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야, 그와 함께 웃자!
김진경 전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비서관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석사. 제 17회 프랑스 앵코륍티블 상, 한국문학 시 부문 신인상 수상,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 비서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초대 정책실장, 시집 <갈문리의 아이들>, <광화문을 지나며>, <우리 시대의 예수>, 장편소설 <이리>, 청소년 소설 <굿바이 미스터 하필>, <우리들의 아름다운 나라>, <신화로 읽는 세상>, <고양이 학교 시리즈>, <그림자 나라>외 다수, 문재인 후보 캠프 교육공약 담당
인터뷰·문경민 / 사진·김중훈
작가, 교육운동가, 참여정부 교육문화수석, 교사, 문재인 캠프 교육공약 담당자. 다양한 삶의 이력을 갖고 있는 김진경 선생님을 만났다. 그의 수정 같은 삶의 이력에 비친 이 시대의 모습을 보고, 그를 통해 우리 교육의 나아갈 바를 듣는다.
왜, 고양이 학교를 쓰게 됐는지
아, 이 얘기 무지 긴데(웃음). 무지 길어요. 그 과정을 얘기하려면……. 고양이 학교의 1권 앞에 부분은 거의 저희 집 얘기예요. 주인공 버들이는 실제로 우리 집에서 15년간 키운 고양이에요. 도둑고양이로 우리 집에 들어와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살았죠. 야생 고양이는 죽을 때 사람 안보는 데로 사라져요. 일주일 전부터 아무 것도 안 먹고 주인이 접근하지도 못하게 해요. 버들이가 죽고 나니까 둘째 딸아이가 너무 슬퍼했어요. 엄마 아빠가 맞벌이니까 항상 그 고양이랑 함께 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우리 딸아이한테 “버들이가 아주 죽은 게 아니야. 고양이들은 열다섯 살 되면 고양이 세상에 가서 재밌게 살아.” 이런 얘기를 해주었죠. 그런 얘기를 간단히 써야겠다 싶어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그게 무지 길어져버린 것이죠.
처음부터 동화 쓸 생각은 없었어요. 복직했더니 아이들이 무지 많이 변했더라고요. 아이들이 변한 것을 보면서 아이들을 이해해야겠다 싶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고양이 학교를 쓰는 것까지 가게 된 거예요.
고양이 학교에서 교실 붕괴 원인 탐색으로
저는 아이들의 변화가 90년대 초·중반에 시작됐다고 봐요. 그 때 처음으로 교실 붕괴, 왕따, 학교 폭력, 이런 문제가 언론에 많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전교조 선생님들이 89년에 해직돼서 94년에 복직을 했는데, 복직한 해직 교사들이 애들 때문에 어려움을 호소하더라고요. 해직 교사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아이들을 무지 좋아하는 선생님들이었어요. 아이들 보러 학교 가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런데 복직하고 나서 다 죽겠다고 아우성이더라고요. 정신과 치료받은 복직 교사도 적잖았어요. 그만큼 애들이 많이 달려져 있어서 애들과 소통이 안 되는 거죠. 저는 그 때 큰 변화가 있었다고 봐요. 아이들이 질적으로 달라진 거예요. 누가 뭐래도 교육은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끊어지는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한 거예요. 심각한 거죠. 아이들이 왜 이렇게 변한 것인지, 어떻게 변한 것인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교육 전공 서적이나 논문들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저 혼자라도 공부를 해봐야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제 눈에 특별하게 들어온 학생들의 문화가 자기 몸을 가지고 표현하는 문화입니다. 아! 애들이 머리에 물을 들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신기했죠. 80년대에 우리 누님이 애들을 데리고 미국에 이민을 갔거든요. 그리고 1994년쯤에 우리나라에 잠깐 왔어요. 마중을 갔는데, 누님만 나오는 거예요.
“아니 왜 혼자 왔어? 애들은?”
그랬더니 제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애들이 따라오더라고요. 머리가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웃음). 코에다 링을 하나씩 찬 두 녀석이 나온 거죠. 세상에, 저게 내 조카라니!(웃음) “애들이 왜 다 깡패가 됐어?” 그랬더니 우리 누님이, “얘들 모범생이야. 얘들은 문신도 안했다.” 이러는 거죠. 조카들을 보면서 ‘학생들이 자기를 몸으로 표현하는 걸 추적해보면 뭔가 알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죠.
몸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최고 수준이 문신이죠. 그 당시에는 문화 인류학 쪽에 문신과 관련된 책이 없었어요. 그래서 옛날 한자를 공부했죠. 한자에는 문신 관련된 글자가 많거든요. 한자는 그림 문자라서 그 변화 과정을 보면 문신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어요. 추적을 해보니까 건질 것들이 있었어요. 5000년 전의 신화 시대에는 문신이 귀족이 하는 것이었어요. 그 때 당시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제사장이 죽은 사람의 몸에서 피를 흘려 나오게 해야 영혼이 몸을 빠져나와서 하늘로 간다고 생각했어요. 문신이 굉장히 신성한 행위였죠. 그런데 3000년 전쯤에 고대국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문신이 부정적인 것이 돼요. 첩(妾) 있죠. 첩은 문신을 한 여자라는 뜻도 있어요. 포로로 잡혀 와서 문신을 새긴 여자. 문신은 노예나 범죄자의 표식이 돼요. 정반대 의미로 바뀐 거죠. 문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 산업화 세대까지 이어져요. 우리도 문신이 있는 사람을 조폭이나 범죄자로 보잖아요.
그런데 9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 변화가 일어난 거예요. 3000년 만의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기 몸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문화를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으니까요. 우리 큰 애도 문신을 조금씩 해요. 그런 변화의 원인이 뭔지 들여다 봐야할 필요가 있어요. 우리 세대의 생각과 우리 아이들 세대의 생각을 비교해 봐야합니다. 우리 세대는 이성, 정신의 가치를 무척 높은 것으로 생각하고 몸의 가치는 낮은 것으로 생각했어요. 몸의 욕구는 참아야하고 통제해야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달라요. 몸의 가치를 높은 것으로 생각해요.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성의 가치는 낮게 생각해요. 이런 의식 구조의 변화가 가치관과 행동 양태의 변화를 갖고 오는 거라고 봅니다.
몸과 이성의 충돌 공간이 된 학교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학교 시스템과 충돌할 수밖에 없어요. 학교의 성립 근거는 국민이 자녀 교육의 권한을 국가에 위임했다는 데 있는 것이거든요. 교육과 관련된 이성적 지위, 즉 교육권을 국가가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는 이 교육권을 학교에 위임해요. 그리고 이걸 실제로 수행하는 것이 교사입니다. 교사의 권위는 이성적 지위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근대 학교는 우리 세대의 의식 구조가 그대로 시스템화 된 거예요. 이성에 의한 몸의 통제가 중요해요. 이성은 교사, 몸은 학생. 교사가 학생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의식이 바뀐 거예요. 몸을 높게 보고 이성을 낮게 봅니다. 이 의식 구조가 거꾸로 바뀌게 되면 교사의 권위를 잘 안 받아들이게 됩니다.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90년대 초반에 대두되기 시작했던 교실 붕괴 문제는 이런 변화와 충돌 과정에서 발생한 증상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 큰 변화가 90년대 초중반에 일어난 거예요. 이건 객관적 변화예요. 기성세대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되살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건 사회 변화의 반영이에요. 농경 사회와 산업화 사회 때에는 몸의 지위가 낮았죠. 그런 사회에서는 인간의 노동력을 통제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몸을 통제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몸을 통제하려면 몸의 가치를 낮춰야 해요. 그래야 통제가 쉽게 되요. ‘너는 몸으로 하는 일을 하니까 싼 임금을 받는 게 맞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산업화 시대가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식기반의 사회로 흐르잖아요. 산업화 시대가 지식기반 시대로 변환되면서 나타나는 변화가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는 거라고 볼 수 있어요. 학교 시스템이 아이들에 맞춰서 변화를 해줘야 하는 상황인데, 우리는 그렇지 못해요.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 문제가 점점 더 악화되는 것입니다.
민중교육지 사건에서 청와대 교육문화수석까지
될 수 있으면 글을 안 쓰려고 했어요. 우리 세대는 글 쓰고 살겠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았어요. 기본적으로 돈벌이가 어려우니까요. 그런데 글을 쓰는 걸 피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사람은 대게 살아오는 과정에서 세상과의 결정적인 불화(不和)를 겪게 돼요. 그게 그 사람의 상처로 남게 됩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상처가 있어요. 그 상처를 품고 상상을 통해 조화를 계속 꿈꾸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글쓰기를 피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글을 쓰는 사람이 된 건, 중학교 때의 경험 때문인 것 같아요. 저희 집 안이 6남 1녀거든요. 다 가르치려면 돈이 많이 들어가요. 60년대에 계가 한참 유행했는데, 전국적 계가 깨지면서 경제 위기 같은 게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저희 집도 파산 비슷한 상태가 돼서 빚을 많이 지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됐죠. 저도 혼자 어떤 친척집에 가게 됐고요. 어머니가 숨어있으니까 빚쟁이들이 학교에 있는 저한테 찾아오고 그랬어요. 그런 경험이 글을 쓰게 만드는 것 같아요. 나를 둘러싼 상황이 나에게 적대적이었던 경험, 내 속에 뭔가를 만들지 않으면 내가 깨져버릴 것 같은 상황. 그 때 ‘내가 언젠가는 글을 쓸 것 같다.’ 는 생각을 습니다.
대학 졸업 후 학교 현장에 나갔는데, 기가 막히더라고요. 그 때는 과외가 자유로웠던 때라서 학교가 학교가 아니었어요. 서울 지역 고등학교가 특히 그랬어요. 교사는 부업이고 과외가 주업인 교사가 많았어요. 무척 슬펐습니다. 현장에 있다가 군대를 갔고, 군대 말년에 10.26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대했더니 광주 5.18이 일어났어요. 광주항쟁이 저한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광주에 시 쓰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5.18 터지고 나서 보도 통제가 됐잖아요. 전화도 다 끊기고. 그런데 광주에 시 쓰는 친구 중 한 놈이 살아 올라와서 저한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줬어요. 그 때……. 정말 돌아버리겠더라고요. 80년대 초에 광주의 시 쓰는 친구들과 『오월 시동인』을 만들었어요. 그 오월 시동인의 오월이 광주의 오월이었어요. “통제가 심하니까 그거라도 하자!” 그래서 그걸 만들었죠. 오월 시동인 일을 하다가 85년에 『민중교육지』라는 비정기 간행물을 만들었어요. 학교 교육 전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책이었어요. 사전 심의 받고, 판매 허가도 나와서 판매를 했어요. 2개월쯤 팔고 있는데, 전두환 정권에서 이걸 사건화 했어요. 참여했던 교사들 다 해직되고 저와 윤재철은 감옥에 갔어요. 인생길이 완전히 달라진 거죠. 전원 해직이었어요. 다른 사람의 시를 받아다가 저희 쪽에 전해준 사람까지 잘렸어요. 말도 안 되는 거죠. 저는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어요.
그 뒤에 해직된 선생들끼리 민주교육실천협의회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교과 모임을 만들었죠. 국어교사 모임을 만들고, 교과 연합 모임도 만들고, 전교조에서 일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 전교조 초대 정책실장을 했죠. 교과 관련 주제에 대해 연구하는 일도 했고요. 저는 교과위원회와 참교육실천위원회 쪽 일만했어요. 그쪽을 일군 거죠. 그러다가 전교조가 합법화되는 거 보면서, 이제 괜찮아졌으니 후배들이 잘하겠지……. 하고 전교조는 손을 뗐어요. 그리고 2000년에 복직했어요. 정동중학교에 복직해서 고양이 학교를 썼어요. 그런데 정말 아이들이 엄청나게 변했더라고요. 나이 쉰 살이 넘어가니까 애들과 직접 소통하는 거는 나의 일이 아닌 것 같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만 뒀어요. 작가로 살기로 했죠. 그리고 교육 에세이를 하나 썼어요. 『미래로부터의 반란』(푸른숲)이라는 책이었죠. 그러고 나서 참여정부 때 문재인, 그 양반이 민정수석 할 땐데 저를 좀 보자고 하더라고요.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아무튼 그 양반이 교육 쪽이 어려우니 같이 일하자고 해서 1년 함께 일했어요.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일했어요.
참여정부 교육문화수석 시절
거기는 힘들어요. 굉장히 힘든 곳이에요. 보수 쪽에서 가는 사람들이야, 자기 꺼 챙기고 할랑할랑 지내겠다고 하면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일 하려고 하면 정말 힘들어요. 문재인 그 양반도 이 아홉 개 빠졌잖아요. 나도 어금니 다 나갔어요. 다 임플란트예요(웃음). 굉장한 격무예요. 새벽부터 저녁까지 쉴 시간이 별로 없어요. 쉴 만한 때가 되면 사람 만나야하고요. 일이 돌아가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요. 5년짜리 큰 프로젝트를 열흘 뒤에 보고하라는 식으로 일이 뚝뚝 떨어지니까요. 정신없어요. 정부를 책임진다는 것은 구멍을 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채워 내야하는 거죠. 정부가 후기로 가면 관료주의에 빠지는 게 속도 때문예요. 그 속도를 감당할 수 있는 대안이 관료주의 말고는 별게 없어요. 관료들은 3일 뒤에 뭐 하나 만들어오라고 하면 만들어 와요. 그동안 그렇게 훈련 받아왔고, 요구 받아왔죠. 비슷비슷한 자료가 캐비닛에 많이 있거든요. 비슷한 거 하나 찾아서 쑥 뽑아갖고 와요. 제 역할은 관료들이 뽑아온 자료의 방향을 잡아주는 거였어요. 관료들이 만들어온 기획안을 보고, 방향 정리를 해서 수정 지시를 하는 거죠. 그런데, 정부에는 그런 역량을 갖춘 사람이 정말 없어요. 정부가 성격이 바뀐다고 해도 준비된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경제 부처가 밀어붙이는 교육정책
정부 부처에서 경제부와 행자부는 슈퍼 부처에요. 경제 부처는 돈을 쥐고 있고, 행자부는 인원을 쥐고 있으니까요. 거기서 막으면 아무 것도 안돼요. 관료들 네트워크가 막강해요. 경제 쪽 관료들은 4, 5급 되면 미국 유학 갔다 와요. 거기에서 인맥이 형성되는 거죠. 데이터베이스나 네트워크의 편향성도 문제예요. 그리고 교육 정책의 큰 골격을 경제 부처에서 올려요. 교육 쪽에서 안 올라와요. 그게 사실 가장 큰 문제죠. 교육정책이 경제 정책, 노동력 양성 정책처럼 계속 가는 게 이유가 있는 거죠. 그걸 견제하는 것이 가장 힘들어요. 비서실의 2/3가 경제 관료 출신으로 채워져 있거든요. 경제 영역이 교육 영역에 손을 막 뻗는 걸 막기 힘들어요. 내 위의 정책실장으로 경제 쪽 사람이 와 버리면 뭘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교육정책이 이상하게 나아가는 거 막는 방법은 대통령을 설득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경제 쪽에서 교육 손대는 거, 이상한 거, 많이 잘랐어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 때 보니까 제가 잘랐던 것들이 다 다시 살아서 그대로 가더라고요. 말짱 헛수고 했죠. 그 때 열심히 막아놨는데 그대로 다 가고 있으니까요.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저렇게 5년 동안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도 이주호 장관이 경제 쪽 출신이기 때문이에요. 아니면 절대 저렇게 못해요. 경제 관료의 네트워크가 있어서 힘을 쓰는 거죠. 교육 쪽에서 들어간 사람은 힘을 발휘하기 힘들죠.
교육 쪽에서는 경제 관료와 싸워야 하는 거니까 굉장히 힘이 듭니다. 내가 들어갔을 때는 3불 정책으로 엄청 시끄러웠어요.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한테는 교육 본질을 위한 교육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이야기가 통했어요. 그래서 그 힘으로 견딘 거예요. 아니면 가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학교, 근본적 문제에 봉착하다
문재인 교육공약을 정리하면서 저는 저 나름의 문제의식을 반영했어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아이들의 질적 변화가 있는 상황인데 우리 학교는 그걸 놓치고 있어요. 문제가 심각해요. 아이들이 안 좋은 방향으로 더 나갔어요. 아이들 문제가 심각해진 표면적 증상이 초등학교에 ADHD, 유사 ADHD가 급격히 늘어난 거라고 봐요. 저는 ADHD가 자아정체성 형성이 안돼서 생기는 거라고 봅니다.
자아정체성이 형성된다는 건, 낳아준 아버지든 상징적 아버지이든 아버지의 욕망을 내 것으로 가져오는 것을 의미해요. 자아정체성 형성과정은 타자의 욕망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세대 가정에서 이성의 지위를 갖는 것은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는 정체성 형성이 쉬워요. 아버지가 갖고 있는 이성의 지위를 받아들이고 따라가면 되거든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달라요.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의 권위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아요. 과장된 설명이기는 하지만, IMF관리 체제를 지나면서 아버지가 사라진 거죠. 가족 해체가 심해지면서 자아정체성 형성의 모델이 사라진 거예요. 아버지가 실업자가 되고 비정규직이 된 것입니다.
IMF 관리 체제를 지나면서 국가의 성격도 달라졌어요. 예전의 국가는 사회 구성원을 모두 끌어안으려 드는 국가였어요. 그런데 IMF 관리 체제 하의 국가는 그게 아니거든요. 사회 구성원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만 끌어안고 나머지는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국가도 일종의 상징적 아버지인데, 그 모델도 상당히 약화된 거죠. 정체성 모델이 사라지니까 아이들의 자기 정체성 형성이 잘 안 되는 거예요. 안정이 안 되는 거죠. 정체성 형성이 안 될 때 나타나는 모습이 ADHD와 비슷하게 나타나는 거라고 봐요. 집중을 못하고 과잉행동이 나타나는 거예요.
학교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가 시작된 거죠. 학교 교육을 왜 국가에서 하겠어요. 아이들에게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거잖아요. 그런데 정체성 형성이 안 되고 있으면 학교가 근본적인 지점에서 실패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의 ‘구별 짓기’ 문화, 어른들이 이해 못할 것 없다
저는 우리가 아이들을 세 번 놓치고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90년대 초반, 두 번째는 이명박 정부 교육정책의 시작 시점, 문재인 후보가 당선에 실패한 지금이 세 번째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상황이 상당히 악화됐거든요. 지금 양상과 90년대 초의 상황은 달라요. 90년대 초에는 학교폭력, 왕따 이런 문제가 일부 아이들의 문제였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학교 폭력 문제는 모든 학생들이 경험하는 문제가 됐어요. 누구든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보편적 문화가 된 것 입니다.
하지만 이런 불안한 문화가 발생하는 상황을 보면 좀 기가 막혀요. 왕따나 학교 폭력 이유가 사소한 것이 경우가 많잖아요. 브랜드 옷을 안 입기 때문에 찌질 하다고 그런단 말이죠. 그리고 학부모님들은 이런 상황에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해요. 이해가 안 되긴 뭐가 안돼요? 우리 어른들이 하는 게 그거잖아요. 명품 브랜드로 차별하고, 집값으로 차별하고, 학력으로 차별하잖아요. 그게 뭐예요. 사실 별 것 아닌 것들이잖아요. 하지만 어른들은 거기에 매여 있어요. 어른들은 기를 쓰고 돈을 벌려고 하는 이유가 뭐예요? 구별 짓기 하려는 거잖아요. 이해가 안 되긴 무슨……. 그거 사실 애들 문화 아니에요. 어른들 것입니다.
왕따나 학교 폭력이 나타나는 시기와 우리 사회에 구별 짓기가 강화되는 시기가 엇비슷하게 겹쳐요. 구별 짓기는 현재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입니다.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가족제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었어요. 설날 되면 3일은 세배를 다녔거든요. 7촌 아저씨한테까지 가야하니까요. 그런데 이게 해체된 것입니다. 아들놈 중 똑똑한 놈은 대학 보내고, 딸들은 쫙 공장 보내고, 그랬잖아요. 이 대가족의 유대감이 80년대의 우리 사회를 움직였다고 봅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정서적 기반이 그 유대감에서 나온 거예요. 가족들의 희생으로 대학 나온 아들이, 공장에 간 누이에 대해 느끼는 미안함. 그거죠. “쟤가, 쟤가 나 때문에…….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80년대에 여공들이 파업 때문에 깨지고, 직장에서 쫓겨나면 남의 일처럼 안 보였던 거예요. 그런데 90년대에 가면서 이게 싹없어져요. 대학 나온 아들은 좋은 직장 찾아서 결혼하고, 중산층으로 살고 있는 거죠. 그 사람들이 자기 삶에 안착하면서, 그리고 IMF를 만나면서 계층 간의 소통이 끊기게 돼요. 왕따, 학교 폭력이 나타난 시기와 비슷합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 구별 짓기가 나타나지 않을 수는 없어요. 자본주의 사회의 가동 원리가 그거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게 너무 심화되면 한 사회로 존속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화시키는 장치가 필요해요. 국가가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고요. 시장의 경쟁 규칙을 공평하게 만드는 게 국가의 역할이잖아요. 그냥 놔두면 힘센 놈이 다 먹으니까 그걸 조정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로 들어오면서 학교가 구별 짓기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는커녕 이걸 제도화해서 확대, 강화하는 쪽으로 가버렸습니다. 자사고, 특목고, 국가수준학업성취도 평가, 대입시 제도 등등 이런 게 모두 구별 짓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가고 있어요. 학벌로 구별 짓기 하는 거예요. 최소한 상층으로 살려면 스카이 학력은 가져야 하거든요. 그러니 상층 학부모들은 사교육비를 퍼부을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아이가 이 구별 짓기에서 탈락하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층에서는 안 따라갈 수가 없어요. 액수는 형편없어도 비슷하게 라도 가려고 아등바등하는 거죠. ‘상층은 하층이 계속 쫓아오니까 일찍 구분됐으면 좋겠다.’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교서열화는 이런 맥락에서 바라봐야 해합니다. 대학 단계가 아니라 고교 입학 단계에서 구별되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서 유치원까지 난리 법석 나는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상층 애들 다 성공하나요? 아니죠. 그러니까 조기 유학 붐이 이는 거죠. 조기 유학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으로 연계되면 딱 좋습니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괜히 미국 본토 발음, “어륀지”, 영어 붐이 인 게 아닙니다. 영어 능력이 스카이대 이상의 학력으로 통용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입니다. 제도도 실제로 그렇게 갔습니다. 조기 유학 갔다 오면 입학 사정관에서 잘 뽑아줍니다.
학교 교육까지 그렇게 가버리는데, 아이들이 안돌면 이상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절망하고 스트레스 받겠어요. 똑같은 방식으로 자기 친구들에게 푸는 거죠. 구별 짓기로……. 저는 우리 교육이 갈 때까지 간 거라고 봅니다. 저는 그런 방향을 기본적으로 틀어보고 싶었어요. 박근혜 캠프의 교육정책에는 그런 게 없어요. 겉으로 워딩(wording)은 그럴 듯한데, 이명박 정부와 다르지 않아요. 고교서열화를 해소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영어 교육 붐도 계속 갈 것 같고. 달라지는 게 별로 없을 거라고 봐요. 그리고 우리는 갈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대학도 심각해요. 우리나라 대학 문제는 그간에 정책적 실패들이 계속 누적되어 온 것입니다. 독일식 엘리트 교육이 일제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대학입니다. 그런데 해방이후에 대학 교육이 확산되면서 미국식 대중 교육으로 갔어요. 그런데 문제는 대중 교육 체제로 가면서도 스카이 중심으로 엘리트주의 대학 교육이 희석되지 않고 온존된 거예요. 결국은 이게 학벌을 형성했고 학벌 문화가 대중 교육으로 확산됐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는 대학의 질 관리에 실패했어요. 전두환 정권 때 졸업 정원제 실패한 게 전 크다고 봅니다. 질 관리에 실패한 상태에서 대학이 팽창해 버린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국가가 대학 교육이 확대되어도 재정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으니까 사립대학 비중이 85%정도로 확대됐어요. 그리고 이 상태에서 스카이 중심의 대학 서열화가 그대로 갔죠. 뭐, 이상한 체제가 자리 잡은 거예요.
이렇게 되니까 모든 교육이 대학에 집중되고 있죠. 직업 교육, 완전히 죽었어요. 평생 교육 얘기하지만, 완전히 소외됐습니다. 이게 지금 한꺼번에 터지는 상황인거예요. 경제도 어려워지고 학령인구가 팍 줄어버리는 상황예요. 지방의 대학들은 상황이 말이 아니거든요. 전반적으로 손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손보기 시작하면 정말 끔찍할 것입니다.
혁신학교 현장 사례 연구 지원체계가 필요하다
2000년 초에 내가 혁신학교를 중요하게 봤던 이유가 그것입니다. 혁신학교로 유명한 조현초등학교 이중현 교장이 저와 아주 가까운 후배예요. 그 학교에 자주 놀러가기도 했습니다. 이중현 교장이 처음에 그 학교 막 시작할 때, 그 친구가 농담으로 “형. 여기 내가 학교 훌륭하게 만들면 이 주위의 땅 값 올라갈 테니 땅 사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웃기지 말라고 했죠.(크게 웃음) 그런데 1년 뒤에 홍천 가는 길에 들어섰더니 현수막이 막 걸려있더라고요. 시골구석 방 한 칸에 전세가 1억이래요. 그리고 그 현수막에 “조현초등학교 전학가능” 이렇게 써놨더라고요. 왜 그러나 했더니 ADHD가 조현초등학교에 가면 6개월 만에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런 현수막이 안 올라가겠어요. ADHD로 고심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다급하고 속이 타는데요. 어떻게든 가려고 합니다. 제가 이중현 교장한테 물어봤어요. ADHD가 어떻게 낫게 되느냐고요. 그런데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그러더라고요. 하도 이해가 안돼서 몇 번을 가봤어요. 가서 보니까 그럴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한번은 가니까 꼬맹이 둘이 투닥투닥 싸웠는지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더라고요. 막 붓기도 하고요. 2학년 두 놈이 교장실에서 얘기하고 있어요. 한 놈은 원래 시골에 태어난 녀석이고, 다른 한 놈은 강남에서 얼마 전에 ADHD로 전학 온 애예요. 그 때가 초여름이었는데, 비가 부슬부슬 오고 숲에 개구리가 막 뛰니까, 전학 온 애가 그 개구리가 너무 신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거운 돌 들어내고 개구리를 잡았어요. 그리고 이걸 자기만 보겠다고 교실에 들고 들어와서 우유병에 넣고 뚜껑을 닫은 다음에 사물함에 탁 갖다 놓은 거예요. 그랬더니, 그걸 보고 있던 시골 친구가 “야, 그러면 그거 죽어. 그거 빨리 풀어줘.” 그랬는데, 전학 온 친구는 “아냐, 나는 집에 가서 나만 볼 거야.” 그런 거예요. 이래서 투닥투닥 싸운 거죠. (웃음)
자연을 보는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시골 아이는 자연을 분명한 타자로 보는 것입니다. 나랑은 다른 어떤 질서를 갖고 있어서 그걸 존중해 주어야하는 존재로 봅니다. 서울 아이는 자연을 타자로 보지 않은 것입니다. 자연을 대형 마트의 거대한 진열대로 본 거예요. 거기에서 개구리라는 상품을 가져온 것입니다. 내 욕구만 일방적으로 채우면 그만인 것입니다. 타자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정체성 형성이 잘 안 되는 거거든요. 전학 온 애들이 자연을 만나고 자연을 타자로 보기 시작하면서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우리처럼 극단적인 소비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은 늘 풍족해요. 결여에 대한 경험이 없죠. 타자에 대한 인식이 약해요. 하지만 타자를 인식할 수 있는 환경에서 개별화 지도를 하니까 실제적인 문제 해결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교사가 아이들 하나하나를 다르게 보고 지도를 하니까요. 그러면 6개월 만에 ADHD가 없어지는 게 가능하겠다 싶었어요. 혁신학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지도 방법이 맞잖아요. 저는 그런 게 혁신학교의 중요한 가능성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혁신학교의 가능성을 살리지 못하고 있어요. 몇몇 혁신학교가 우리 교육이 부딪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에 대한 답을 던지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혁신학교의 가장 큰 문제가 현장 사례 연구 지원체계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사례에요. 그러면 전문가들이 그 안에서 함께 살면서 그 사례의 내용을 추적하고 정리해내야 해요. 그걸 보급을 하고 교육 주체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해요. 그러면 그냥 지나가거든요. 언제까지 개별 교사의 헌신성에 기대어 가겠어요.
저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혁신학교를 정치적 지점에 두지 말고, 우리 아이들을 붙잡을 수 있는 해법이 녹아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나 둘씩 풀어가다 보면, 혹시 또 알아요? 밑에서 올라오는 것들이 우리 교육을 제대로 만들어가게 될 수도 있지요.
김진경 선생님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거친 바닷바람에 단련된 해송을 떠올린다. 굵고 억센 이파리, 여기저기 휜 줄기는 지난한 지난 세월을 퉁박스레 드러낸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예순을 넘길 것이고, 일흔이 될 것이다. 세상이 보기에 성공하는 사람이든, 안 되는 일로 인생 허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든, 결국은 나이를 하나하나 채워가게 된다. 나이를 하나하나 채워가면서 우리가 하는 일이란 결국, 자기 삶의 이야기를 곱게 다듬고 소중히 키워가는 게 아닐까. 그가 가꿔낸 삶의 이야기에 미안함과 고마움을 매달고 그것이 그의 열매라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가 풀어내고자 했던 이 시대 우리 교육의 매듭들이 속히 풀려 회복의 기쁨이 가득한 우리 학교가 되기를 소망한다.
“학교야, 그와 함께 웃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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