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를 하고 나서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런데 입시제도가 바뀐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의 길은 대학이 아니고 공장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결심을 하고, 돈을 벌면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이런 저런 막노동 일을 했어요. 1년 정도를 그렇게 일하면서 공부를 하니 성적은 말할 것도 없이 형편없었죠.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교사
김천 동신초등학교 오정우 선생님
글, 김정태 / 사진, 임종화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조금 늦은 대학생활을 했지만 기독교사의 소명을 받은 뒤로부터 오정우 선생님은 지금까지 불꽃같은 삶을 살고자 있습니다. 특히 2015년부터 성서유니온 교사모임의 대표로 섬기게 되었는데요. 그의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실래요?
혹독한 시련과 함께 다가온 신앙
형산강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곳, 저 멀리 영일만 바다가 보이는 포항시 연일이라는 곳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어요.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구멍가게를 하셨는데 가게와 붙어있는 단칸방에서 여섯 식구가 살았어요. 아버지는 늘 새벽 일찍 짐자전거를 타고 40리쯤 되는 포항시내에서 물건을 떼 와서 팔고, 어머니는 연탄 배달까지 하셨어요. 그리 넉넉하지 못한 늘 쪼들리는 생활이었어요.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시고, 아버지는 종교는 없으셨지만 아주 유교적이시고 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우리 동네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 친구 따라 자주 교회에 놀러갔어요. 부활절, 여름성경학교, 성탄절 등 절기마다 한두 번씩 놀러가다 보니 어느새 교회가 친숙해지고 예배드리는 것이 익숙해져서 별로 어색함이 없었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제가 교회 가는 것을 좋은 시선으로 보시지 않았지요.
중학교 때에는 조금씩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어요. 사탄이 내가 예수님 믿는 것을 싫어했던지 그때부터 부모님의 반대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죠. 아버지는 제사문제를, 어머니는 공부문제를 이야기하시며 교회를 강하게 반대하셨어요. 그때부터 거짓말하며 숨어서 몰래 교회에 다녔어요. 그러다가 어떻게 들키기라도 하면 많이 혼나고 매를 맞기도 하였지요. 심지어는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는데 찾아 오셔서 나를 끌고 데리고 가시기도 하셨어요. 한 번은 제사문제로 아버지와 심하게 부딪친 적이 있었어요. 제가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말씀드렸거든요. 아버지께서 굉장히 화를 내시면서 집안에 있는 모든 성경책과 관련서적들을 버리고 불태우셨어요. 다섯 살 위인 형도 때리고 협박하며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했어요. 어린 마음에 극복하기 힘들었어요. 크게 낙심하고는 고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1년 정도 교회 나가지 못했어요.
따스한 봄날 같았던 고교시절
고등학교 시절은 제 신앙생활에 있어서 봄 같은 날이었어요. 우리 집 마당에 동백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한 겨울 혹한의 눈 속에서도 붉고 예쁜 꽃을 피워요. 그 동백꽃처럼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저의 신앙은 조금씩 성숙하였어요. 물론 집안 분위기는 교회의 ‘교’자도 입 밖에 내기 힘들 정도였어요. 좋은 대학 가려면 1학년 때부터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고등학교 때 제일 부러웠던 친구들은 집사님, 장로님, 목사님 자녀들이었어요. 하지만 저에게도 교회에 갈 수 있는 길이 있었죠. 일요일에 학교 간다는 핑계를 대고 교회에 갔어요.
고등학교 시절 제 신앙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교회 전도사님 덕분이었어요. 힘들고 괴로울 때 형 같은 전도사님께 이야기하면 마음이 늘 평안해졌어요. 고등부 3년 내내 그분과 함께하면서 그분의 삶 속으로 제가 스며들기 시작했어요. 그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말씀을 몸소 삶으로 보여주셨어요. 욕심이 없이 자기 가진 것, 먹을 것, 입을 것들을 실제로 어렵고 가난한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셨어요. 그 당시 제가 학생회 총무, 회장을 하면서 옆에서 지켜 볼 수 있었어요. 중고등부 학생들이 그분의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그때 저는 그분의 삶을 통해서 성경을 배운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그 전도사님은 오랫동안 키르기스스탄과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시다가 작년 10월에 울산 열방의 빛 교회 담임 목사님으로 부임하십니다)
연이은 대학 진학 실패로 인한 7년 대환란!
대학입시를 며칠 남겨두지 않은 고3 어느 주일, 그날도 부모님께 학교 공부하러 간다고 하고 집을 나와서는 교회에 갔어요. 마침 그날 교회 학생회에서 노방전도를 하는 날이라 예배 후에 전도하러 길거리로 나갔고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는데, 마침 장보러 나오신 어머니와 딱 마주치게 되었어요. 온 몸이 얼음처럼 굳어지는 것 같았어요. 어머니는 말없이 집으로 돌아가셨고 나는 복잡한 마음에 이리저리 방황하다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어요. 집 안은 찬바람이 생 하니 불고 있었고, 저는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이 없었어요. 부모님은 저랑 이야기를 하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대학입시가 코앞에 닥쳐있었어 화를 자제하셨어요.
부모님의 분노와 화는 시험에 떨어지고 난 후에야 한꺼번에 저에게 쏟아졌어요. 나 때문에 교회가 욕을 먹고,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 같아서 참 견디기 힘들었어요. 대학에 떨어지니 할 것이 없었어요. 친구들은 다 대학 가는데 공장가서 일할 수도 없고 길이 없었어요. 다시 공부하는 수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부모님께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약속드리고 대구에 올라 와 재수를 시작했어요. 먹을 것 안 먹고, 놀 것 안 놀고, 잠 안자고 모든 것을 절제하며 무슨 사법고시 준비하듯이 독서실 생활을 했어요. 하지만 또 대학시험에 떨어졌어요. 앞이 캄캄하고 막막했어요. 부모님께 죄송하고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어요. 재수해서 떨어지니 공부한 것이 아깝기도 하고 오기도 생겼어요.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간청했고 아버지는 반대하셨지만 어머니께서 몰래 허락해 주셨어요.
3수 때는 별 기억이 없어요.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어요. 하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저에게 보이지 않는 벽, 넘을 수 없는 한계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부담감이 너무 컸던 것 같아요. 시험 치는 당일의 몸 상태도 좋지 않았고 여러 가지 조건들이 나에게 너무 안 좋았어요. 시험을 치고 나오면서 직감했어요. ‘또 떨어지겠구나...!’ 눈 내리는 서울 하늘이 차가운 나의 마음 같았어요. 일말의 희망을 가져보았지만 역시나 결과는 냉정했고 대학은 나를 원하지 않았어요. 3수해서 떨어지니 아버지께서 이제 그만하고 공장가서 일하든지 군대나 가라고 하셨어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지요. 고개 숙인 채 “예”라고 말씀드리고 군대 가기로 결정을 했어요.
제대를 하고 나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니 입시제도가 바뀐 거예요. 하나님께서 ‘너의 길은 대학이 아니고 공장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결심을 하고, 돈을 벌면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이런 저런 막노동 일을 했어요. 1년 정도를 그렇게 일하면서 공부를 하니 성적은 말할 것도 없이 형편없었어요.
그래서 조금 모인 돈을 가지고 재수 삼수 때처럼 다시 대구에 올라와 학원에 등록하고 독서실 생활을 하면서 2년을 더 공부했어요. 수능시험에 적응하기까지 또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세월이 가는지 오는지, 날마다 반복되는 이 소모적인 공부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지고 피곤했어요. 하나님께 대한 괜한 쓴 마음이 생기기도 했어요.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면 독서실 가까운 교회에 가서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이제 그만 하고 싶습니다. 제발 대학만 합격 시켜주신다면 이제 남은 저의 인생을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인생의 Turning Point 교대에 지원하게 되다.
참으로 뜻밖에 생각지도 않게 교대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7년 되는 해, 수능시험에서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점수를 받았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 원서를 쓰려고 하니 또 다른 걱정이 생겼어요. 친구들은 다 대학 졸업해서 취직해 있는데, 이제 와서 대학 들어가려고 하니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가 버렸어요. 대학 졸업해도 취직이 안 되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되었어요. 이상을 좇아 학문을 위해 대학 가려고 했던 고3 시절의 마음이 세월이 지나 나이를 먹고 나니 덜컥 취직 걱정, 먹고 살 걱정이 생긴 거예요. 그때까지 교대는 나의 머릿속에 아예 없었어요. 교대는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지요. 원서 마감일이 임박할 때까지도 교대는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바뀌었어요. “교대 한번 원서 내 보시죠, 취직 잘 되는데...” 독서실에서 동병상련하며 같이 공부하던 어떤 친구가 교대를 추천해 주었어요. 그 말을 듣고 이상하려니 만큼 너무 쉽게, 너무 빨리 교대 가야겠다는 마음이 확 들었어요. 취직 잘 된다는 말 한마디에 말이에요.
교대 지원하게 된 동기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사로서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교단선교사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교대에 지원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는데, “취직 때문이에요”라고 진실을 말씀드리려니 참 부끄럽네요. 이렇게 해서 몇 군데 교육대학교에 원서를 내게 되었고, 참으로 다행히도 대구교대에 합격하게 되었어요.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면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만약 내가 재수 삼수했을 때 대학에 합격했다면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합격한 거야’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때까지는 젊음과 패기와 자신감이 아직 남아있었거든요. 하지만 7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동안 거듭되는 실패와 좌절로 인해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어요. ‘내가 열심히 노력해도 안 돼는 것이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127:6)라는 시편의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했어요. 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구나! 나의 업적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구나! 라는 사실을 오랜 세월의 교훈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깨닫게 되었어요. 교만하고 자신만만하던 나를 다듬으시고,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7년간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성서유니온선교회(SU)를 만나 하나님나라를 보다
교대 진학이 나의 삶의 방향을 180도 바꿔 놓았다면, 성서유니온선교회(SU)와의 만남은 나의 신앙생활을 완전히 바꿔 놓았어요. 대학교 3학년 때 기독동아리 SU(그 때는 “어린이선교회”였음)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어린이징검다리캠프에 참여하였을 때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 기독교 캠프라는 것을 처음 경험했어요. 여름성경학교와는 많이 달랐지요. 아이들과 선생님이 함께 먹고, 자고, 놀고,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배워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어요. 특히 아침에 일어나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매일성경으로 말씀묵상(QT)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어요.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렇게 열심히 수고하고 헌신하는 현직선생님(선배)들과 교대생들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한 번은 캠프 준비를 위해 성서유니온 대구지부 사무실에서 가서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초대 총무님이신 윤종하 총무님의 강의테잎를 구입을 해서 듣게 되었어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의였어요. 내가 교회에서 들어왔던 ‘천국’(하나님 나라)의 개념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지금까지 천국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은 이후에 저 하늘 위에 있는 어떤 곳에 가서 나의 영혼이 안식을 누리는 곳’ 쯤으로 다분히 미래적이고 장소적인 천국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신 ‘천국’(하나님 나라)은 그게 아니었어요. ‘나라’의 개념이 ‘영토’ ‘영역’의 장소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통치’ ‘다스림’ ‘왕권’ 등의 역동적인 개념이라는 것 이예요.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며 미래에 죽어서 가는 곳이라기보다는 현재 이곳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다스림(통치)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나의 신앙의 모든 부분을 다시 점검하게 만들었어요.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은 했지만 한 번도 내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양도한 적이 없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었던 것이죠, 무늬만 그리스도인 이었어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강하게 나에게 부대꼈어요. “회개하라”라는 말씀이 ‘이제 네가 쥐고 있던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으라’는 말씀으로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통치)을 받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생겼고 계속해서 ‘성경묵상(QT)방법’ ‘하나님의 인도’ ‘새창조와 구원’ 등의 더 많은 강의를 듣게 되면서 저의 생각이 정리되고 확고해지기 시작했어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다스림(통치)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제야 SU 지체들이 날마다 매일성경으로 묵상하고 캠프에서 아이들과 함께 묵상(QT)하던 그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저도 하나님의 다스림(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데에 열심을 내게 되었어요. 매일성경이 비로서 나에게로 오는 느낌이었어요. 날마다 매일성경으로 묵상을 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몸부림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매일 매일 말씀 앞에 나의 삶과 나의 성품들, 잘못된 마음(동기)들을 점검받고 고쳐나가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는 히브리서의 말씀이 삶으로 느껴졌어요. 지금까지 문자에 갇혀있던 성경책이 비로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대학 입학 전 오랜 세월의 실패와 좌절의 경험으로 나를 낮추시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말씀으로 고집 세고, 상처 많고, 성질 더럽고, 모난 나의 성품들을 치유하시고, 다듬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SUT 공동체를 통한 어린이 선교와 기독교사의 비전 발견
아주 길게만 느껴지던 교대 4년의 시간도 금방 지나갔어요. 교사로서의 아무런 소명의식 없이 우연히 교대 들어와서 2년을 방황하다가 SU를 만나 사람이 됐지요. SU를 통해 성경읽기와 말씀묵상 훈련을 받고, 어린이징검다리캠프를 통해서 교사로서의 삶을 조금씩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SUT 선배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어린이 선교에 대한 비전들을 발견해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들의 어린이 선교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참 대단하고 무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도대체 무엇이 저들에게 그토록 어린이를 향한 열심을 불러일으킬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교회 십일조를 하고 따로 봉급의 5%를 회비로 내며, 방학 때마다 자기 반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어린이캠프를 하고 있었어요. 거기에 더해 많은 액수의 헌금을 하여 폐교를 구입하고 리모델링을 하여 어린이캠프를 위한 캠프장을 마련하였어요. 자기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 어린이 선교에 헌신하는 SUT 선배님들의 모습은 나에게 적지 않은 도전이 되었어요.
2001년 대구에 첫 발령을 받았어요. 대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먼 경상남도와의 경계에 있는 ‘논공’이라는 곳에서 첫 교직생활을 시작했어요. 너무 멀어서 SUT 지역모임에 나가기가 많이 힘들었어요.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1시간 30분 정도 걸려서 정광호 선생님댁 SUT 모임에 참여하였어요. 아이들 앞에서 전혀 ‘기독교사’적이지 않은 나의 모습에 실망하며 힘든 신규 시절을 보내고 있었어요. 어떻게 사는 것이 기독교사로서 잘 사는 것인지 고민도 많이 되었어요. SUT 지역모임에 참여하면서 선배 선생님들의 말씀묵상과 나눔을 통하여 기독교사로서의 삶을 엿볼 수 있었어요. 특히 서경석, 정광호 선배님을 통하여 ‘말씀 위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기독교사의 삶’을 많이 배울 수 있었어요.
그리고 교사 2년 차 여름에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교사”라는 주제 아래 열린 “2002 기독교사대회”에 참여하여 여러 선생님들의 간증과 강의를 들으면서 기독교사의 삶을 보게 되었고, 나도 기독교사의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게 되었어요. 그때 불렀던 주제찬양 “보리라”는 아직까지 제 귀에 쟁쟁 울리는 것 같아요. 가슴 뭉클 했었어요.
2003년 교사 3년 차에 대구에서 김천으로 넘어왔어요. 그리고 2004년에 같은 모임에서 함께 활동하며 사역하던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하나님의 귀한 선물 딸, 아들을 낳아 지금까지 아내와 함께 김천모임을 섬겨오고 있어요. 소도시의 특성상 잦은 교사 이동으로 모임을 이끌어 가기 힘들고 어려울 때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묵묵히 옆에서 함께해 주던 사랑하는 동역자, 아내의 헌신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모임을 이끌어 올 수 있었어요.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누구에게 맡기시나요?
먼저 저 자신이 하나님의 다스림(통치)를 잘 받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 나의 삶과 나의 마음을 점검받으며 삶의 한 절이라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교사로 살고 싶습니다. 지금도 늘 교단에 설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것은 아이들이 나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나의 삶을 통해서 아이들이 본받고 싶은 선생님이라고 생각할까? 하는 마음 때문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대로 힘써 복음을 소개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제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전도하시기를 원하시는데 과연 누구에게 부탁하실까? 정치인에게 일까? 과학자, 기술자, 자영업자, 의사, 변호사 누구에게 일까? 아마도 교사인 우리에게가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상처받고 낙심하고 힘들어 하는 저 아이들을 부탁하고 맡겨주셨는데 나는 어쩌면 나의 안위와 안락을 위해서 나의 책임을 애써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제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할 때가 있어요.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상실하면서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기독교 인구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이 시점에서 기독교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요? 미래의 꿈과 희망이라고 말하면서 이 아이들을 놓치게 된다면 기독교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맡겨주신 우리 반 아이들을 위로하고 돌보며, 그들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사역이 아닐까요.
재수 끝에 대학에 들어간 적 있는 필자는 특히 오 선생님의 실패 이야기 속에서 많은 부분을 공감할 수 있었어요. 또한 저 자신에게도 진지하게 물어 보았습니다. ‘나는 과연 내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에게 양도한 적 있는가?’ 이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잠시 자신에게 던져 볼만한 질문이라 생각이 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사모하며 말씀 속으로 나아가는 오정우 선생님을 통해 이웃들 속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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