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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있는 자는 누구나 선교사입니다(2015.07)

"예수그리스도가 마음에 있는 자마다 선교사고, 예수그리스도가 없는 곳마다 선교지다."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제가 있는 가정, 교실, 학교가 선교지이고 그곳에서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선교라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있는 자는

누구나 선교사입니다

 

남원 아영초등학교 이재호 선생님

 

 

_ 김정태

 

 

 

 

졸면 죽음이라는 무시무시한 88고속도로의 표어를 지나치며 춘향전의 주 무대 남원에 도착하였습니다. 정오의 뜨거운 햇살에 머리가 뜨거웠으나 한적한 시골 교정에서 펼쳐지는 어린 학생들의 신나는 물총싸움놀이에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과 몸이 시원해졌습니다. 전주에서도 꼬불꼬불한 길을 차로 1시간 30분 이상 달려야 도착하는, 산 하나를 넘으면 바로 경상도 함양 땅인 남원골에서 선교사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재호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서울에서 공주로, 또 대전으로

1987년 서울 봉천동에서 1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이때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사를 많이 다녔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는 게 일이었고 어린 저에게 약간은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이런 이유로 생긴 것 같기도 해요. 충남 공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지금 본가가 있는 대전으로 이사를 와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아버지는 경찰이신데 항상 바쁘셨어요. 밤중에도 사무실 전화를 받고 나가셨던 기억이 많이 있어요. 또 집에 계실 때는 책을 좋아하셔서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어요.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많이 바쁘시다보니 여동생,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어요. 항상 바쁘셨던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께서 많이 속상하셨을 법도 한데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 싫은 소리 한 번을 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늘 아버지를 존경하고 신뢰하셨어요. 지금까지 두 분이 다투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제가 존경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신 어머니와 아버지 덕분에 가정은 늘 행복했고 제가 이루고 싶은 가정의 롤 모델이 되었어요.

 

야간자율학습을 빼먹다 어머니에게 들키다

학창시절 저는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에 순종적이었고 크게 반항한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특별하게 사고를 친 적도 없이 무난하게 학창시절을 보냈어요. 그런데 제가 어머니를 울린 적이 한 번 있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친구들이랑 PC방을 갔어요. 게임을 다 하고 가방을 가지러 학교에 갔죠. 학교 교문에 도착했는데 아뿔싸! 어머니께서 비가 온다고 우산을 가지고 교문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 저를 발견한 어머니는 아무 말씀 없이 우산을 건네주시고 집으로 가버리셨어요. 교실에서 가방을 챙기고 어머니를 쫓아갔는데 집으로 가는 길 20분 내내 혼내지도 않으시고 아무 말씀 없이 훌쩍이셨어요. 처음에는 집에서 혼내시려나 보다 생각하고 변명을 준비했어요. 솔직히 야자 도망간 것에 대한 죄책감이 없었죠. 어머니의 실망감에 대해 전혀 생각 못했어요. 그런데 집에 와서도 아무런 혼을 내지 않으셨어요. 어머니의 그런 반응이 저로 하여금 제 행동에 대해 반성하게 했고 그게 어머니 마음에 그토록 상처 주는 일이었나 하고 성찰하게 되었어요. 그 일을 계기로 저는 부모님에게 믿음을 주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물론 그 후로도 PC방에 갔어요. 하지만 말씀을 드렸죠. 맨날 야자에 빠지고 PC방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기억에 남는 선생님 누구신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던 심재덕 선생님이에요. 저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공부도, 운동도 못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이였어요. 늘 교실에 있는 듯 없는 듯 지냈죠.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저한테 점심 맛있게 먹었냐고 물어보시고, 수업시간에 손도 안든 저에게 이것저것 물어봐주시고, 다른 선생님들과 다르게 저에게 관심을 가져주셨어요. 별것 아닌 일들이지만 저에겐 크고 놀라운 일들이었어요. 선생님한테 관심 받고 있다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면서 성적도 많이 오르고 운동도 좋아하게 되고 많은 것이 변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심재덕 선생님처럼, 나 같은 아이들을 사랑해주는 교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3년 전에 찾아뵈었어요. 선생님이 그때 아이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계셨어요. 사소한 사건까지도 다 기억하셨어요. 당시 반 아이들에게 애정이 많으셨던 분이셨죠.

또 한분은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로 가르쳐 주시던 전현옥 전도사님이에요. 하루는 저에게 크리스천인 교사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때 당시 저에겐 굉장히 충격적인 질문이었어요. 교회만 다녔지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던 저에겐 교회에서만 믿고 만나는 예수님을 학교로 가져간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거든요. 한참을 고민하다가 공립학교에서 교사의 신분으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일이라고 대답했어요. 종교와 교육은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전도사님께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지라도 대학교에 가면 꼭 이 문제를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해보라고 하셨죠. 아마 저에게 기독교사로서의 삶에 대해 처음으로 도전을 주신 분인 것 같아요.

 

실존하시며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어요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어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생기면서, 주일에 교회에 안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요. 중고등학교 때도 교회는 열심히 다녔어요. 그런데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지고 있진 않았어요. 교회집사님들은 제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 하는 줄 아셨을 거예요. 중고등학교 때는 선데이 크리스천인 게 태가 안 났는데 대학을 가니 바로 태가 났어요. 집에서 먼 전주교대를 가게 되었고 처음으로 집 밖으로 나와서 살게 되면서 이전엔 못 누리던 자유(?)를 누리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술도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재미에 빠졌죠. 공부도 뒷전으로 밀려났죠.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은 그렇게 생활하면서도 주일만 되면 꼬박꼬박 대전 모교회(한샘침례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던 것이에요. 그리고 수요일 아침에 있던 캠퍼스 수요예배도 가끔씩 나갔어요.

춘천교대에서 교대협 축제행사가 토요일에 있었어요. 새벽 2시까지 술을 먹다가 택시 타고 나와 새벽버스를 타고 대전에 도착했어요. 찬양팀 베이스 기타를 맡고 있어 책임감에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부끄럽게도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예배의 자리에 섰는데 다행히 주변분들은 그런 제 상태를 두고도 모른 채 해 주신 것 같아요.

그렇게 살던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건 대학교 3학년 때였어요. 전역 후 복학해서 학교생활을 하던 중에 서관석 교수님의 권유로 GTVF(지금의 GVF) 대학생 집행부 리더를 맡게 되었어요. 막상 사역을 하다 보니 이게 그냥 어영부영 해서는 안 되는 일이더군요. 특히 예비교사들에게 주는 표어, ‘하나님은 당신을 부르셨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정작 나에게 적용하니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였어요. 제대로 믿지도 않는 내가 집행부를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더군요. 그래서 내 신앙에 대해 뭔가 끝장을 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3학년 2학기부터 CCC에서 훈련을 받았었어요. 사영리를 들으며 교회에서만 만나던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의 자리에 모시게 되었고 순장님과 함께 하는 순모임을 통해 하나님을 천천히 조금씩 알아가고 만나게 되었어요. 그때 간사님을 통해 사영리를 접하면서 그 말씀이 딱 나에게 하시는 말씀 같았어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이 제게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그렇지만 솔직히 저는 불을 받는 것과 같은 강렬한 체험을 더 원했어요.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어요. 그런 저에게 불신가정에서 회심하여 극적으로 변화된 삶을 보여주는 친구들은 항상 동경의 대상이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제게 그런 경험은 안 주시더군요. CCC를 통해 말씀을 배워 믿음이 조금씩 자랐으나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어요.

세월이 지나 지금까지도 제가 동경했던 강렬한 영적 체험은 없어요. 그럼에도 알게 되더군요. 하나님은 제 삶의 전 영역에서 당신의 실존을, 제 삶을 당기시는 그분의 손길을 느끼게 하셨어요. 특히나 대학생 때는 대전을 떠나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어 원망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라.” 라고 하신 말씀이 제게 다가왔어요. 그러면서 저를 전주교대를 보내신 것은 제 생각 너머의 것을 준비하신 일임을 믿게 되었어요.

 

주님, 합격만 시켜주세요

20065월쯤이었어요. 캠퍼스 수요아침예배 광고시간에 서관석 교수님께서 2006기독교사대회 광고를 하셨어요. 기독교사대회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꼭 가보라고 하셨어요. 아는 사람 하나 없었는데도 저는 무엇에 홀린 듯 신청했고 2006기독교사대회에 참석했어요. 거기서 많은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거기 계신 선생님들은 기독’ ‘교사가 아니라 기독교사였어요. 고등학교 때 고등부 전도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그때 생각났어요.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2006기독교사대회 때 서관석 교수님과의 인연으로 수요아침예배 찬양팀으로 섬기면서 GTVF(지금의 GVF)활동도 시작하게 되었어요. 캠퍼스에서 함께 했던 동역자들과 옆에서 항상 기도와 섬김으로 애써주셨던 교수님 덕분에 힘들었던 임용시험기간도 건강하게 견뎌낼 수 있었고 20112월 임용시험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행부를 하면서 임고시험 준비를 많이 못했어요. 불안했어요. 그래서 부끄럽지만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한 번에 합격시켜 주시면 첫 월급 전액을 헌금하겠다고요. 그리고 진짜 합격했습니다. 약간 갈등은 있었지만 서원한 것이 있고 해서 약속을 지켰지요.^^

남원으로 신규발령이 났어요. 1년 차 때는 학년부장선생님의 배려로 업무도 거의 없었어요. 4학년 아이들이었는데 정말 1년을 온전히 아이들과 함께 보낼 수 있었어요. 게다가 학교에는 GVF선생님도 세 분이나 계셔서 함께 신우회도 하고 GVF 남원 지역모임도 나가고 행복한 1년이었어요. 2년 차 때는 GVF 남원 지역모임을 섬기고, GVF에서 진행하는 제자훈련도 하게 되었어요. 학교에서는 꿈에 그리던 교사가 되어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GVF에서는 훌륭한 믿음의 선배 선생님들과 교수님 덕분에 성장하는 기쁨과 공동체가 주는 행복을 마음껏 누리며 지냈어요.

그런데 제가 임용시험을 준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것이 하나 더 있었어요. 임용을 한 번에 붙여주시면 40년 교직생활의 십일조로 4년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했어요. 첫 월급은 드렸는데 십일조는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어느 날 학교 신우회 모임 중에 신우회를 인도하던 친구가 저에게 몽골로 MK사역을 가면 어떻겠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문득 고민하고 있는 제 모습이 요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니느웨로 가기로 했어요. 결정하고 나니까 신기하게 마음이 정말 편했어요. 그리고 2013학년도 새 학기는 몽골 UBMK스쿨에서 맞게 되었어요.

 

내 삶의 이정표가 된 몽골에서 1

몽골에서의 1년 동안 하나님께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하셨어요. 말도 안 되게 열악한 환경인데도 불평하는 법이 없던 MK친구들을 통해 감사가 무엇인지 보여주셨어요. 작은 규모의 학교로 가면서 학교의 상황이 한 눈에 들어왔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학교의 모습이, 학교 공동체의 모습이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을 시작하게 하셨어요. 귀한 동역자들도 만나게 되었고 하나님과 깊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무엇보다도 선교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어요. 선교라는 단어는 저에게 먼 단어였고, 솔직히 가까이 하기 싫은 부담되는 단어였어요. 하지만 선교지에서 직접 선교사님들의 귀한 삶을 보고, MK들을 보면서 선교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어요. 대학생 때는 꿈도 많았어요. 막상 발령을 받아 학교현장에 나오니 한마디로 우왕좌왕이었어요. 그러다 몽골에서 가서 선교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어요. 그 마음은 바로 내가 사는 곳에서 선교하는 마음, 선교사의 마음을 주셨어요. 선교사인 한 학부모님으로 들은 말씀이 지금까지 제 마음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있는 자마다 선교사고, 예수그리스도가 없는 곳 마다 선교지다.”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제가 있는 가정, 교실, 학교가 선교지이고 그곳에서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선교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몽골에 더 있고 싶었으나 2014년 정말 중요한 일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GVF가 기독교사대회 간사단체를 맡게 된 것이었죠. 꿈에 그리던 형광조끼를 입고 선생님들을 섬기면서 행주로 식탁 닦는 일이, 식판 받는 일이 그렇게 은혜가 되는지 처음 알았어요. 맛있게 식사하시는 모습만 봐도 은혜가 되었고 힘이 났어요. 그리고 부족한 부분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상황을 보며 좋은교사운동을 향한, GVF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사대회를 준비하며 작은 천국을 보았다는 어느 선생님의 고백이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되었어요.

 

요즘 어떤 일에 힘쓰고 계신가요?

올해 1월부터 김지만 선생님과 함께 GVF 대표로 섬기게 되었어요. 아직 나이도 어리고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대표로 섬기게 된 것은, 아마 옆에 계신 선생님들을 가까이서 보고 많이 배우라고 그러신 것 같아요. 전 대표였던 박성욱 선생님이나 서관석 교수님 같은 믿음의 선배님들이 다져놓은 길을 그동안 너무 쉽게 밟아왔어요. 선배님들이 하셨던 치열한 고민과 기도를 이제 우리 후배들이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기도 합니다. 대표로 섬기며 다른 선생님들을 가까이서 보니 교회에서도, 학교에서도 다들 중책을 맡고 계시더라고요. 거기다 GVF 사역까지 정말 바쁘시고 힘드시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선생님들의 일을 조금이라도 도와드리려고 부족하지만 노력하고 있어요.

1세대(박성욱, 최순용, 최한성, 김지만) 리더들과 지금의 20대 교사들이 나이 차이가 조금 납니다. 저는 GVF 3세대 리더에요. 그래서 조금이나마 제가 그 간격을 매꾸는 역할이 제게 주어졌는데 미안하게도 실제적인 일은 전주에 있는 국장님들이 다 하고 계십니다. 제가 이렇게 시골 학교에 근무하고 있기에 겨우 매달 1회 전주에서 열리는 집행부 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대표 역할을 하고 있어요.

바라는 것은 GVF 공동체 안에 많은 젊은 선생님들이 공동체 안에 잘 정착하고, 공동체 안에서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GVF 공동체 안에서 회복되고, 성장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렸던 것처럼요. 그래서 이런 분들을 잘 돕고 섬기는 게 제게 가장 중요한 일 같아요. 교회에서 학교생활의 힘든 점이나 고민을 나누면 잘 공감을 못해주세요. 학교 바깥에 계신 분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교사라는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힘들다!”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 못하세요. “편한 직장에서 배부른 소리한다.”는 말들을 많이 하죠. 또 일반 선배교사들 중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교사의 모습을 젊은 후배들에게 당당하게 가르치기도 해요. 그래서 믿음의 교사공동체가 필요한 것 같아요. 교사들의 아픔과 상처는 교사들이 가장 잘 알잖아요. 많은 선생님들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같은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가요?

작은 꿈이 있어요. 몽골에서 함석현, 김혜성 선생님 부부를 만났어요. 이 두 분은 결혼하자마자 몽골에 오셔서 2년을 UBMK스쿨에 헌신하셨어요. 삶을 드려 선교지로 나오는 부부의 모습이 아름다웠고, 앞으로의 인생을 선교지에서 하나님과 함께 꿈꾸고 기대하는 모습이 정말 좋아보였어요. 그래서 저도 신혼을 선교지에서 보내고 싶은 꿈이 있어요. 다른 한 가지는 아이들에 관한 꿈이에요. 아이들이 저와 함께 보내는 1년을 통해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찬양의 가사처럼 이 아이들이 천국에 가서 저의 증인이 되어주는 거예요.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재호 선생님이 예수님에 대해 알려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천국에 온 거예요!” 라고 고백해준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지리산과 가까운 남원 땅에서 바라본 하늘은 더욱 파랬습니다. 또한 이제 막 모와 작물이 심겨진 논밭의 초록빛은 유난히 빛났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가 마음에 있는 자마다 선교사고, 예수그리스도가 없는 곳마다 선교지라는 말씀을 가슴속에 품고 사는 이재호 선생님으로 인해 아영초등학교와 그 땅이 더욱 밝아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