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현장의 선생님들이 좀 더 용감하게 앞서서 틀 바깥으로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지영석 미래교육특별위원회 지영석 위원장_2015.10)

좋은교사 2015. 11. 10. 16:04

현장의 선생님들이 좀 더 용감하게 앞서서

틀 바깥으로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영석 (미래교육특별위원회 지영석 위원장)

미국의 출판인, 기업인이다. 1961년 외교관인 부친이 미국에 근무할 때 출생하였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CEO의 비서직을 지내다가 Lightning Source 사를 설립하였다. 랜덤하우스 회장을 지냈고, 현재 엘스비어의 회장이며, 동양인 최초로 118년이 넘는 역사의 국제출판협회(IPA) 회장직을 맡았었다. 2008년 포브스 아시아서 선정한 성공한 재미동포 25인으로 선정되었다.[출처: 위키백과]

 

 

인터뷰, 정리_ 김진우, 사진_ 임종화

 

지영석 회장을 만난 것은 올 초 미래교육위원회 회의에서였다. 교육부에서 자문기구를 각계각층의 인사들로 구성한 것이다. 교육계 사람보다는 시민단체, 국제단체, 출판인 등 다양한 배경의 인사가 많았다. 취지는 대한민국의 교육을 새롭게 상상하기 위해서 교육계 안팎의 아이디어를 조합하여 새로운 미래학교를 실험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 싱크탱크의 지휘를 맡은 사람이 지영석 위원장이다.

그는 한국인으로 세계 최대의 출판사 엘스비어 회장을 맡고 있다. 1년에 300일 가까이 해외 출장으로 정신없이 바쁜 그가 왜 미래교육위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그냥 명망가들로 구색 맞추기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솔직히 들었었다.

첫 회의가 있기 며칠 앞두고 어떤 청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신이 지영석 회장의 멘티인데 회의를 앞두고 좋은교사운동이 어떤 단체인지를 소개받고 싶다고 했다. 비서도 아닌 사람이 자발적으로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의구심들이 지영석 회장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고, 그 속에는 가슴 뭉클한 사연들이 있었다.

 

삶의 터닝포인트가 있었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일단은 미국에 갔다는 것이 큰 전환점이죠. 중학교 3학년 끝나고 고등학교 진학할 당시 아버님이 외교관이셔서 아프리카 세네갈에 살았어요. 한국, 파리, 미국을 두고 고민하다 제가 공대를 가고 싶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가게 되었어요. 부모님은 세네갈에 계시고 저 혼자 미국으로 갔어요. 미국이 70년대 이민의 문이 열리던 때인데 제가 시기를 잘 만났습니다. 미국은 다름을 좋아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으로 저의 희소가치가 있었던 것이죠. 예를 들어 수업 시간에 토론을 할 때도 저의 독특성이 장점이 되었습니다. 예컨대 미국 헌법에 대해 토론하는데 저는 그들과는 좀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면 차별이 되는 겁니다. 미국은 차별화된 것을 좋아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좋게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속한 학교가 좋은 학교이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미국인의 차별적 태도는 계층에 따라 좀 다릅니다. 지식 계층은 색깔 차별은 없어요. 대신 어마어마한 차별을 하는데 실력 차별을 합니다. 아무리 돈 많은 집안사람이라도 대화가 안 되면 살그머니 쳐내요. 반면 세상을 보는 눈이 좁은 사람들은 굉장히 표면적 외모만 갖고 차별을 합니다. 저는 그런 차별을 받지 않았어요. 물론 개중에는 좋지 않은 태도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별로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내가 받은 게 너무 많기 때문에 그 정도는 받은 것에서 깔 수 있었기 때문이죠. 한편으로는 내가 어떻게 하면 저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괜찮지만 나보다 불리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받을 상처는 훨씬 클 테니까 나같이 운이 좋은 사람이 그런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잉그람씨를 만나게 된 것을 생의 중요한 경험으로 기억하시는데 그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대학가서 만난 분인데 저와 제일 친한 친구의 아버지셨어요. 생각해보세요. 19살 된 아이가 한국에서 유학을 와서 미국의 그 대단한 사람을 친아버지처럼 만나서 보호를 받고 기회를 받으면서 미국 사회를 뚫을 수 있었다는 것, 어마어마한 특권 아니겠습니까? 그분의 철학이 있었어요. 내 아들 친구는 나의 친구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제게 알려주신 것은 이 세상은 남의 세상이 아니라 너의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셨는데, 예를 들면 플로리다 팜비치의 누구 요트 위에서 열리는 칵테일 파티에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 보통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저에게 거기에 맞는 옷을 사 주셔서 제대로 입혀서 가족들과 함께 저를 데리고 가세요. 그러면 거기 온 사람들 눈에 띄잖아요. 백인 사회에 왜 저런 동양 아이를 데리고 왔나 하는 싫어하는 눈치가 있잖아요. 그런데 직접 저를 사람들에게 소개를 시켜주면서 이 아이는 내 아들이야.” 라고 말씀하세요.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시는 거죠. 저뿐만 아니라 많은 젊은이에게 그런 관심을 주셨어요. 그중엔 가난한 청년도 있었는데 전혀 차별하지 않으시고 말도 못하게 앞서가신 분이에요. 그것도 제일 인종차별이 심한 남부지역에서 그런 태도를 가지신 거죠.

 

잉그람씨의 배경이 궁금하네요.

4대째 부유하게 곱게 자라신 분이신데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그걸 지렛대로 삼아 세상에 좋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해야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사신 분이세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제 생각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어요. Mrs 잉그람 씨는 참 위인이세요. 그분이 들어오면 모든 시선이 그 쪽으로 가요. 물론 미인이시기도 하지만 그걸 떠나서 마치 자기 주위에 빛이 그 쪽으로 오는 것 같은 아우라가 있어요. 누구하고 이야기해도, 어린이와 이야기해도, 국가 원수와 이야기해도 품위가 있고 따뜻하신 분이세요. 누구든지 접근해서 부탁해도 그걸 다 받아주세요. 살아 있는 크리스천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의 영향이 가장 크지 않았나 싶어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태도가...

Mr.잉그람이 1995년에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을 교회에서 미국식으로 했었어요. 앞에 두 줄은 가족들이 앉는 곳이고, 자리가 다 찼는데 뒤에 3줄을 아무도 못 앉게 비워 놓는 거예요. 그래서 성가대가 들어오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나중에 거기 앉을 사람들이 오는데 전부 젊은 흑인들이었어요. 많아봐야 30대 초반의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고 여쭈어 보았어요. 알고 보니 잉그람씨 댁에서 일하는 요리사, 기사, 정원사들의 자식이래요. 1960년대 초부터 집에서 일하는 사람의 자녀들이 대학을 가겠다고 하면 비용을 다 대주신 거예요. 그게 수십 명이었던 것이죠. “대학을 가라, 대학을 가서 너의 운명을 고쳐라, 비용은 내가 지불하겠다.”라고 하신 거죠. 그런데 장례식 끝나고 다 돌아갔는데도 아무도 그걸 몰랐었어요. 절대로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그런 일들을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잉그람씨로부터 받은 삶의 교훈은 어떤 것들입니까?

교육은 책에서 배우는 것도 있지만 사람에게서 배운다는 것입니다. 제가 졸업하고 회사를 찾을 때 연봉, 직책을 따지지 말고 보스를 찾아가라는 것을 알려주셨어요. 제가 당시 American ExpressP&G를 놓고 고르고 있었는데 P&G가 연봉이 2배에 5년간의 계획을 제안했습니다. American Express는 연봉은 절반이고 그냥 회장 비서실장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가 지난 4년 동안 5명이 교체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잉그람에게 이 쪽이 2배를 더 주니 이 쪽을 가겠다고 했더니 그분이 웃으시며 그 액수의 차이는 나중에 뒤돌아보면 반올림해서 떨어져나갈 숫자라고 하시며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너를 제일 잘 가르쳐줄 선생님을 찾아가라고 했어요. 사람은 사람한테 배우는 것이지 사람이 책에서 배우는 것은 힘들다고. 그 가르침이 제 멘토링의 제일 원칙이 됐어요. 젊은 사람을 만났을 때 모든 결론은 그 쪽으로 가요. 사람 보고 해라.

 

많은 청년들의 멘토로 돕고 계시는데 멘토링을 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제가 막내거든요. 그래서 동생이 없어서 밑에 아이들 동생 삼고 싶은 기분에 시작한 거예요. 저보다 어린 아이들이 미국 유학에 대해서 물어보면 대답해주면서 시작이 되었죠. 다른 부모님들이 저를 모범생으로 생각해서 너 그 형한테 가서 듣고 와라라고 말씀하셔서 제가 그 친구들에게 대답을 해 주면서 연습한 것들이 지금 하고 있는 멘토링이 된 거예요. 그런 아이들을 하나씩 가르치기 시작해서 400명이 넘게 된 거죠. 젊은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은 키우면 좋겠다 하는 아이들은 제가 가만히 못 있어요. 무리하면서 또 멘티를 삼는 거죠. 바쁜데 어떻게 다 소통을 하냐고 물으시는데, 이메일, 카톡, 문자, 전화도 하고, 가끔 가다 만나서 이야기하죠. 기회가 날 때마다 스케줄에 그들과 만날 시간을 다 집어넣죠. 어제도 다섯 명과 만났어요. 이제 사업은 오래 하면서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어요. 구조도 있으니까 저는 제가 할 일만 잘 하면 되는 거죠. 또 이 자리에 오게 되면 한 가지 좋은 것은 유연성이 있어요. 오늘은 11시까지 회의 잡지 말라고 하면 그때까진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내 시간이 있고 어느 부분은 남을 위한 시간이 있으니까 그걸 만드는 거죠. 하루에 4시간 자니까 시간이 많아요.

 

최근에 만난 멘티는 어떤 아이입니까?

어제 만난 아이가 10년 동안 키운 아이예요. 얼마 전 약혼녀를 데려와서 허락받겠다고 찾아 왔더라고요. 얼마나 좋아요. 선생님들은 그런 경험이 많으시겠지만 저는 선생이 아니기 때문에 제 학생이 그렇게 커서 그런 인생 과정을 지날 때 저를 포함시켜 주는 게 너무 고마워요. 그 학생은 미국에 유학을 왔는데 좋은 대학에 입학 소식을 받은 다음 날 뇌암 판정을 받았어요. 그래서 마지막 학기를 공부를 못 끝내고 치료를 받아야 하니까 그러면 대학 입학도 무효가 되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열심히 뛰어가지고 대학의 양해도 받고 해서 입학이 되도록 했어요. 그 친구는 자신이 당한 경험 때문에 암치료 연구를 하고 싶다고 해서 갔어요. 제 자식 하나를 잘 키우는 것도 기분이 좋지만 그런 아이들이 잘 되면 정말 자식 400명을 더 둔 기분이예요.

한 번은 2002년도에 한국 와서 랜덤하우스 코리아를 만드느라 자주 왔다 갔다 했는데, 그때 제가 한국 아이들을 입양하려고 잘 아는 사람한테 소개받아서 고아원에 다녔어요. 애들하고 놀아주느라고. 그러면서 정이 든 아이들이 있어요. 근데 입양 조건이 안 맞아 실패했어요. 그래서 그냥 거기다 두고 후원하며 키웠어요. 거기 역사상 처음으로 아이 둘 다 대학을 갔어요. 그 학생이 12, 13살 때 만나서 14년 됐죠. 교회 다니면서 사회 생활 잘 하고 있어요. 14년째 키우고 살다 보니 친자식 이상으로 여겨져요.

그런 스토리를 이메일로 가지고 있는데 누가 그걸로 책을 만들겠다고 해서 절대 안 된다고 했어요. 내가 한 가지 반드시 지켜야 할 것 중 하나는, A가 내게 한 이야기를 절대 B에게 하지 않는 거예요. 대신 필요하면 AB에게 소개시켜줘요. 몇 단계 더 나아가서 어떤 일들이 있냐면 그 사이에서 제가 네트워크를 만들어줘요. 저 혼자서는 힘드니까. 예를 들면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러이러한 꿈이 있는데 도저히 이 꿈을 성취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면 아무개가 있는데, 소개를 시켜줄 테니까 얘기 좀 해봐, 해서 소개시켜 주면 100% 서로 도와주면서 가게 돼요. 400명 중에서 제가 연락하고 있는 건 300명 조금 넘거든요. 그중에 2/3는 자기가 또 멘토링을 해요.

제가 제일 자랑스러운 스토리가 있어요. 작년 1월에 방송이 나갔잖아요? 저는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방송 나가는 걸 못 봤어요. 근데 두 시간 사이에 이메일이 200통이 왔어요. 어떻게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이 방송 봤습니다. 저도 멘토링해 주십시오하는 게 200통이 왔어요. 그게 2주 지나서 2,400통이 되었어요. 거기서 제가 배운 게 첫째, 한국의 젊은 사람들이 굶주려있구나, 여기에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나는 이 사람들 절대 다 할 수 없다, 다른 구조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자세히 들어보자 해서 4월 초에 한국에 왔을 때, 200명에 한 사람씩 랜덤으로 찍어서 20명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잠실 파스쿠치에 930분부터 1130분 사이에 있을 테니까 오고 싶은 사람들은 와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하니까 9시에 다 모인 거예요. 두 명은 제주도에서 날아오고 광주에서 오고 곳곳에서 온 거예요. 서른아홉 살 된 두 아이 아빠도 있었고 고등학생도 있었고요. 저는 그냥 캐쥬얼하게 커피 마시면서 얘기할 줄 알았는데 질문할 걸 다 써서 왔더라고요. 제가 감명을 받았어요. 저는 시간이 되어서 떠났는데, 이 친구들이 모임을 만든 거예요. 처음 본 사람들이 서로요. 그 중 10명이 꾸준히 모였어요. 말이 되는 이야기예요? 저도 처음 만나고 서로도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 즉석에서 모임을 만들어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걸로 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11월에 왔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밥을 사주겠다고 해서 모였어요. 그중에는 아시아나 스튜어디스도 있고, 파이낸스 컴퍼니에서 잘나가는 젊은이도 있고, 학생도 있고 섞여 있어요. 서로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배경도 다르고 연배도 다른데 말이죠. 그래서 제가 던졌죠. 너희들도 그렇게 만나지 말고 무브먼트를 하나 만들어라. 이 대한민국을 움직일 수 있는 무브먼트를 만들어라 라는 과제를 던졌죠. 그래서 걔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별의별 걸 다 생각한 거예요. 노인들에 대한 것을 할지, 탈북자에 대한 것을 할지, 신체부자유자들을 위한 것을 할지 고민을 한 거예요. 단 조건은 10명을 먼저 파일럿을 하고 거기서 배운 걸 가지고 100명을 만들어라, 그리고 거기서 다시 1,000명을 만들어라, 그러면 첫 2년 동안 들어가는 돈을 다 후원해 줄 테니까 해라, 해서 시작했어요. 그게 작년 1219일이예요. 모여서 이건 안 된다, 된다, 토론만 하니까 제가 3월에 서울에 들렀을 때 투표로 골랐어요. 뭘 골랐냐면 방황하거나 어려운 중고생들 멘토링하는 걸 골랐어요. 자기들이 다니는 교회 등을 통해 소개를 받아서 지금 5명을 모아서 프로그램을 시작했어요. 이게 다음 주면 끝나요. 1기가 끝나요. 그럼 소풍 갔다가 졸업시키고 2기가 시작돼요. 1기에서 배운 걸 반영해서 수정해서 개선시켜서 하는 거죠. 그런 걸 보고 한국 젊은이들에 대한 인식이 무지무지 긍정적으로 되었어요.

 

젊은 시절에 갑자기 쓰러져서 죽음을 생각하게 된 적이 있으시다구요?

대학교 졸업반 때 밥 먹다 말고 쓰러졌어요. 뇌암이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보니 오진이었지요. 쓰러진 건 뇌 종기 때문이었고요. 그때가 왜 터닝 포인트냐면, 내 자신의 약함을 인식시켜줬고, 몸이 튼튼해야 정신이 튼튼할 수 있다는 걸 배웠죠. 두 번째는, 나란 사람이 억세게 운이 좋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병원에 가 있는데 마지막 학기 수업을 그렇게 빼놓고 어떻게 졸업을 해요? 낙제하죠. 제 친구들이 카세트 테잎을 사서 제가 듣는 수업에 가서 다 녹음했어요. 매일 노트도 써서요. 오후 4시에 클럽에 모여서 하루에 한사람이 다 모아서 들고 기차를 1시간 40분 타고 와서 배달해주고 갔어요. 병원에서 공부하라고요. 5주 동안요. 그리고 6시가 되면 한 아이가 저한테 전화를 해서 격려 전화를 하는데... (이 대목에서 지영석 회장은 눈물이 북받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복을 받았어요. 그런 복을 받고 자랐어요. 그러니 안 줄 수가 없잖아요. 이렇게 받고 자랐는데. 나이 20살 된 젊은 애들이 그렇게 자기네들이 스스로 모아서 매일 전화하고 매일 노트하고 카세트 테잎을 들고 와서 졸업해야 한다고 해주는 그런 너무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또 젊은 나이에 죽음을 생각해보는 시간도 되었죠. 언제 돌아갈지 모르니까 그때까지 떳떳하게 살아야 하겠다. 다 끝난 다음에 저 내년에 할 계획이었는데요 라고 핑계대고 싶지가 않아요.

 

이쯤해서 화제를 교육 문제로 옮겨 왔다. 삶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원래 예정보다 많은 시간을 써서 정작 교육문제를 이야기할 시간이 부족했다.

 

미래교육위원회 초청에 응하셨는데 그 과정은 어떠셨나요?

너무 뜻밖이었죠. 첫째로는 저는 교육 전문가가 아니잖아요. 교육에 관심이 있고 교육에 관계되는 공부를 하는 것은 있었지만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왜 그러시나 했어요. 더군다나 저는 한국 시민도 아니고요. 조동원 위원님이 KBS 방송을 보고 다음날 아침에 네이버 검색에 제 이름이 1번으로 떠서 알아보고는 제가 지식산업에 종사하고 있고 하니까 부총리께 소개를 해서 만나보자 해서 1월 초에 뵌 거예요. 그때 제가 말씀 드린 게 저는 사람을 보고 하니까 황 부총리께서 뜻이 있으시고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는지 평가를 해보고 대화를 해보고 했는데, 들어보니 정치적으로 할 수 있는 만큼까진 하실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수락한 거예요. 근데 하고나서 보니까 아는 사람이 왜 그런 걸 하느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조용히 하는 것이기 때문에 끝날 때까지 눈에 나타나진 않을 거라고. 너 그거 나중에 정치하라고 들어오라고 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알잖냐고, 난 절대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정치하면 내 개인생활이 깨지니까 절대 안할 사람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뒤돌아 봤을 때는 90%는 결정을 잘했다고 생각하고 10%는 후회되는 게 있어요. 90%라는 것은 참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는 거예요. 이 기회에 저도 정말 많이 배웠어요. 300~400명이랑 1:1로 대화를 했어요. 학부모, 학생, 교수님들과 300건 이상 인터뷰 했습니다. 참 배운 것도 많고 좋은 사람 만났고, 결과가 바로 반영이 될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 현재 변화가 올 준비가 되어있구나, 라는 걸 느끼고 가기 때문에 90%는 만족합니다. 10% 불만족인 건, 참 너무 힘들다, 고치기 참 힘들다, 참 복잡하다, 걸리는 게 많다, 기득권 참 세다, 이런 것 때문에 곧바로 실천에 못 들어가는 게 아쉬워요. 그런데 이것은 Street People, 국민들이 힘을 받쳐줘야 해요. 우리 애들은 다 컸지만 이건 해야 한다, 또는 내 손자가 되기 전에 고쳐놔야 한다, 우리 자식도 좀 혜택을 볼 수 있게 빨리 실행해주십시오, 하고 밀어야 정치인들이 움직일 거예요. 자기들이 먼저 움직일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너무 어려우니까. 이걸 건드린다는 건 정치적인 자폭이잖아요. 근데 건드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해요. 그러려면 정치성을 없애고 한쪽이 들고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해요. 양쪽이 일시에 다 이걸 해야 한다고 나와야죠. 이걸 비판을 못하게. 서로 비판을 못하면 이슈를 비판할 수 있어요. 그럼 우리나라는 잘되는 거예요. 그런데 한 쪽 당이 다른 쪽 당을 공격하면 자기들끼리 싸우는 거예요. 이러면 이슈는 발전을 못하고 이상한 길로 가버려요. 분명히 이건데 나중에 둘이 싸우다가 보면 다른 게 나와요.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이 다음 대통령 공약이 둘 다 비슷하게 나와야 해요. 그래야 둘이 안 싸우고 이슈를 가지고 미래교육은 이래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에 집중하게 되요.

 

위원장님 보시기에 한국교육에 중요한 이슈나 과제가 어떤 거라고 보십니까?

저는 네 가지로 보는데요. 우선 다양함에 대한 존중과 둘째, 선택입니다. 한 줄로 세우지 말고 이 줄도 서고 저 줄도 서고 할 수 있는, 학생과 부모와 교사와 교육가가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필요하다는 거죠. 지금도 있죠. 일반학교가 있고 특목고, 특성화고도 있지마는 그 정도가 아니고 그 학교 안에서 선택이 있는 그런 교육, 학교가 아니고 교실 안에서 선생님이 수학을 가르쳐도 자기 스타일로 그 반의 학생에 맞춰서 가르칠 수 있는 선택이 있어야 하죠. 그것을 위해 개인화(customize)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걸 1:1로 볼 필요는 없고 한 교실에서 수준에 맞게 잘 가르치면 되는 거예요. 근데 걔들을 다 모아서 획일적으로 가르치면 얘들은 자고, 얘들은 포기해버리잖아요. 낙인효과가 없게 해야 해요. ‘왜 우리 애들 여기 들여보내요, 우리 애는 특별반에 가서 서울대 가야한다.’ 이게 아니고, ‘우리 애는 저기 집어넣지 마세요. 여기 들어가야 잘 배우고 행복하게 배우고 자기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는 인식이 될 때까지 25년이 걸리거든요. 그런 교육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다양성, 선택, 다음에 국제화입니다. 왜냐하면 어마어마한 중국의 힘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그걸 어떻게 감당해요. 그리고 일본이 있죠. 자원이 없는 나라가 거기서 샌드위치 되어가지고 우리나라 안에서만 팔고 먹고 살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려면 세계를 조종해야 해요. 그건 다 머리로 해야 하는 거죠. 하려면 언어를 잘 해야 하고, 그 나라의 필요성을 파악을 해야 하잖아요. 세계적인 시민이 되려면, 자꾸만 바깥 세상을 알아야 하고, 소통이 되어야 하고, 그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국제적 마인드가 필요하죠.

마지막으로는 협력할 줄 아는 인성이 필요해요. 네 가지가 제일 중요한 원칙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그게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점에 흡수가 되어 있어야 해요. 철학이 관통되어야 하는 거죠. 그 네 가지에 동의를 하면 풀려요. 그것이 핵심이 돼가지고 거기에 무엇을 쌓는 기둥이 아니라 그냥 다 그 안에 시멘트처럼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공식을 드릴 순 없어요. 몇 개월 하는 동안 그걸 구상할 수는 없지만, 상향식으로 아이디어 있는 사람들이 철학을 가지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앞으로 10년 동안 배워가야 해요. 이건 통하고 저건 안 통한다 하는 걸 배워가야 하는 거죠. 자주 실패하되 빨리 실패하라, 이 구조가 안 되어 있는 게 교육이에요. 교육부가 쥐고 있지 말고 이것저것 해 보도록 많이 풀어줘야 해요. 그럼 우리나라 사람들 너무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수만 개의 아이디어가 나올 거예요.

 

주문형 출판이라는 개념을 맨 처음 창안하신 것으로 알고 최근에는 빅데이터를 가공해서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는 일을 개척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어떤 개념인가요?

완전히 IT. 빅데이터 분석하는 것이 옛날엔 없었죠. 근데 제가 전문출판을 하다보니까 출판은 팩트를 다루잖아요. 근데 예전엔 이 팩트, 저 팩트를 다 따로따로 봤어요. 그 연관성은 자기가 머리에서 만들었어요. 내가 5년 전에 읽었던 논문하고 지금 읽은 논문이 그래서 연결이 되는구나 했는데 이제는 너무 많으니까 다 읽을 수도 없고 연관시킬 수도 없으니까 기계로 돌리는 거예요. 기계로 돌려서 기계가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게 데이터 분석이죠. 그걸 하게 된 배경이 우리가 우리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콘텐츠가 너무 많아서 그걸 굴리다보니까 몰랐던 게 또 나오는구나, 이런 게 생기는구나, 해서 남의 것도 가져 와서 해 보자 해서 같이 하다 보니까 노하우가 생긴 거죠. 사람이 빨리할 수 없는 걸 기계화 시켜버린 거예요. 사람들의 사고 패턴을 집어넣어서요.

제가 10년 전에 부르짖은 것이 양손잡이가 되자는 거였어요. 우리의 근본은 콘텐츠 만드는 거다. 이건 절대 놓치면 안 된다, 계속 하자, 좋은 콘텐츠를 계속 만들어내자, 근데 거기서 끝내지 말고 이 콘텐츠를 이손으로 넘겨서 이손으론 자꾸 새로운 걸 만들자는 거죠. 우리가 농사를 해서 콘텐츠를 수확했다면, 근래에는 인터넷으로 내가 만든 감자 내가 팔면 돼요. 주문받아서 제가 보내면 돼요. 도매상, 소매상이 유통까지 하는 거예요. 그게 P to E(Paper to Electronic) 혁명인데. 제가 만든 건 S(Solution)혁명이예요. 농사짓고 가게 짓고 슈퍼마켓하고 식당을 한 거예요. 이 재료를 가지고 레시피를 가지고 쿠킹을 해서 팔기 시작한 거예요. 이 세 번째 단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출판업계에서 지영석이 죽고 나서 한게 뭐냐 할 때 “He created the S revolution” 이렇게 나올 겁니다. 컴퓨터를 돌리는데 하다 보니 어마어마한 결과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의과대학에서 쓰는 교과서의 대부분을 저희가 출판해요. 그리고 저널을 2,000종 넘게 내거든요. 근데 지금 사고가 나서 앰뷸런스를 보냈을 때 그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면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의 의료기록을 다 가져와요. 그 다음에 거기서 병원까지 오는 동안에 여러 수치들을 볼 거 아녜요? 그럼 그걸 다 집어넣어요. 그리고 엘스비어(Elsevier)에 있는 의학지식을 다 가져와요. 그럼 Solution이 됩니다. 그럼 그게 의사에게 전달이 돼요. 이 사람은 오자마자 다리부터 고정하고 주사를 놔야 하는데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무엇을 하면 안 된다, 이런 게 나오죠. 근데 아무리 잘하는 의사도 에러가 있어요. 그 에러를 줄이는 거예요. 이 사람은 처음 보는 환자인데 그 사람이 어떤 금기가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 걸 다 뽑아내는 거죠. 이건 한 예인데, 이런 예가 수천 개가 있어요.

 

아까 협력적 인성을 말씀하셨는데 기업을 해보시면서 그것이 중요한 자질이구나 하는 걸 느끼신 건가요?

근래에 느꼈죠. 지난 한 10년 정도 돼요. 그 전까지는 하나를 파고드는 전문인들이 필요한 사회였어요. 하나만 잘하면 돼요. 마케팅을 잘한다든지, 영업을 잘한다든지, 제품 개발을 잘 한다든지, IT를 잘한다든지 그걸로 충분했어요. 그리고 제가 위에서 지휘를 잘하면 됐어요. 그런데 이제는 안 되는 사회예요. 이제는 융합사회예요. 서로 얽히는 거예요. 아무리 위에서 일해도 밑에서 서로 안하면 안 되는 사회가 되어버렸어요. 그게 제가 자랄 때하고 지금 우리 애들이 자랄 때하고 어마어마하게 변한 점이죠. 그게 핸드폰의 영향도 있고 미디어의 영향도 있고, 모든 것들이 너무 복잡해진 거예요. 간단하게 풀 수 있는 질문들이 없어요.

이젠 어려운 질문만 남았어요. 환경, 청정에너지, 그런 것들을 풀어나가려면 한사람이 이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풀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러니깐 생물학자, 화학자, 컴퓨터 수학자, 심리학자가 같이 해야 해요. 한 사람씩 가지고는 안돼요. 그런 사회가 되어버렸어요. 그러니 사업을 하다보면 옛날에는 세일즈 하는 애 하나, 마케팅 하는 애 하나, 프로그램 하는 애 하나, 회계하는 애 하나 두고 하면 됐는데, 이제는 마케팅 하는 애도 회계가 왜 이렇게 돌아가고 내가 하는 일이 회계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하는 것을 모르면 안돼요. 회사가 안 돌아요. 자기는 100km/h로 잘 나가는데 이쪽은 거기에 끌려가서 죽어가는 거예요. 이쪽 생각 안 하고 일했으니까. 그런 일들 때문에 회사가 망해요. 이제는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방향이 내 옆에 있는 애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반드시 미리 짚고 넘어가야 해요. 자칫 잘못하면 나 하나 잘 되고 나머지 네 명을 다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돼요. 옛날에는 저희 아버님이 외교관 하실 때는 이 나라하고 이것만 잘하면 됐어요. 저 나라하고 저것만 잘하면 됐는데, 이제는 이 나라하고 뭘 할 때 저 나라하고 이 관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큰일 나잖아요. 예전에 중국과 우리가 적대관계로 있을 땐 얼마나 외교가 쉬웠어요. 친미하면 끝났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너무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렸어요. 인터넷 때문에 감출 수가 없어요. 이쪽에서 만나면 누가 사진 찍어서 올리면 다 나오게 되었고 비밀이 있을 수가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에요. 이제는 스며드는 시대입니다. 제가 말하는 협력은 스며드는 거예요. 레고식 협력이 아니고 상호 침투하는 것이죠. 탄산수와 물을 섞는 거죠. 그럼 마시다보면 탄산수인지 물인지 모르는 거죠. 근데 그걸 매일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그런 부분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옛날식으로 외우면서 배우는 것도 있어야 하죠. 앞으로의 사회는 AND 사회니까요. 저희가 자랄 때는 OR 사회였거든요. 너 변호사가 될래? 의사가 될래? 이랬는데, 지금은 저는 법공부하는 의사가 될래요, 하거든요. 김용 총재가 인류학 Ph.D예요. 그리고 MD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그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사고능력이 있어서 그 자리에 간 거예요. 아무도 그 사람을 복사할 수 없는 게 있어요. 저도 생각해보니 저도 그런 독특한 게 있어서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동양인이면서 공과를 공부했는데 나중에 수학, 경제를 해서 비즈니스 스쿨을 가서 은행업을 했어요. 제가 건드린 게 많기 때문에 지금 출판사에 와서 출판이 아닌 출판사를 만들고 있는 변화과정을 수행할 수 있어요. 이걸 제가 IT회사 경력이 없고, 은행을 해본 경력이 없고, 엔지니어링해 본 경험이 없으면 절대 못합니다. 계속 제가 편집자로만 올라갔으면 못해요. 절대 안 돼요.

 

다시 교육 문제로 돌아와서 문제는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학교에서는 어떤 교육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겠지요.

저는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한국에선 조금 늦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선택적인 부분도 그렇고 전문화된 부분도 대학가서 시작할 수 있죠. 한국 중고등 학생들이 기초지식은 미국 학생보다 많이 나가 있는데, 응용하는 건 조금 부족한 것 같아요. 교육 개혁함에 있어서 그 부분을 버리면 안 돼요. AND로 가야해요. 그것도 하면서 필요 없는 부분을 빼고 응용을 집어넣어 주는 거죠. AND로 가면 양손잡이가 되는 거죠.

 

마지막으로 한국의 교사들에게 한마디 부탁합니다.

먼저 감사하고요. 선생님들에게 감사하는 게 첫째입니다. 둘째는 장래 교육의 성공의 반은 교사에게 달려있으니까 좀 앞장서 주시면 고맙겠어요. 교육정책, 본인들의 기대, 이런 걸 기다리지 마시고 좀 앞서주셨으면 좋겠어요. 주도권을 가지시고 교실 안에서 그런 걸 직접 하시고 실험적 시도를 해 보시고, 거기서 배운 걸 우리가 개혁할 때 산 경험으로 던져주셔야 해요. 이렇게 해보니까 잘되더라 하는 것을. 결국은 선생님들에게서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학생과 학부모를 대하는 게 누구입니까? 교사들이거든요. 선생님들은 우리나라의 경우 체제와 틀이 있기 때문에 더 못 나간다고 생각하시는데, 그런 걸 벗어나셔서 조금 더 대담하게 용감하게 앞서주시면 좋겠어요. 이런 것에 대해 거부반응 있으신 분들도 계실 거예요. 그런데 교실 안에서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나하고 호흡이 맞을까 하는 것은 오로지 선생님들만 아세요. 아무도 몰라요. 이런 개혁을 하려면 선생님들이 앞장서주셔야 해요. 오늘 사회를 보고서 하시는 게 아니고 우리 애들이 25년 이후에 있을 사회를 보고 하는 거니까 조금 틀 바깥으로 나가주셨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한 가지 단어가 가슴에 맴돌았다. ‘은혜라는 단어였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가 조건 없이 베푼 은혜를 통해 또 새로운 은혜의 물결이 생겨날 것을 생각하니 가슴 뭉클한 감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나는 진정한 교육이 아닐까?

인터뷰 원고를 정리하는 중에 조선일보에서 지영석 회장을 인터뷰한 기사가 올라왔다. 회장이지만 직원들과 동일하게 이코노미석을 타고 회장의 방문을 영접하러 한국 지사장이 마중 나오게 하는 일이 절대 없다는 기사가 있다. 그 이유로 공평을 들었다. “회장이 자기 하는 일을 방해하고 시간을 뺐으면 되나. 그런 특권을 행사하다 보면 버릇돼 남용하게 된다. 조직에서 다들 회장이 되려고 하면 되겠나.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일을 함으로써 대우를 받아야 한다. 승진보다는 자신의 업무에서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 회사 안에서 내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는 직원들은 나보다 연봉이 높다.” 인터뷰한 기자는 내가 아는 회장들하고는 좀 다르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힘을 가진 자가 자신과 남을 평등하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은혜의 기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에 대한 논의 가운데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10%의 아쉬움의 대목이었다. 숫자로는 10%로 표현했지만 사실 그 10%가 모든 것을 가로막는 핵심일 것이다. 미래교육특별위원회의 교육개혁의 아이디어는 곧 보고서로 제출될 것이다. 하지만 이해관계를 풀어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창조적 아이디어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핵심 근원일 것이다. 그 난마처럼 얽힌 이해관계의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생길 것인가? 그의 기대는 현장 교사들을 향하고 있었다. 기존의 고정관념과 틀을 넘어 보다 담대하고 혁신적으로 교육적 실천을 통해 새 길을 개척하는 교사들의 존재가 모든 진영 논리를 뛰어넘는 새로운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선생님이 우리 교육의 희망입니다라는 우리 운동의 슬로건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