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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늘 그러했듯이, 사람을 세우는 삶(2016.7)

아이들과 함께 삶을 보내는 것은 나를 깎아 내어 디모데들을 내 가슴에 심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가 디모데들을 양육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사람이 보는, 그런 놀라운 경험을 어디서 할까요? 후배 선생님들에게 꼭 권면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양육을 해야 합니다.


 


늘 그러했듯이,


사람을 세우는 삶


주약초등학교 정임준 선생님

 

 



인터뷰·김만호, 주종호 / 정리·김현경

 


하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1989년 가을, 진주교대에 입학한지 2년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제가 지금 사역하고 있는 GT선교회의 전신인 후세대선교회가 학교 주변의 작은 교회 청년부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갓 시작한 선교회였지만 그곳에서 활동하고 훈련받으면서 , 하나님께서 나를 교사로 부르셨구나!’하는 소명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교사선교사로서의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죠. 그 후 몇 안 되는 동기, 선후배가 함께 모여 교사선교사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을 나누면서 선교공동체로 자라가기 시작했고 교육현장에 역사하실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발령 받았던 학교는 통영 바닷가의 작은 시골 학교였습니다. 대부분 도시로 떠나고 농사일과 고기잡이로 힘든 생활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많이 사는 동네였습니다. 우리 반 열두 명 아이들은 다들 순진하고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이었죠. 무엇보다 복음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선생님이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배운 찬양을 어디에서든 목청껏 부르는 아이들이었습니다.

GT선교회의 모든 교사들은 매년 만나는 학생을 대상으로 학부모의 동의를 얻어 디모데모임이나 기독동아리 활동을 통해 제자삼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첫 학교에서 디모데모임을 신청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양육을 시작했죠. 방과후 교실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성경읽기와 암송, 큐티 등을 하면서 디모데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감선생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정 선생, 지금 교장선생님께서 찾으니 교장실로 오게.” 하시는 겁니다. 가보았더니 책상에 교육법전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교육법전을 짚어가며 학교 내에서는 어떤 형식으로든지 포교활동이나 편향된 종교활동을 할 수 없고 교사는 중립적인 자세를 고수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말씀으로 훈련시키고 교육하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디모데모임을 인근교회에서 실시했습니다. 네 명의 디모데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아이 세민이는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5년 간 양육했습니다. 세민이는 저도 선생님처럼 복음을 전하는 선생님이 되고싶어요.” 라고 고백하였죠. 결국 교사가 되어 저를 찾아왔습니다. 세민이는 지금도 저에게 힘이 되는 제자입니다.

 

내 삶의 나침반이 된 광표와의 만남

두 번째로 부임해 간 학교는 통영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학교였습니다. 시내의 작은 언덕에 있는 이 학교 앞에는 당시 가장 부유한 사람들만 사는 고급 아파트가 있었고 학교 뒤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작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묘한 대조를 보였습니다. 아이들의 형편도 상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곳에서도 디모데모임 신청을 받았는데, 여덟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신청을 했습니다. 이 학생들은 대부분 앞 동네의 부유한 집 아이들이었어요. 공부도 잘하고 암송이나 성경읽기, 과제도 척척 잘 해왔습니다.

그 중 유난히 눈에 거슬리는 한 명이 있었습니다. 바로 광표였어요. 광표는 개학 첫 날 왼쪽 새끼손가락에 붕대를 둘둘 말고 있었습니다. “손은 왜 그러냐?” 물었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이 잘렸는데 못 찾아서 그냥 이렇게 하고 다녀예.” 하면서 히죽 웃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광표는 글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고 말도 정확하게 할 줄 몰랐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다른 디모데들과 달리 광표는 양육 과제를 거의 해오지 않았습니다. 모임 중에도 다른 소리를 하고 딴 짓을 했죠. 일 년 내내 광표만 없으면 정말 좋겠는데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광표는 그렇게 일 년 동안 디모데양육을 받고 디모데캠프에도 오면서 모임을 지속해 나갔습니다.

광표는 졸업을 하고 저도 다른 지역으로 학교를 옮기면서 광표와 연락이 끊겨 버렸습니다. 그 사이에 저는 결혼을 하고, 예비교사를 세우는 사역에 집중하면서 수년을 보냈죠. 광표와 헤어지고 5년이 되던 해에 어떻게 제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광표가 저에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진주 시내의 햄버거 가게에서 광표를 만나 햄버거와 치킨을 먹으면서 두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광표는 졸업 이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금은 고등부 회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 열심히 기술을 배워 나중에 작은 카센터를 운영하면서 생기는 수입으로 가난한 사람도 돕고 선교사를 후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포부도 말했습니다. 저는 두 시간 내내 충격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눈을 들어 광표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날 광표와 만나며 내가 본질이 아니라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그분이 본질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사는 대단한 일을 보여주는 자가 아니라 위대한 하나님께서 아이들의 삶을 주관해 가실 수 있도록 통로 역할을 감당해야하는 도구여야 합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판단은 끼어들 틈이 없어야 하죠. 하나님께서 광표를 통해 주신 교훈은 교사선교사로 살아갈 제 평생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접붙임 받듯이

광표와 만나며 또 지금까지 교사선교사로 아이들을 만나며, 양육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아이를 성장시키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앞선다면 실패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어떠하든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이 아이의 삶을 이끌어 가시길 구하며 양육했다면 그 양육은 성공입니다. ‘아이들이 어떠한가를 내가 평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실까 계속 고민합니다.

후배 교사에게 학생 양육이 중요하다고 꼭 이야기합니다. 이거는 명령이잖아요.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교사로 불러 주셨잖아요. 내가 교사로 부름 받았다는 거 자체가, 내가 하나님의 귀한 사명과 사역을 교육현장에서 마땅히 감당해야한다는 명령입니다.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일에 임합니다.

더군다나 이 일은 큰 짐이나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혜택과 축복입니다. 양육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공부가 아닙니다.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 아주 실제적인 변화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삶을 보내는 것은 나를 깎아 내어 디모데들을 내 가슴에 심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가 디모데들을 양육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사람이 보는, 그런 놀라운 경험을 어디서 할까요? 후배 선생님들에게 꼭 권면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양육을 해야 합니다. 간과 쓸개를 다 빼주지 않으면 양육에 성공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나의 삶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동역자 삼아주신다는 영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함께 교사선교사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만만치 않은 도전, 그러나 새로운 역사의 길

요즘 학교에서 직접적으로 아이들에게 복음 전하고 양육하는 것이 참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아이들은 방과후에 줄줄이 대기 중인 학원과 과외 때문에 시간이 없습니다. 학부모들은 학생들과 성경공부 한다고 하면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합니다. 급증하는 학교 업무, 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요구 조건 등은 우리를 늘 바쁘고 여유 없게끔 몰아갑니다.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받은 상처로 몸부림치느라 양육은 아예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기도 합니다. 학교와 교육청 등은 잦은 민원 때문에 촉각이 곤두서, 학교 안에서 복음 전하는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교사를 몰아붙입니다. 게다가 최근 팽배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좋지 못한 시각은 더욱 우리 기독교사를 위축시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상황이 도리어 하나님의 다양한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동력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수업시간에는 창세기 한자이야기, 독서활동·창체시간을 활용한 창조론이야기, 성경 지식을 활용한 놀이 등으로 간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학교를 중심으로 모이던 디모데양육도 선생님의 가정이나 학부모 가정, 인근의 교회에서 하거나 그 교회 주변에 있는 선생님들이 모여서 연합으로 모이는 방법으로 시도하고 있습니다. 담임 주도로 하던 디모데양육을 학부모와 지역의 목회자와 같이 동역하게 되기도, 지역별로 디모데모임을 하는 선생님들끼리 모여 양육과 친교활동·특별활동을 병행하는 토요디모데학교(토디학교)’가 생겨나 자리를 잡아가기도 합니다. 중등의 경우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역량이 되니 기독동아리반, 큐티반 등으로 학교나 학생들의 상황에 적합하게 운영하거나 일부 선생님들은 시간을 내서 디모데양육을 따로 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박해가 복음의 능력을 더욱 확장시키는 동력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사로서 당하는 여러 어려움은 우리가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해줄 동력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영원한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알려주듯, 교육현장에 서 있는 우리는 끊임없이 어려움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은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절대소명입니다.

 

서로 사랑하기, 피 흘릴 정도로 힘든 일

제가 속한 GT선교회 사역의 큰 줄기는 공동체입니다. 선교회 초기부터 품고 있었던 비전이죠. ‘성경을 바탕으로 교육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장이 되는 교육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모였습니다. 몇몇 지체들과 전세금을 털고 빚을 내서 19981,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방어산 자락에서 공동체를 시작했어요. 많은 오해를 받기도, 충고를 받기도 하며 우여곡절 끝에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초기 공동체의 삶은 우리가 생각했던 환상을 완전히 깨뜨리고 우리는 철저히 이기적이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공동체로 살기 시작하면서 그저 선교회의 일원으로, 모임 속에서는 보지 못했던 상대의 더 깊은 부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고, 상대방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우리가 생각하는 공동체의 이상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견디는 것이 고작이었죠. 공동체를 포기하자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에 더 많은 지체를 모이게 해주셨고, GT를 품고 지원하는 교회도 생겨 선교회의 사역을 효율적으로 지원하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견디기만 한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멈추지 않고 역사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18년이 흘렀습니다. 오랜 시간 공동체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지체들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사랑하기 까지 이르는 것그리고 우리의 다양성과 그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피 흘리기까지 자신과 공동체의 연약함을 안고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알게 된 것 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본성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진실하게 나눌 때 놀랍도록 풍성한 공동체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동체를 통해 기막히게 그분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을 목도하는 복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를 포기하고 공동체로 살아가기로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밀한 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의 삶은 에덴동산에서부터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악한 영이 이런 가치를 세상의 문화로 희석시켜 놓았지만 반드시 회복해야할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공동체에서 사는 평생이 처음의 이상과 멀찍이 떨어진 고통과 눈물의 삶이라 하더라도, 온전한 공동체의 삶을 단 하루 누릴 수 있다면 추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이런 공동체의 가치를 학교현장에서 나누고 적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부부의 새로운 도전, 그리고 새로운 사랑

우리 부부는 올해 9월부터 새로운 사역에 헌신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16년 째 농촌 사역을 해오던 선교사인 친구가 최근 우리 선교회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십 수 년 동안 양육해 오던 현지인 제자들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자, 자연히 그 자녀들이 다녀야 할 학교 상황이 눈에 들어 온 것이었습니다. 열악한 학교와 교육 상황, 성년이 되기 전 수 년 동안 기숙하며 승려 교육을 받을 정도로 뿌리 깊은 불교문화 속으로 제자들의 2세를 보내자니 친구 선교사의 마음이 조급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운영하는 2만여 평의 선교센터 부지에 스텝들의 집을 짓고 유치원을 세웠습니다. 유치원은 어떻게 해보겠는데 그 다음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우리 선교회에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과정을 기독교 정신 위에서 세울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전부터 하나님이 우리 부부에게 캄보디아 영혼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심어주셨던 것을 생각하며, 이 사역에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준비하는 일 년 동안 확신보다는 불안과 의심이 들었습니다. ‘과연 내가 현지 상황에 적합한 기독교 학교를 세울 수 있을까?’, ‘언어도 잘 안 되는 데 교사 훈련은 어떻게 시키고, 그들을 어떻게 기독교사로 세울 것인가?’, ‘국민의 거의 100%가 불교 신자인데, 뿌리 깊은 문화를 어떻게 극복하고 대처할 것인가?’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광활한 사막에 고작 물 한 병을 붓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친구 선교사를 통해 세워진 교회 주일학교에서 성장한 7명의 학생이 프놈펜사범대학과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올해 초 탐방 기간에 이들과 만나 짧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갈 마중물이구나!’하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에게 나의 일을 위해 너희가 통로가 된다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 줄 것이다.” 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하려고 걱정했던 실수를 주께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부부는 평안 가운데 이 사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일하심의 통로가 되는 삶은 우리 부부 선교사역의 지침입니다. 우리 부부가 캄보디아에서 핵심적으로 할 사역은 여기 한국에서 늘 그러했듯이 학교를 세우는 일보다 사람을 세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언어 공부를 하면서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대학 생활을 하는 사범대 학생들을 섬기고 양육하는 일을 감당할 것입니다. 또한 이들과 함께, 세워진 유치원을 중심으로 초등학교와 중등으로 이어지는 학교의 근간을 이루는 작업과 학교설립을 위한 구상을 해 나갈 생각입니다. 또 캄보디아에서도 공동체의 삶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 학교가 온전한 교육공동체로 엮어져 하나님의 사람들을 키워 나가고 건강한 공동체로 성장하는 것은 제가 오래 전부터 꿈꾸어 왔던 일입니다. 지금도 그 것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가슴이 설렙니다. 물론 선교현장의 여러 상황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예상은 합니다. 두려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에 우리의 남은 생애를 바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도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움직임이 해외 교육선교에 대한 새로운 모델이 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대안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끝으로 우리 부부가 겁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늘 우리 뒤에서 기도로 힘을 실어주고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부의 도전이 공동체에게 하나님의 일하심과 영적 시너지를 일으키는 통로가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