 유가족을 포옹해주었다. 이 때 유가족과 강영희 선생님에게 주는 편지를 준비한 가족들은 편지나 작은 선물을 전달하기도 했다.

 

함께 깊은 위로를 경험하다

처음에 이 간담회를 기획할 때는 초점이 유가족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아무리 외쳐도 메아리 없는 비정한 권력과의 싸움에 지쳐 쓰러지거나 상대를 향한 분노가 자신들의 마음을 황폐화시키지 않도록 작으나마 위로와 연대의 선한 에너지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러한 효과는 매우 분명해 보였다. 자식을 향한 절절한 부모의 마음을 마치 보상금을 더 받기 위한 떼쟁이로 왜곡시키는 현실과 세월호 침몰과 그 이후 구조 실패의 핵심 원인과 책임자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투쟁을 마치 정치와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것처럼 왜곡시키는 현실 가운데서 자신들이 가진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요구의 실체를 정확히 말할 수 있고, 또 이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교인들에 대한 생각은 그 다음 순서였는데, 교인들이 이 간담회를 통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았으면 좋겠다는 계몽적인 생각이 강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물론이고 한국교회도 모든 사회 현상을 정치이념화해서 이분법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워낙 강하다 보니 혹 이 간담회로 인해 불필요한 논란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함께 이야기를 해 보니 세월호 참사에 대해 각자가 가진 정보의 차이와 관점의 차이를 넘어 모든 교인들이 공통적으로 세월호 참사로 인해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들의 아픔에 대해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깊은 미안함, 그리고 이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는데 현실에 묻혀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깊은 부끄러움과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공적으로 표현함으로 인해 깊은 안도와 자유함을 받는 느낌이었다.

 

왜 교인들 영혼 속 깊은 양심의 외침을 외면하는가?

물론 세월호 간담회를 통해 교인들이 받은 안도와 자유함은 실제 삶의 변화가 뒷받침 없는 순간적인 감정의 표출로 인한 면피용 위로인 측면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내가 발견한 것은 세월호 참사라는 한국사회를 관통한 이 거대하고 충격적인 경험 앞에서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어찌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죄책감에 짓눌려있는데 교회는 이러한 교인들의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건드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회는 마치 세월호 사건이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이는 세상의 일이기 때문에 교회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듯이 침묵하거나,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큰 뜻 안에 있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슬픔에 머물러있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섭리와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품에서 자유와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는 영적 비약 혹은 영적인 환원주의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일을 정부가 하는 대로 맡겨놓지 않고 정부를 불신하고 항의하는 것으로 인해 자신들이 지지하는 보수적인 정치세력에 해가 된다고 보고 불편해 하고 이를 향해 유가족이 순수성을 잃고 정치화되었다고 단정해 버린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대다수의 한국 보수교회가 가졌던 이러한 태도는 아픔의 당사자인 세월호 유가족 가운데 많은 교인들로 하여금 신앙을 버리게 했으며, 세월호 참사를 안타까워하고 어떻게든 그들과 공감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호감을 더욱 잃어버리게 함으로 선교에 두터운 장벽을 쌓아갈 뿐이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러한 손실보다 더 큰 손실은 기존 교인들의 마음속에 영적 공허감이 커져가고 종교적 무기력감이 더 크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깊은 공감이 있고 이 가운데 진실과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로운 분노가 큰데 이에 대해 교회가 어떤 출구도 제시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낡은 이분법의 논리와 종교의 교리와 계율로 회칠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음성은 성도의 양심을 통해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실천은 있어야

성도들은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고 복음의 능력은 결국 세상 가운데 어떻게 반응하느냐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세상을 강타한 아픔과 눈물에 대해 철저하게 외면하거나 이분법적 영성으로 희석하고, 이념의 논리로 배제함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능력을 무력화시키고 교회를 세상으로 고립시켜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한국 교회의 끝없는 추락과 무기력증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물론 교회가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다 응답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응답하는 방식은 그 교회가 가진 신학에 따라 다 다를 수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를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통해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강도 만난 자를 반복해서 치료해주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방범등을 설치하고 순찰을 강화해 강도가 발생하지 않게 하거나 강도를 잡아 발본색원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바로 이 부분은 각 교회가 갖고 있는 신학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두 눈으로 똑바로 봤음에도 종교적인 이분법적 사고나 정결의례의 율법을 핑계로 못 본 것처럼 지나가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제시하고 있다.

 

그들의 아픔을 듣는 데서 시작하자

2014416일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 사건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해결되지 않고 우리 곁에 남아 있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의 믿음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아와 함께 장막을 치는데 있지 않고 간질병을 앓는 아들을 데리고 고쳐달라고 외치는 아버지의 부르짖는 현실 가운데 있다면 기도와 금식으로 치유에 나서야 한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와 금식은 유가족들이 왜 지금까지 광화문을 떠나지 못하고 삭발까지 하면서 울부짖고 있는지 그 이야기를 듣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유가족의 아픔을 통해 각 교인들의 마음속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모든 교인들이 함께 나누며 공통의 목소리를 분별해가고 그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으로 응답해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집회에 참석하거나 또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각 교회의 신학과 성도의 양심을 따라 하면 될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를 하자

우리가 속한 교회에서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를 진행해 보자. 여러 어려움으로 교회 행사로 진행하기 어렵다면 내가 속한 기관이나 구역 단위로 해도 좋다. 교회당이 아니라 가정에서 할 수도 있다. 어른들만 할 것이 아니라 자녀들도 같이 하면 더욱 좋다.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호의 아픔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 교회에게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와 같은 아주 작은 실천의 경험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복음의 능력을 회복시키는 새로운 계기가 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