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종료/정병오 칼럼

정직한 글쓰기, 진실한 삶 살기(2012.10)

좋은교사 2014. 6. 3. 14:37

정병오 칼럼

정직한 글쓰기, 진실한 삶 살기

 

 

뜻밖에 주어진 기회

1990년 군 제대 후 복직한 학교는 강북에서는 꽤 소문이 난 부촌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 첫 담임을 맡았을 때 촌지문제가 나를 많이 괴롭혔다. 처음에 무방비로 촌지를 접하다 보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괜히 학부모와의 관계만 어색해지기도 하고 또 내 마음 속의 물질적 욕심이 자극을 받아 반응하는 것을 느끼며 나름대로 단호하지만 학부모와의 관계를 상하지 않는 방법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1년 동안의 촌지와 관련된 경험을 글로 정리해 그 해 말 내가 활동하고 있던 기독교윤리실천운동소식지에 투고를 했다.

그런데 그 글을 보고 월간 빛과 소금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존재하는 촌지의 실태와 그에 대한 대안을 담은 글을 빛과 소금시론코너에 써 달라는 것이었다. 순간 멈칫했다. 우선 빛과 소금은 당시 기독교계 최고의 잡지였다. 판매 부수가 많은 것은 물론이고, 당시 기독계에서는 최고의 지성인들이 필자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중반의 청년에 불과한 나에게 이런 최고의 잡지에 시론을 쓸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그야말로 영광이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 시론을 쓸 만한 내용이 없었다. 사회생활 초년병으로서 내가 경험한 촌지는 학교에서, 그것도 학부모와 교사 사이에서 오가는 촌지가 전부였다. 학교를 넘어 언론계, 의료계, 건축계, 공무원 사회 등에서 오가는 촌지나 급행료 등에 대해서는 대중매체를 통해 얼핏 들은 것 이상을 알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교육계 촌지 문제만 해도 비교적 부촌에 자리 잡은 한 학교에서 불과 7~8개월간의 고민과 실천이 있었을 뿐 그와 관련해 여러 다른 학교의 사정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고, 그 문제와 관련된 역사적 뿌리나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아쉬운 청탁 거절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속에서 몇 차례 망설임 끝에 나는 원고 청탁을 거절했다. 물론 당시에는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때 그 원고 청탁 거절은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때 원고 청탁을 수락을 하고 학교에서의 촌지 경험을 중심으로 글을 풀어나가되 내가 경험하지 않은 사회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다른 연구 결과물들을 참고로 해서 종합적인 촌지 실태와 대안 글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 분야를 계속 파고들어 정말 그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원고 청탁을 받았던 그 순간에는 내 속에 학교 현장에서의 촌지 문제를 제외한 다른 분야의 촌지 문제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이나 분노, 그리고 그에 바탕을 둔 연구나 고민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내 속에서의 분노 혹은 사랑의 동기 없이 유명한 잡지에 내 글을 실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동기에 의해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멋진 글을 썼다 해도 그 글이 온전한 내 글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여러 잡지에서 청탁을 받고 유명해진다 해도 그 유명함은 반석 위가 아닌 모래 위에 세워진 유명함에 불과할 것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인격의 성숙을 넘어 주어지는 부나 유명은 그 사람에게 독이 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물론 기독교 잡지에 글 한 편 싣는다고 해서 무슨 대단히 유명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실질을 넘어서는 유명함을 추구하고 그 맛에 약간이라도 안주해지려는 자체는 나에게 독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 삶을 통과한 글

20대 중반 빛과 소금시론원고 청탁 거절 이후 40대가 되어 좋은교사운동의 대표로 활동하기 전까지 유명 잡지나 신문에서 원고 청탁을 받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런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학급 문집과 학교 교지에 아이들을 위한 글들을, 교회 주보에 교회에 대한 고민이나 신앙적인 단상들을, ‘기윤실교사모임 회보기독교사신문’ ‘월간 좋은교사등에 기독교사로서의 고민이나 교육실천, 비전과 관련된 글들을 많이 실었다. 그리고 별로 유명한 매체는 아니지만 청소년들을 위한 QT 잡지나 교단 신문이나 잡지 등에 교육 관련 글들을 꾸준히 싣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글들은 내가 고민하거나 아파하는 가운데 했던 생각이나 내 삶의 무게를 실어서 실천했던 내용들이었다. 대부분의 글이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거나 같은 뜻을 가지고 모인 공동체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글이었다. 이 글 가운데도 나를 드러내기 위한 동기가 포함되어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동기보다는 내가 했던 고민과 얻은 안목을 나누고자 하는 동기와 함께 성장하고 같은 뜻을 품고 함께 가자는 격려의 동기가 주된 동기였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글들은 온전히 내 글이었고, 과장 없이 내가 헤쳐 나온 깊이 그 만큼을 드러내는 글이었다. 그리고 부족하나마 내가 쓴 글이 나와 분리되지 않고 성찰과 실천으로의 선순환을 이룰 수 있었다.

 

붙들고 또 붙들어야 할 원리

글쓰기 뿐 아니라 삶에는 늘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그 기회가 일반적으로 보기에 좋은 기회일수록 신중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로 맡을 수는 없지만 혹 정직하게 생각해볼 때 나 자신이 그 일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데, 그 일이 주는 이익이나 명예를 놓치기 싫어서 그 선택을 받아들이고자 할 때는 일단 보류하는 것이 좋다. 정말 그 일이 주께서 주신 일일진대 주께서 또 다시 기회를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어떠한 단계나 기반을 거치지 않고 큰 조직을 만들거나 거대한 프로젝트를 만드는 일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하나님이 그쪽으로 몰아갈 경우에는 순종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소명과 내 욕심이 뒤섞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붙들고 또 붙들어야 할 것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일을 맡기신다는 원리다. 물론 작은 일에 충성을 하는 것은 큰일을 맡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지금 내게 주어진 작은 일에 충실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가장 낮고 궂은일에 몸을 사리지 않고 섬기며,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내 주변에 있는 작은 일과 지극이 작은 자들이 당하는 피해에 대해 분노하고, 내가 수고하고 희생해서 고칠 수 있는 불의는 당장 고치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잘못된 문화와 관행을 바꾸어 나가는 일에 앞장설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아니하실지라도

물론 이렇게 작은 일에 충성하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 진실 되게 살아가도 이 삶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평생 이렇게 사는 삶만 주어질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왜 내게는 내 삶의 역량과 준비에 맞는 기회를 주지 않느냐고 화낼 필요는 없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일을 맡기고 안 맡기는 것은 오직 그 분의 영역이지 우리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은 일, 큰일의 구분도 우리의 구분이지 하나님의 구분은 절대 아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오직 그 분은 우리의 중심을 볼 뿐이다.

혹 작은 일에 충성하는 가운데서 큰일을 맡을 만한 역량과 기회가 주어져 거기에 맞는 큰일을 맡은 자들도 결코 자고해서는 안 된다. 내게 주어진 큰일은 작은 일에 충성한 대가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이고, 이 일 역시 나를 성화해 가시는 하나님의 한 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보다 훨씬 더 잘 준비되고 성숙된 자로서 여전히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 앞에서 늘 겸손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고 위선과 교만의 죄에 빠지지 않도록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주의하라는 말씀 앞에 날마다 되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