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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나를 교사로 부르시고 기르시는 하나님(2016.9)

내게 맡겨진 영혼 한 명 한 명이 생명력 있게 살아가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온 맘 다해 사랑으로 품고 섬기는 일을 정말 제대로 하고 싶어요.



나를 교사로 

부르시고 기르시는 하나님




안미영 (광주 봉선초등학교)


인터뷰 조창완 / 정리 김현경

  


언니의 담임선생님

저는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나 한 번도 광주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완전 광주 토박이예요. 이발사이신 멋쟁이 아버지와 늘 헌신적이신 어머니의 사랑 받으며 유복하게 자랐어요. 딸 셋 중 둘째였는데, 신앙이 없는 가정에서 맨 먼저 제가 교회에 발을 딛게 된 계기가 있어요. 3 때 두 살 위인 언니가 학교에 다녀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선생님께서 성경책이 집에 없는 사람은 가져가서 꼭 읽어보라고 한 권 주셨는데, 꼭 읽어봐야 할 것 같다고, 그리고 하나님은 있는 것 같다고요.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에, 일단 교회를 다녀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친구 은정이가 다니는 늘푸른교회에 따라가게 되었어요. 그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늘푸른교회에서 배우고 자라며 이렇게 살아왔네요.

돌이켜보니 직접적이진 않았지만 언니의 담임선생님이 실천하신 신앙 나눔과 용기가 제 믿음의 씨앗을 틔우는 역할을 해 주셨다고 확신해요. 그 선생님을 통해 저를 푸른 영적인 초장으로 인도하신 은혜에 너무 감사하고요.

 

교사의 길에 발을 딛다

2 때 주일학교 예배 반주를 맡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중3 때부터는 주일학교 교사도 하게 되었어요. 교회 규모가 작다보니 학생 청년들이 무엇이든 맡아서 해야 했지요. 예배 반주를 하다 보니 실력이 늘어 성가대 반주도 할 수 있게 되었고, 3 때도 예배 반주와 주일학교 교사를 쉬지 않았어요. 봉사가 그다지 힘들지 않았고 공부에 방해된다고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입시를 앞두고도 배움의 기쁨을 느끼며 공부했던 것 같아요. 주님의 은혜가 있었던 거죠. 확실한 꿈은 없었는데, 막연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서울대 국어국문과를 목표로 공부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수능 보기 3일 전에 크게 아파 최악의 컨디션으로 수능을 쳤고 결국 평소 모의고사 점수보다 30점 가량 낮게 나왔어요. 서울에 있는 사립대 가는 것은 가정의 경제적 부담이 큰지라 서울 가는 것은 서울대일 때만 간다고 어머니와 약속해둔 것이 있어서, 결국 광주에서 갈만한 곳은 전남대와 교대밖에 없더군요.

어머니도, 담임선생님도, 그리고 목사님도 제가 교대가기를 계속 권하셨어요. 하지만 교사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정도로만 하고, 직업으로서의 교사는 안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었어요. 답답해 보였달까요? 게다가 그때 당시 IMF 이후로 교대 인기가 엄청 치솟고 있을 때였는데, 비전도 확실치 않은 제가 남들 가는 교대에 가겠다는 것이 더욱 탐탁지 않았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교사의 길이라면 교사 하고픈 마음을 주시라고. 그 때 목사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가르치는 현장에서 써진 글이 더 귀할 수 있고 교사 하면서도 충분히 글을 쓸 수 있다고, 내가 목사가 안 되었다면 난 진짜 교사가 하고 싶다고, 많은 아이들 만나 그 영혼 보듬고 살릴 수 있는 그런 귀한 자리가 어디 있냐며 권면하셨죠. 그 말씀을 들은 후, 저는 오인숙 선생님의 교육서를 집어 읽기 시작했어요. 주변의 말보다 내 안에 확신이 드는 것이 갈급했기에 내게 교사의 자리를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라고 간절히 구하면서요.

결국 뜻을 정하여 광주교대를 썼는데, 처음에는 불합격이었어요. 보결 5번으로 간신히 합격했죠. 목표했던 학교도 못가고, 교대도 겨우 붙은 나 자신을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없어서 많이 속상했어요. 3 내내 기쁘게 주일성수 했고 열심히 하나님 섬겼는데 왜 이런 결과밖에 안 주셨을까 생각했죠. 내 의와 능력을 의지하는 삶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는 모습을 바라셨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청년의 때에 이 일 저 일로 방황하기 쉬운데 교사의 길 가운데 내 달란트를 꾸준히 키워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일찌감치 손 써 주신 거였어요. 정말 감사했지요. 다행히 대학 생활도 즐거웠어요. 빡세고 잡다한 교대 교육과정에 지칠 뻔도 한데, 배우는 내용들이 유익하다며 공부했었거든요. 또 교회에서 반주 했던 것이 교대생으로서 그렇게 큰 힘이 될 줄은. 교수님들께 예쁨 받으며 교사로서의 자질을 잘 배우고 익혔던 시간들이었어요.

 

아내, 엄마, 며느리 그리고 합창하는 교사

저는 교사보다 엄마가 먼저 되었어요. 2 때부터 지금의 남편인 교회 오빠와 이른 연애를 시작했고, 불타는 사랑 끝에 대4였던 2003년에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같은 해에 큰 딸 보은이도 낳았고요. 1년 휴학하며 일단 엄마로만 살았어요. 남은 한 학기를 다닐 때 임용을 볼지 말지 고민이 많았었는데, 결국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아 임용을 준비했고 광주에서 250명을 뽑는데 제가 250등으로 문을 닫고 들어가게 되었어요. 논술, 면접, 공인 영어 시험 점수 등 모든 조합이 딱 턱걸이 할 만큼이었던 거죠. 시험을 위한 공부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공부하는 기간 동안 아는 척 하지 않고 저를 위해 화요기도회 때마다 묵묵히 기도해주었던 여전도회 언니들께 정말 감동했었어요.

남편은 장남이었는데, 위로 누나가 5, 남동생이 1명 있고, 아버님은 회갑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고 시어머니만 계셨어요. 게다가 어머님은 파킨슨병을 앓고 계셔서, 늦게 얻은 아들이 어서 장가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하는 입장이었어요. 신혼 3년을 보내고 난 후, 저희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었어요.

합칠 때가 20063월이었는데, 1년간 발령 대기하다 딱 발령을 받은 시기와 맞물려있었어요. 26살에 사회 초년생이면서 아내, 엄마, 며느리 역할을 겸해야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린 나이에 어찌 살았나 싶어요. 나만 위하며 편안하게 살았던 어린 내가 일찍부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타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단단하게 세워 가시는 과정이었다고 느껴져요. 8년간 모시고 살다가 현재 시어머니는 병세가 악화되셔서 요양병원에서 생활하고 계시고 매주 찾아 뵙고 있어요.

저는 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하고 마는 성질이 있어요. 교회 반주를 계기로 잠자고 있던 제 음악적 소질을 깨닫고, 그 부분을 키워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내 기쁨도 얻고자 했어요. 1 때부터 교회에서 어린이성가대를 꾸렸고, 노래를 제대로 배워야 가르칠 수 있겠다고 느껴 교대에서 운영하는 레슨 제도를 활용하여 성악 레슨을 결혼 전까지 꾸준히 받았어요. 제대로 배우니 노래하는 것이 너무 즐겁더라고요. 발령 받고 나서는 학교에서도 합창단을 꾸려보고 싶어 첫 발령지인 광주양동초에서 없는 합창단을 만들어 열심히 가르쳤어요. 성악 레슨을 해주셨던 선생님께 지휘법도 다시 제대로 배우고 여러 모양으로 피드백 받으면서 좋은 성과도 거두었어요. 대부분의 교사들이 감히 나가지 않는 호남예술제에 출전해 바로 금상을 수상하기도 하고, 광주시립소년소녀합창단 정기연주회에 찬조출연 하기도 했어요. 열정을 쏟아 부은 만큼 얻어지니 합창이 재미있었고 교사의 재능을 아이들에게 흘려보내는 것이 또한 가치 있으므로 참 감사했어요.

가정에서 학교에서 여러 역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게 꽂힌 합창에 가장 열과 성을 다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4년 만기도 차기 전에 기회가 되어 두 번째 학교인 금부초로 합창 초빙교사를 가게 되었어요. 엄마로서는 학교를 옮기기 바로 전 해에 아들 결을 낳았고, 2010년에는 벌써 딸을 학교에 보낼 학부모가 되었죠. 금부초에 근무하면서 초등음악교육 전공으로 대학원도 가게 되었고, 딸의 학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연구도 하게 되요. 학원 보내지 않고 엄마표로 영어고 수학이고 시켜보겠다고 무척이나 애쓰던 시기였어요. ‘잠수네방법으로 딸의 영어 공부를 챙긴다며 영어 원서와 DVD를 무던히도 사 모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교사의 삶에 대해서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학급운영과 수업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던 금부초에 근무하면서, 또 대학원에서 초등음악교육 전공 공부를 하면서, 교사인 나의 정체성을 돌아보기 시작했어요. 내가 아무리 합창지휘를 잘 해도, 나는 지휘자가 아니라 교사이고, 음악 수업은 전혀 고민하지 않으면서 합창의 기능만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저를 보게 되었죠. 교사의 참된 역할은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것인데, 나는 과연 그 일을 제대로 하고 있나? 물론 나름 수업도 늘 열심히 했고 반 아이들과도 좋은 관계로 즐거운 학교생활은 하고 있었기에 만족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합창단 연습 때문에 아침 시간을 반 아이들과 충분히 함께 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늘 아쉬움이 있었고, 무엇이 옳은가, 가치 있는가, 내 본연의 역할은 무엇이며 나는 왜 합창을 하는가 등의 질문들을 나 자신에게 계속 던졌어요. 내 만족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이들을 위한 교사의 삶은 진정 어때야 하는지 돌아보게 되었죠.

 

좋은교사 그리고 교사선교회(TEM)와의 만남

금부초에 근무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제 주변의 소중한 분들을 통해 저를 부르고 계셨어요. 협동학습을 열심히 연구하던 박순정 선생님과는 2년간 동학년을 하며 많은 교육적인 노하우들을 배웠었고, 그 분을 통해 좋은교사운동을 알게 되어 바로 회원이 되었죠. 또한 회복적 생활교육으로 학급을 따뜻하게 운영하시고, 반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양육을 하신다는 현광미 선생님의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며 마음에 큰 도전을 받기 시작했어요. 이것처럼 값지고 귀한 일은 없는데 나는 이것을 놓치고 내 만족만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였어요. 제게 보배와도 같았던 현광미 선생님께서 2010년에도, 2012년에도 기독교사대회를 가자고 강권하셨지만 대학원 핑계로 전 두 번의 기독교사대회를 놓치고 말죠. 내 자식 키우는 일에, 대학원 공부에 우선 순위가 있었던 터라, 마음의 부담은 한 곳에 있었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교사로서의 사명과 본분은 뒤로 한 채 계속 길 잃은 청지기마냥 살았던 거지요.

합창 초빙교사의 임기를 마치고 2013년에 저의 모교였던 봉선초로 부임해오게 되었어요. 일단 내 학급 학생들에게만 집중하기로 하고 학교생활을 하는데, 홀연히 다가온 아가씨 선생님이 있었어요. 지금 저의 최고의 동역자 서희 선생님이죠. 학교에서 친목 배구를 하던 중이었는데 서희 선생님이 제게 어떤 모임을 알게 되었다고, 그 단체가 10년 넘게 광주 개척을 위해 기도해왔는데 이제야 광주에 모임이 시작되었다면서 자매팀 양육 때 한 번 와보면 어떻겠냐고 권하더라고요. 기독교사들이 서로의 삶을 나누고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데 너무 은혜가 된다면서 자랑을 하더라고요. 그 모임이 바로 교사선교회(TEM)의 양육모임이는데 그때는 일단 내키지 않았어요. 어떤 모임이든 시작하면 지속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망설여졌거든요.

2014년이 되어 현광미 선생님의 이야기들, 그리고 대회참여를 권하시던 모습이 아른거려 기독교사대회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서희 선생님에게 제가 먼저 가자고 권했지요. 그랬더니 우리 TEM에서도 꼭 가라고 하셨다면서 흔쾌히 함께 가겠다고 하였어요. 그 후로 희에게 전해 듣기만 했던 TEM의 홈페이지도 들어가 보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2014년에 처음으로 간 기독교사대회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어요.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제 손수건을 가득 적셨던 것 같아요. 주강사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신앙 없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던 제 삶을 많이 깨우쳐 주셨어요. 나를 교사로 부르신 건 하나님이신데, 내가 왜 내 멋대로 교사를 하며 살았을까? 한 영혼 한 영혼을 품고 사랑하고 가르치는 일에 무게를 싣고 살아오지 못한 나를 깊이 돌아보게 되었죠. 또 학급제자양육에 관해 한은혜 선생님이 특강을 해주셨는데, ‘어떻게 저렇게 여리여리한 선생님이 배불러서도 버스타고 다니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금까지 애들을 양육할 수 있었을까? 저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고 저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인데, 그걸 내가 너무 잊고 살았구나생각하게 되었어요. 선택강의는 복음의 능력으로 회복하는 제자 양육을 들었는데 이것이 가장 가치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해서 사전에 선택했었어요. 학급의 제자들 중 희망자를 디모데로 삼아 꾸준히 양육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고, 이 일을 30년 넘게 가장 열심히 체계적으로 진행해 온 단체가 TEM이였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어요. 또 특강하셨던 한은혜 선생님도 TEM 소속이고, 내 옆에 있던 희도 이곳에 속해서 이미 디모데 양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알게 되었어요. 이 모든 것들이 맞물려져 TEM에 대한 제 마음이 확정되도록 하나님이 이끄셨던 것 같아요.

대회 마지막 날 공동체끼리 모이는 시간에는 저는 드디어 TEM 모임에 갔어요. 이미 마음 안에 이 공동체에 딱 붙어있어야겠다는 결단과 확신으로 갔지요. 그 이후, 매주 우리를 양육하시기 위해 익산에서 내려오시는 김은경, 방호동 선생님의 헌신을 본받아 저도 이곳에 우선순위를 두고 제자를 양육하고 교사를 양육하는 일을, 나아가 광주교대 캠퍼스를 섬겨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지요. 매주의 양육모임과 매달 별무리예배를 통해 우리 TEM 선생님들과 은혜를 함께 나누며 2014 기독교사대회 이후 에도 죽 교사로서의 소명감을 유지하고 있어요.

 

주님이 나를 기르신 것처럼

대회 마치고 돌아와 서희 선생님이 디모데양육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도 2학기 때부터 꼭 해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우리 반 아이들 앞에 크리스찬 선생님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너무 부끄러워서 도저히 선발을 못하겠더라고요. 결국 그렇게 한 해를 마치게 되었는데, 종업식날 몇 여자 친구들이 저와의 헤어짐을 너무 슬퍼하더군요. 특히 엄마가 돌아가신 아이, 부모님이 이혼한 아이, 두 아이가 그렇게 서럽게 울더라고요. 비록 버럭버럭 화도 잘 내고 부족함 많은 저였지만 제가 엄마처럼 의지가 되고 좋았었나 봐요. 저는 용기를 내어 그 두 친구와 마음이 계속 갔던 몇 친구에게 선생님이랑 매주 만나서 양육 받아볼래?” 하고 개별적으로 물어보았어요. 부모님 허락까지 받은 아이들 다섯 명을 2월 말에 우리 집에 초대해서 하룻밤 자면서 함께 게임도 하고 어울리면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어요. 본격적으로 저의 디모데양육이 시작된 것이죠. 이후에 한 명은 빠지게 되고 네 명 아이들과 1년 동안 매주 목요일 퇴근 후에 인근 교회에서 양육모임을 가졌어요. TEM에서 만든 어린이교재를 활용하여 양육을 하면서 좋았던 점은 교사의 권위를 내려놓고 아이들을 만나니 아이들에게서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예요. 솔직한 나눔과 소통이 저를 더욱 변화시켰고 교사로서 성장하는데 소중한 시간들이 되었어요. 물론 아이들도 이미 내 학급은 떠나있지만 그들의 신앙도 생활면에서도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게 되었고요. 지금은 현재 학급의 아이들 양육도 시작해서 토요학교 형태로 디모데양육 모임을 진행하고 있어요.

그동안 합창단에 열중했었고 그리고 자녀교육에만 심취해 있었는데, 이제야 기독교사의 삶을 제대로 시작하게 되었네요. 적당한 때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하나님이 저를 바라보시며 잠잠히 기다리고 계셨다고 느껴요. 2014 기독교사대회 이후로, 그리고 교사선교회를 만난 이후로 저의 영성이 많이 회복된 것 같아요. 특히 교사선교회 공동체 속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고 살아오신 기독교사들을 많이 뵙게 되고, 가셨던 그 길을 함께 따라갈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요. 저도 이제 앞서 가셨던 그분들 따라 용기내어 나아갈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공교육 내에서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학급의 제자들을 양육 한다는 건 정말 예수님의 은혜가 넘치지 않고서는 지속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느껴요. 가끔 어떻게 이렇게 위험한 일을 우리가 하고 있지?’ 생각이 들기도 해요. 여름과 겨울에 전국적으로 디모데양육을 하는 선생님들과 디모데들이 모여 23일간 디모데캠프를 해요. 이동 중이나 캠프 중에 사고라도 난다면 정말 큰 뉴스감이 될 테고, 위험 요소가 다분한 일이기에 두려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은혜만 믿고 양육에 헌신하며 살아오신 분들의 길이 감사하고 아름다워서 저도 잘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도 꾸준히 복음을 전하고 양육을 하는 이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요. 이것이 나를 교사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아무리 훌륭하게 교육과정을 짜고 학생들의 꿈을 위해 좋은 교육을 흘려보내고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 할지라도 우리 아이들에게 생명이 없다면 그건 아무 유익이 없으니까요. 내게 맡겨진 영혼 한 명 한 명이 생명력 있게 살아가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온 맘 다해 사랑으로 품고 섬기는 일을 정말 제대로 하고 싶어요. 교사선교회의 일도 자칫 질못 하면 그냥 사역이 되어버릴 수 있겠더라고요. 사역의 성과를 이루려 욕심내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매일 매일 한 영혼을 품고 살리는 교사가 되고 싶어요. 학급살이와 수업 내에서도 영혼을 살리는 방향으로 꾸준히 실천해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