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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교육 선교의 길을 걸어갑니다(2016.10)



교육 선교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래신 (좋은교사운동 국제교육협력위원장)






인터뷰 조창완 정리 김현경

 



어린시절

제게 신앙은 피부와도 같아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제 몸이었던 피부처럼, 신앙도 마찬가지죠. 어린 시절부터 삶의 대부분은 교회에서 있었던 수련회와 농촌 봉사활동으로 채워져 있어요. 학창시절의 기억도 교회에서의 기억이 많이 차지하고 있죠. .고등학교 시절 교회 선후배와 동기들이 좀 특별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지요. 목사와 선교사가 되겠다는 선배와 친구들이 많았어요. 대학 시절에는 기복신앙이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친구들과 진짜 신앙인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토론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 중 대학부에 이광우 전도사님이 부임하면서 복음주의 신앙을 가르쳐 주셨어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들과 교회 안에서 건전하게 놀긴 했지만, 기복적인 신앙의 한계로 해결하지 못한 신앙의 문제들이 있었죠. 그때부터 기독교인으로서의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함께 복음주의 신앙을 기초로 성경공부를 했던 선배와 친구들은 어릴 때 꿈꾸었던 대로 목사와 선교사가 되었지요.

 

의료 선교는 나의 길

초등학교 5학년 때 누님이 어린이전도협회 간사였어요. 저는 그곳에서 새가족반 공부를 했었죠. 그때 허드슨 테일러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어요. 정말 감명 깊었고, 이 선교사님처럼 하나님 전하면서 사는 게 값지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 뒤로 제 꿈은 의료 선교사였어요. 한 번도 흔들리거나 바뀐 적이 없었죠. 의료 선교를 하기 위해 먼저 의사가 되어야 했어요. 하지만 실력이 그만큼이 안 되어 의대 가는 것이 계속 좌절되는 거예요. 결국 재수 끝에 수의학과에 입학했어요. 지금은 전문인 선교가 흔하고, 실제로 동남아시아나 중동으로 많은 수의사가 선교사로 가기도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게 없었거든요. 수의학과 선교의 연결점이 없었어요. 그래서 많이 방황했어요. 전공필수 과목을 F를 맞기도 하고요.

저는 제2의 대학 생활을 31살에 시작했어요. 오랜 준비 기간이 있었죠. 군 생활을 하면서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제대를 앞두고 고심 끝에 대입시험을 다시 치르기로 했어요. 수능을 무려 6번을 치렀죠. 매번 의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어요. 죽고 싶은 심정이었죠. 수능을 준비하는 6년 동안 저를 많이 지원해주셨던 둘째형님이 저를 관찰하고는 아이들 돌보는 것을 잘하는 것 같으니 교대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요. 그땐 화가 났어요. 제가 6번이나 수능을 본 이유는 의대에 가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결국 교육대학교에 지원하여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기도를 많이 했어요. 의대가 아니라 교대에 가는 것이 맞는지 질문을 많이 했죠.

 

교사도 선교할 수 있다

새롭게 다니는 대학에서 처음에는 하나님이 왜 나를 교대에 보내셨는지알지 못하고 1년을 다녔어요.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교대 입구에 교사선교회가 붙여 놓은 하나님은 당신을 교사로 부르셨습니다라는 플랜카드를 보고 어렴풋한 울림을 받았었죠. 학교를 다니는 동안 선교와 교사와의 관계를 찾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과제였어요. 31살에 교대생이 된 저는 20대에 하지 못했던 IVF 활동을 하면서 1학년 겨울방학에는 중국으로 선교여행을 다녀왔어요. 그곳에서 저는 드디어 선교에 대한 비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여행 일정을 마칠 즈음, 선교사님이 교대에 다니는 저와 선배 한 명을 따로 부르셨어요. 중국에 자신의 아이를 보낼 학교가 없다고 하며, 이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 되실 분들이 나중에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제게 이 사건은 선교와 교육을 연결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정말 새롭게 비전을 발견한 기분이었어요. 이후 대학 생활은 즐거움 가득한 시간이었고 공부도 열심히 할 수 있었죠.

 

초임 시절

돌이켜보면 제가 노량진에서 수능을 준비했던 6년이 초등교사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하나님이 주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죠. 군 후임들이나 전주 친구들, 수의학과 다닐 때 친구들이 저를 만나러 노량진으로 많이들 와줬어요. 격려하고 기대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었다고 하는 친구도 있었죠. 어쨌든 제가 친구들 만날 때마다 했던 말은 이거예요. “내가 내 욕심에 하는 거 아니고 의료선교라는 비전을 위해, 하나님이 부르셔서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스스로 다져졌던 것 같아요. 내가 공부를 하는 목적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늘 상기할 수 있었어요. 한편 공부하는 동안 9만 원짜리 방에서 몇 년씩 살다보니 점점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웠어요. 그때의 광야생활이 지금 교사가 된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아요. 실패한 경험이 많아서 아이들을 대하는데 더 좋은 점이 많아요. 참 감사하죠.

저는 35살에 처음 교직을 시작했어요. 제가 교육선교사가 된다면 중앙기독초등학교(중기초)가 가장 좋겠다고 생각해서 중기초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죠. 사실 신규시절의 저를 떠올리면 나이든 초년병이 실수했던 모습이 많이 떠오릅니다. 자신감이 넘쳐서 교실에 갔는데, 교실은 정말 현실이었어요. 아이들을 교실에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시절이었어요. 옆 반 선생님들 보며 많이 배웠죠. 초임은 나이가 많든 적든 똑같더라고요. 초임 때 부정적인 경험은 독이기 보다 약이라고 생각해요. 그곳에서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게 진로에 있어서 큰 문제는 선교를 왜하느냐 보다도 의료 선교냐 교육 선교냐 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방향이 정해지니 오히려 딱 좋았지요. 하나님이 저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저에게 광야 시간을 거치게 하시고 교사가 되게 하시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 돌아보면 제게 교사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장 잘 드러내는 직업 같아요.

 

교육 선교의 청사진을 그리다

200710월쯤 교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어요. 시리아의 한 선교사님이 찾아오셔서 시리아 방문을 권하셨죠. 20081월에 3주 동안 조카와 함께 시리아와 요르단을 보고 왔어요. 그 땅을 실제로 밟고 바라보면서 MK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해 5월 원천침례교회 선교 담당 목사님이 찾아오셔서 알바니아로 선교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하셨어요. 사실 그때는 시리아에 가기로 결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당황했지만, 8월에 있는 알바니아 MK 캠프에 다녀와서 기도하고 결정하겠다고 했어요. 알바니아에 있는 동안, MK뿐 아닌 현지인 아이들도 만나면서 이곳에서 사역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지금 좋은교사운동에서 제가 하는 교육 선교에 대한 생각들은 알바니아에서 3년 동안 경험한 것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선교지의 선교사가 학부모로서 겪는 어려움은 한국의 학부모가 겪는 어려움과 다른 것이었어요. 또한 교사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자라온 문화적 배경이 다른 선교지의 아이들과 한국의 아이들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러면서 점차 선교지와 선교사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어요. 사실 한국에서 선교지를 바라볼 때는 오해할 만한 상황이 많았는데, ‘저분들이 저럴 수밖에 없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교사를 필요로 하는 선교지가 많다는 것을 한국의 교사들이 알면서도 무관심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렇게 교육 선교에 대한 중요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어요. 알바니아에서의 생활은 앞으로의 청사진을 그리는 의미있는 시간이었죠.

 

교사의 선교 시대

알바니아에서 교사 선교사로 3년을 살면서 가장 많이 고민한 것이 MK의 교육문제를 해결할 방법이었어요. 선교지에는 교육의 혜택이 필요한 MK가 많지만 이들을 가르칠 교사는 늘 부족하지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교사를 선교에 동원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20127월에 귀국했어요. 선교한국과 기독교사대회에 참가하면서는 절망하기도 했어요. 한국에서 교육선교를 이야기하기에는 한국교회와 선교단체, 좋은교사운동이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를 풀기에도 벅차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기독교교육에 대한 소명을 주셔서 새로남기독학교에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201310월에 새로남교회에서 제13차 의료선교대회가 진행되었어요. 이 행사를 보면서 왜 교육선교대회는 없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문인 선교가 본격화되면서 의료선교대회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선교와 관련된 대회가 많이 진행되고 있지만 교육과 관련된 선교대회를 아직까지 본 적이 없었어요. 선교지에서 교육 선교를 하고 계신 선교사님이 많고, 그분들께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으나 실제 교육 전문인들로 구성된 선교대회가 진행된 적은 없었죠.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2014년 대전 인도단기선교팀에 MK 사역을 나누기 위해 초대 받았다가 박정경 선생님과 박윤환 선생님을 만나 교사선교대회에 대한 비전을 나누게 되었지요. 이후 20151월 인도단기선교를 다녀오신 두 분이 교사선교대회에 대한 비전을 함께 하고 싶다고 말씀해주었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좋은교사운동의 선교 담당선생님들과 함께 교사선교대회를 위해 기도하며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는 1022일에 있는 교사선교대회예요.

교사선교대회는 교사가 중심이 되어 진행하는 첫 번째 선교대회로 선교지의 다양한 교육적 필요를 교사들에게 알리고 교사들을 동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동안 진행되어 온 MK 사역은 물론 현지인 사역의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고 도전을 주는 것이 목적이지요.

 

좋은교사의 새로운 열매

동아프리카 기독교사대회는 좋은교사운동이 낳은 첫 열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2013년 정병오 선생님께서 김두연 선생님의 권유로 아프리카에 다녀오신 후 케냐의 존 가투쿠와 제임스 무리유키를 2014 기독교사대회에 초대하면서 이들이 도전을 받은 것이죠. 그동안 여러차례 시도하다 실패하였던 기독교사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사대회를 보고 비전을 가지고 추진하였고 특히 이번 대회에 주제강사로 정병오 선생님을 초대하여 기도의 힘이라는 주제로 그동안 좋은교사운동이 20년동안 기도로 이룬 성과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는 한국의 좋은교사운동이 아프리카에 기독교사대회를 심어 열매를 거두게 한 첫 열매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좋은교사운동이 아프리카의 기독교사를 돕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프리카의 상황은 한국의 상황과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당장 가난의 문제뿐만 아니라, 질병, 전쟁, 종교분쟁, 아동 노동, 부정부패 등 총체적인 문제를 안고 있어 단순히 한국의 교육적 자료나 시스템을 가지고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죠. 따라서 이번 동아프리카 기독교사대회처럼 그들 스스로 기도와 협력으로 교육을 통해 자신의 나라를 바꿔갈 수 있도록 협조하는 방법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존 가투쿠와 같은 현지 교육가들과 많은 대화를 통하여 아프리카 현지의 실질적인 교육 문제와 국가 문제를 파악하여 실현 가능한 것부터 돕되 현지인들 스스로 그 방법을 택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좋은교사운동은 철저히 조력자 역할을 해야하지요.

 

10년 후에 어디에서 무엇을

10년 후 저는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동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의 교육 선교를 위해 일하고 있을 것 같아요. 제가 2012년 알바니아의 사역을 마치고 돌아오던 해에 CGN 뉴스의 인터뷰에서 동유럽의 MK 교육 선교에 대한 내용을 언급한 적이 있어요. 2011년과 2012년에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등 동유럽 국가에 있는 MK 상황을 소개하며 동유럽 교육 선교는 학습 센터를 통한 방과후 학교순회교사제도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지요. 이 센터는 불가리아에서 동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의 교육 선교 지원을 위해 중요한 기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센터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것이 10년 뒤에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진 것이 있어요. MK 선교보다 현지인 선교에 대한 마인드가 더 강하여졌어요. 현지인 교육 선교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과 계획을 더 많이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 센터를 MK뿐만 아니라 현지인 교육 선교를 위한 현장 지원 기관으로 운영하는 것이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