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밤 자고 만나요
조혜정의 춘향골 아이들 15
열일곱 밤 자고 만나요
남원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산자락과 집들과 냇물, 눈앞 가까이 들어오는 가로수들을 바라보다 보면 문득 내 어린 시절과 만나게 되는 때가 있다.
“이제 어떻게 살아?”
부엌에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밤을 삶다가 엄마께서 흐느끼며 열 살 소녀였던 내게 물으셨다. 아빠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지 얼마 안 되던 그 무렵, 나는 엄마의 질문에 어떤 답도 해 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아카시아 내음이 저만치에서 다가와 내 몸을 감싸며 뜨거운 것이 목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예요, 우린 완전히 버려지지 않았을 거예요.”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의 은혜로 어렵게 교사가 된 나, ‘순간순간 그 은혜에 보답하는 좋은 교사가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아이가 있다. 여린 풀꽃 같았던 아이. 그러나 내 곁에 와서 지친 나를 일으켜 세워 주었던.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주었던 아이….
꽃이 피어도 서글펐던 3월
초임지 관사는 보일러를 켜도 외풍 때문에 자리에 누우면 찬바람이 쌩 하고 이마에 내려앉아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관사에서 지내며 고단한 학교 업무로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다 결국 충분한 기도의 과정 없이 재작년 갑작스레 현재의 학교로 전근을 왔다. 엄마가 계시는 전주에서 출퇴근할 것을 생각하며 내심 기대도 하였지만, 이 기대는 3월이 되기 전부터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
2월 말 새 학기를 준비하며 자주 학교에 나와야 했다. 운전을 못하는 나는, 전주에서 남원까지 가는 통근 버스(민영 관광버스) 편에 남는 자리가 없어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야 했다. 이른 새벽 시내버스를 타고 터미널까지 가서 남원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남원에 내려서는 또 학교까지 걸어가야 했다. 이런 일정은 통근 버스의 잔여석이 생긴 3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밤 10시가 다되도록 교실 환경 구성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 앉으면 등과 어깨가 방망이로 맞은 듯 욱신거렸다.
학기 초라 더없이 분주한데다 이전 학교와 다른 새 학교의 여러 가지 시스템들에 익숙해지기가 어려웠다. 학년 교육 과정 업무를 맡아 주 중에 몇 번씩이나 계속되는 회의에 참여하고 또 빠른 시일 내에 교육 과정을 완비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작은 학교에 비해 동 학년 모임, 학년 업무 담당자 모임, 전 직원 협의회 등도 많았다. 그밖에도 시시각각 주어지는 무수한 일들을 제 시간에 해결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더욱이 퇴근 통근 버스는 오후 4시 50분에 오기에 야근도 하기 어려웠다. 어찌 되었든 그 시간 안에 중요한 일을 모두 처리해야 했기에, 미로 같은 학교를 늘 동당거리며 뛰어다녔다. 그 때 어찌나 숨이 가쁘던지, 이러다가 심장병이 걸리는 건 아닌가 생각되어 서글퍼지기도 하였다. 그 사이 개나리는 피었다 지고 어느새 가지마다 연두 잎새만 남았다.
하나님 나라의 줄서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학교 체육 대회인 ‘도통 가족 축제’를 준비하게 되었다. 이전 학교에서는 체육 대회 대신에 가족 동반 걷기 대회를 하였기에 실제적인 체육 대회를 준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로서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눌려 왔다. 어릴 때부터 체육 시간을 가장 싫어하고 거의 모든 체육 분야에 재능이 없었던 나는 아이들을 잘 지도할 자신이 없었다.
우리 1학년은 미니 색동 우산으로 칠공주의 노래 <흰 눈이 기쁨 되는 날>에 맞추어 무용을 하게 되었다. 1반부터 7반까지 모든 아이들이 모여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날이면, 내가 체계적으로 잘 지도를 못해서인지 우리 아이들은 다른 반 아이들보다 줄을 빠른 시간 안에 바르게 서지 못했다.
그러면 조회대 앞에서 전체 아이들을 직접 지도하시는 선생님은 마이크로 크게 “저기 7반, 줄 좀 서세요. 어서 줄 서요, 7반! 7반 선생님! 빨리 아이들 좀 세워 주세요” 하고 몇 번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여덟 살 어린 아이들이 줄 좀 삐뚤어지게 서면 어떤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1학년 전체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 반이 그렇게 지적을 자주 받고 있으니 마치 모든 비난의 화살이 나를 향해 쏘아지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조여 왔다.
다급한 마음으로 나는 아이들에게 “빨리 좀 서! 뭐 하고 있어? 왜 선생님 말 안 듣는 거야?” 하며 큰 소리로 호통을 칠 때가 많았다. 그 무렵에는 밤에 잠을 자면서도 “7반! 7반!” 하며 앞에서 지적하셨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귓가에 울리기도 하였다.
연습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잠시 동 학년 연구실에서 선생님들과 차를 마시는 시간에도 가슴이 답답하여 조금도 입에 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교실에 와서 책걸상을 모두 교실 뒤로 밀쳐놓은 후 아이들과 다시 연습을 했다. 소심한 나 같으면 자꾸 화를 내며 무용을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서운해서라도 연습하기 싫을 텐데도, 진하와 도아는 마치 ‘선생님 마음 다 알아요, 열심히 할게요’하고 말하는 듯한 선한 눈빛으로 내 말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연습에 임했다. 심지어 정원이는 옆에서 계속 장난만 치는 남자 아이들에게 누나처럼 눈짓을 하며 “야, 니가 여기 와야지” 하며 어려운 대형(隊形)을 일러주기도 하였다. 그 모습들을 보며 미안하고 고마워 잠시 교실 밖에 나가 울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가만 들여다보면, 우리 아이들에게 바른 교육을 위해서 큰소리 낸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소리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부끄러운 담임 앞에서 우리 아이들은 지천에 눈부신 벚꽃보다 깊은 향기를 지닌 어여쁜 초목같이 자라났다.
단 하루 체육 대회를 위해 정확하게 줄 서는 연습이 도대체 무슨 그리 큰 의미가 있을까? 하나님 나라에도 이런 줄 서기가 있을까? 남들보다 재빠르고 반듯하게 줄서지 않는다고 질책을 받고, 또 남들의 가혹한 평가에 대해 압박을 느끼는 세상의 줄서기는 그곳에 없을 것이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편128:3)
이 말씀처럼 사랑하는 예수님과 한 가족처럼 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기쁨만이 그곳에 있을 것 같다. 왜 그때 나는 하나님 나라의 시선으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하나님께는 그 모든 것보다 귀한 우리 아이들을 그리고 나 자신을 그토록 힘들게 했을까?
풀꽃 같은 아이, 한 그루 나무가 되어
그해 내가 맡은 1학년 아이들을 떠올릴 때면 체육 대회의 기억으로 마음 한 켠이 여전히 미안하고 아려 온다. 그렇게 한 학기를 지내고 여름 방학을 맞았다. 금마에 있는 연수원을 오가며 2주간 연수를 받고 며칠 후 일직 근무여서 학교에 갔다. 교무실 우편함을 정리하다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유진이에게서 온 편지였다.
그래,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 반이 공부를 잘하거나 체육 대회에서 멋진 동작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정말 귀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하나 되고, 사랑으로 서로를 응원해 주며, 사랑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느냐 하는 것이다. 정말 귀한 것은 바로 내 눈앞에 있는 풀꽃 같은 우리 아이들 자체였다.
이른 아침이면 신발장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고 수줍은 듯 내게 다가와 살며시 인사를 하는 아이, 큰소리 한번 없이 늘 잔잔한 시냇물처럼 말하곤 하였던 아이, 가녀린 몸으로 감기에 자주 걸리기도 하였던 연약한 풀꽃 같은 우리 여덟 살 어린아이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작은 아이들이 곧 한 그루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학교생활에서 지친 나를 일으켜 세워 주고 지탱시켜 주는 힘이 되어 주었다는 것에. 편지를 쓴 자기 이름 대신 “방학 동안 좋은 하루 되세요”로 끝맺은 아이의 편지처럼, 어른인 내가 다른 누구에게서가 아니라 이렇게 어린 아이들에게서 큰 응원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열일곱 밤 자고 만나요
방학에도 오랜 시간 생활 기록부 작업을 하느라 바로 답장하지 못하고, 개학 후 나는 유진이가 그러하였듯 새하얀 편지 봉투에 엽서 한 장을 담아 아이 집으로 부쳤다. 아이가 좋아할 걸 생각하며, 우체국에서 돌아오는 내내 신이 났다.
초임지에서 방과 후 학교 관련 연구 학교 운영으로 매월 방과 후 학교 수강 신청, 출결 관리와 자유 수강권 업무를 맡았었다. 새벽까지 잠 못 자고, 늦은 밤까지 학교에 남아 일로 허덕이는 내게 한 선생님은 “선생님, 남는 것은 일이 아니라 아이들뿐이에요” 하고 말씀해 주신 적이 있다.
안 그러고 싶다고 매일 외치면서도, 여전히 아이들과 천천히 눈 맞춤하기보다 학교 일로 복닥거릴 때가 있다. 그때마다 그 말씀은 가끔씩 어릴 적 맡았던 푸른 아카시아 향기로 번져올 때가 있다. 우리 유진이를 생각하며 마음을 곧추세울 때가 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고 가까운 내일, 혹은 먼 훗날 인생을 살아가던 제자가 물어 온다면, 언제든지 ‘열일곱 밤 자면’ 만날 수 있었던 어린 날 그네들의 선생님처럼 허리를 숙여 아이 눈에 맞춰 말해 주고 싶다. 아니 내가 우리 아이들을 올려다보게 될 만큼 아이들이 자랐을 때에도 인생의 파도 앞에 흔들리는 아이 눈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대답해 줄 것이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넌 버려지지 않았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선생님한테 그러하고, 누구보다 우리 하나님께 그렇단다. 언제까지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