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2015.4)
정병오 칼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세월호가 가라앉으며 물 위에 떠오른 것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년의 시간이 지났다. 거의 온 나라를 마비시킬 듯한 깊은 충격과 슬픔, 자성의 침울한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진상규명을 막고 대충 넘어가려는 정부와 반대 세력들의 방해를 뚫고 특별법을 통과시키고 진상조사위원회를 힘겹게 발족시켰다. 물론 이 진상조사위원회가 제대로 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벽이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목숨을 건 투쟁과 국민들의 지지가 여전히 있기 때문에 최소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과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리라 예상이 된다. 지나치게 역동적인 한국 사회의 특성상 잊을 만하면 큰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에 아무리 큰 사건이라도 사건 발생 당시에만 냄비 끓듯이 끓어오르다가 금방 잊혀져버렸던 경험들을 떠올려 볼 때 세월호 참사가 1년이 지난 지금에도 국민들의 마음 속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만큼 세월호 참사가 이전의 여느 사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이러한 국민들의 마음을 잘 보여주듯, 올 1월 1일 한겨레신문이 광복 70년 특집으로 “광복 이후 일어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한국전쟁(15.5%)과 세월호 참사(13.9%)를 각각 1,2위로 꼽았다. 전체 세대를 통틀어 세월호 참사가 2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20대와 30대, 40대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1위로 나타났다. 국민들이 세월호 참사를 단지 304명이 희생된 하나의 사고로만 보지 않고 한국전쟁에 비견할 정도로 역사를 가르는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세월호 참사보다 더 많은 희생을 치르고 더 많은 역사적 파장을 남긴 사건들도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이러한 수많은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 가운데 세월호 참사를 한국전쟁에 비견할 정도의 역사적 사건으로 꼽은 것은 세월호 참사가 광복 이후 70년 동안 한국 사회가 정신없이 달려오며 이룩해온 한국 사회의 이면과 밑바닥과 직면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세월호와 함께 304명의 귀한 목숨들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그 동안 우리 사회에 가라앉아 있던 수많은 문제들이 물 위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또 우리 삶 가운데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한꺼번에 드러났을 때의 모습은 너무도 참혹한 것이었다. 국민의 안전이 아닌 통치자의 안전과 심기를 더 염려하는 정치, 그럴듯한 시스템은 다 갖추고 있지만 위기 상황에서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 무능한 행정, 경제적 이익을 위해 사람의 생명과 안전은 뒷전으로 하고 온갖 비리와 부정이 난무하는 연고주의 사회 구조, 자신이 처한 자리 가운데서 최소한의 자기 책임도 방기하는 무책임과 비윤리성, 그리고 자녀를 잃은 유가족의 울부짖음마저 정쟁과 이념의 잣대로 치부하고 뭉개려는 잔인성 등이 우리 사회의 민낯이었다.
교육당국의 비교육적 민낯
세월호의 침몰은 교육계의 민낯도 어김없이 드러냈다.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교육당국이 교육의 본질에 무관심하고 오직 정권과 기득권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는 일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죽음을 당하고 온 국민들이 충격과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이러한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고 이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교육이 해야 할 가장 기본일 것이다. 그런데 교육당국은 이런 가장 기본적인 것도 제시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가만히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나마 교사들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일어난 애도수업이나 계기수업의 움직임마저 적극적으로 제지를 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교육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혹 이러한 교육을 하는 가운데 아이들을 한 명도 구출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그 동안 우리 교육은 아이들이 실제 삶의 이야기에 접속해서 세상을 이해하고 아파하며 바꾸는 꿈을 꾸는 것을 차단하고 철저하게 교과서의 추상화된 지식을 주어진 그대로 암기하여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도록 하는 일에만 몰두해왔다. 이러한 교육이 가져오는 비교육적 병폐를 잘 알면서도 실제 삶을 이야기하고 아파하고 나누고 바꾸는 꿈을 꾸는 것이 정권의 안정성과 현재의 기득권 체제에 비판적인 의식을 길러줄까 두려워서 계속해서 교육의 변화를 거부해온 것이다. 세월호가 침몰 과정에서 이렇게 희생이 컸던 이유 중 하나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에 있었다. 이러한 세월호의 상황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세상의 진짜 삶과 접속하지 말고 교과서의 지식을 주어지는 대로 암기만 하고 있으라는 교육당국의 태도와 별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지시를 그대로 수행하면서 죽어갔던 세월호의 상황은 어쩌면 한국 교육의 단면을 보여주는 그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 아이를 위해 협력하는 경험의 부재
세월호 참사와 함께 또 하나 중요하게 드러난 교육계의 모습은 위기에 처한 한 아이를 놓고 제대로 협력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교육계의 모습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실종자들의 시신을 인양하는 과제와 더불어 75명의 세월호 생존 학생들을 돌보고 회복을 돕는 일이 큰 과제였다. 다행히 경기도 교육청과 단원고의 교사들, 지역사회와 여러 전문가 집단의 도움의 손길들이 모아졌고 그 덕분에 생존 학생들 가운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학생이 한 명도 없이 조금씩 일상으로 복귀해 갔다. 하지만 이 과정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고 수많은 불협화음과 갈등이 있었다. 우선 생존자의 학부모들 가운데 날카로운 감정을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으로 표출하는 경우가 많아 학교와 교사들을 움츠리게 했다. 그리고 학생들을 돕기 위해 투입된 공적 혹은 자원봉사 조직들은 의욕은 넘쳤지만 학생들의 필요와 정확하게 맞물리지 못해 겉도는 경우가 많았고, 자기 조직의 성과를 과도하게 내세우려다 학교와 학생들의 신뢰를 잃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리고 학교는 지역사회와 여러 자원봉사 조직들과 함께 일을 하는데 익숙지가 않아 이 모든 에너지를 잘 모아 학생들의 치유와 교육을 위해 실제적인 힘을 발휘하도록 조율하고 이끌어가는 일을 버거워했다. 이것은 그 동안 학교가 가정과 지역사회로부터 분리된 국가의 기관으로만 존재해왔고 한 아이를 놓고 국가와 가정, 지역사회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구심점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한계였다.
침몰하는 배 속에 내가 남겨둔 아이는 없는가?
세월호가 가라앉으면서 우리 교육계의 많은 문제가 드러나는 가운데 그나마 감사했던 것은 아이들과 끝까지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교사들의 모습도 드러났다는 것이다. 비록 교사들은 방송에서 들려오는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따라서 아이들을 통제하는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한계 내에서도 끝까지 아이들을 떠나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죽어갔다. 그들 덕분에 세월호 참사가 250명이라는 많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대형 참사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교사와 학교가 비난을 받지 않았다. 이는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높은 현실을 생각할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기에 세월호 참사 가운데서 아이들과 끝까지 함께 있으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교사 희생자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이제는 학교와 교사가 이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는 새로운 전기가 되도록 학교와 교사에 대한 신뢰 회복 운동에 더 박차를 가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교사의 일을 수행하면서 침몰하는 배 속에 아이들을 남겨두고 나만 살겠다고 빠져나오는 상황은 없는지 끊임없이 돌아봐야 할 것이다. 특별히 누적된 학력 결손으로 좌절하고 고통당하는 아이들, 양극화의 현실 가운데서 가정에서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 교사의 진액을 다 앗아갈 정도로 교사를 힘들게 하는 아이들을 만날 때 어쩔 수 없다며 버려두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비록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학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교사 개인의 힘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선은 침몰하는 배 속에 남아있는 아이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들과 끝까지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살리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