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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몸으로 섬기는 교사(2016.5)

무엇보다도 선생님들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요즘 제가 가장 많이 고민하고 또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선생님들이 먼저 행복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섬기는 교사

 

선일여자중학교 이상흥 선생님

 

 

 

 

 


글, 사진·김현경

 

 

 

가까운 곳에 언제나 자리를 지켜주시는 ‘어른’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거창한 삶의 흔적을 남기고, 그럴 듯한 말을 남긴다고 ‘어른’이라 불리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자리를 지키고 작은 신념을 삶으로 지켜내는 어른을 볼 때 젊은이들은 감동하게 됩니다. 이상흥 선생님의 삶 이야기를 들을 때 괜스레 감동이 오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가난에 무릎 꿇지 않았던것은
충청남도 예산의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저는 5남 1녀 중에 막내였고 아버지는 은행원이셨대요. 제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6살쯤 되던 해, 아버지께서 은행을 그만 두셨어요. 농촌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데 직장이 없어졌다는 것은 생계가 사라졌다는 뜻이었죠. 그래서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상당히 가난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누구나 다 어려웠던 시절이니까 특별한 일도 아니었겠지만 툭하면 끼니를 굶어야 하는 일은 어린 저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죠.
이렇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아주 엄하게 키우셨습니다. 가난한 집 자식이 잘못되면 그것은 조롱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올바른 태도와 성실한 노력을 늘 강조하셨어요. 그래서인지 10살 무렵부터는 먹는 것을 포함해서 공부에 대한 필요나 모든 것을 스스로 채우려고 노력하며 살았어요.
우리 가족이 가난에 무릎 꿇지 않았던 것은 어머니의 그런 가르침과 기도의 힘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긴긴 겨울 밤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잠을 깰 때면, 이불을 뒤집어 쓴 어머니의 울음 섞인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죠. 헐벗고 배고픈 것은 견딜 수 있으나 제발 어린 자녀들이 곁길로 빠지지 않고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학창시절은 늘 그랬어요. 가난하지만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믿고 서로를 의지하며 오직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사는, 누구에게나 칭찬 받는 모범적인 학생이었죠.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날 무렵 집안이 파산을 하고, 아버지도 병환으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셨어요. 학업 때문에 홀로 고향에 남겨진 저는 잘 곳도, 먹을 것도 없는 암담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기적을 많이 경험한 시기였죠.
기거할 곳이 없는 저는 교회에서 지냈어요. 그때가 11월이었는데 교회는 건축 중이어서 겨우 1층 예배실만 꾸미고 2층은 골조만 올라간 상태라 변변하게 지낼 만 한 장소가 없었어요. 교회 종탑 방, 방이라고 표현했지만 정확하게는 본당 2층 회랑 끝에 연결된 종루 콘크리트 바닥에 임시로 한 평 정도 나무 마루를 깔아 놓은 공간에서 솜이불 한 장으로 겨울을 나야했죠. 종루 꼭대기 사방은 창 없이 뻥 뚫려 있는 구조여서 한데나 다름없이 몹시 추웠죠.
그때 기억나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십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시던 손세관 선생님, 우리 학교 영어 선생님이셨는데요. 저의 사정을 아신 선생님은 당신도 방 한 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해 재워줄 수는 없다며 “밥은 맥여 줄게.”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이듬해 봄까지 약 6개월 간 선생님 댁에서 아침과 저녁을 함께 먹고, 싸주시는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굶주림 없이 지냈어요. 이듬해 봄에는 외삼촌께서 고향 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셔서 외삼촌의 도움으로 졸업 때까지 별 어려움 없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죠.

 

‘몸으로 섬기라’는 깨달음의 시작
서울에 있는 대학에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지낼 곳도 마땅치 않으니 영등포 기계 공단에 있는 공장에 들어가 공장생활을 하며 재수를 했지요. 1년간의 공장생활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 엉망이었어요.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교회에 갈 수 없었을 뿐더러, 하루 평균 12시간의 노동이 끝나면 기숙사에선 매일 화투판과 술판이 벌어지는 환경이었어요. 나의 생활도 점점 피폐해져 갔죠.
이듬해에는 충남대학교에 합격해서 대전으로 내려갔어요. 공장에서 일해 모은 돈으로 등록금 칠만 오천 원을 내고 겨우 방 한 칸을 ‘3만원 연세’로 얻어 혼자 자취를 시작했지요. 학교는 어수선했고요. 그해 터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찰이 시작되고 결국에는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되고 휴교령이 내려지는 등 폭압의 시절이었죠. 학생들은 날마다 데모를 하다가 붙잡혀 가고,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날이 많았죠.
방은 얻었는데 먹을 걸 해결해야 하잖아요. 아는 분의 소개로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들 과외를 하게 되었어요. 지금 아이들도 그렇지만, 중2면 한창 사춘기잖아요. 수업을 하는데 한 아이가 수업 분위기를 흐리기에 혼낸 적이 있어요. 그러자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쳇, 제까짓 게 선생도 아니면서 선생인 척 해.” 하는 거예요. 그 말이 제 가슴에 비수같이 파고들었어요. 나는 한 번도 교사를 꿈꿔 본 적이 없었는데 단지 생계를 위해 선생인 척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시작한지 2개월 쯤 되었을 때인데, 그달 과외비를 전혀 받지 않고 그날로 그만 두었죠. 그때 생각했어요. 아무 준비 없이 함부로 남을 가르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몸으로 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뭘 하며 돈을 벌어야 하나 거리를 돌아다니며 살펴봤어요. 결론은 핫도그 노점상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초기 재료를 구하는데 당시 돈으로 3만원이 들었어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는데 지도교수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간신히 빌렸죠. 하지만 장사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4개월을 고생하다가 결국 장사를 접었어요. 보름이 넘도록 학교도 가지 못하고 자취방에 틀어박혀 혼자 지냈습니다.
실패와 굶주림 속에서 저는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스스로의 죄와 형편없음에 대해 자복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이 다시 포장마차를 하게 하시고, 경제적으로 큰 축복을 주셨어요. 포장마차 노점상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관할 경찰서에 드나들다가, 인근 공장 여공들을 위한 야학이 운영되고 있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포창마차 수익금 중 상당 부분을 야학 운영 자금으로 후원했어요. 주경야독하며 검정고시를 통해 진학의 꿈을 이루어 가는 여공 누님들을 볼 때 진심으로 뜨거운 감동의 눈물이 흐르기도 했고요.
군대 가기 전까지 2년 동안의 대학 생활은 공부한 기억보다는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납니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3학년 한 해 동안은 공부도 좀 하고 소설도 써서 대학 문학상을 받기도 했어요. 그것도 잠시, 졸업 학년이 되던 1979년엔 억압이 더욱 심화되었어요. 학교 분위기도 흉흉해지던 무렵에 급기야 10·26 사태가 발생하고 우리 사회는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지요.
대학 생활을 그렇게 보내고 사회로 나갈 때가 됐는데 갈 데가 없었어요. 제대로 공부한 게 없으니 신문사 기자 시험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있었어요. 그때 대학에서 연락이 와서 사립학교 교사 자리가 있는데 갈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죠. 사실 교사로서의 사명감 같은 것은 전혀 없었어요. 게다가 당시에 교사라는 직업은 아주 형편없는 급여를 받고 사회적인 대우도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삶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서 하루라도 빨리 안정된 삶을 살고 싶어서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1980년도부터 이 학교(선일여중)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벌써 37년이 되었네요.

 

이제는 핑계 댈 수도 없다
1980년에 교사가 되었고 동시에 교회에서는 집사 직분을 맡게 되었습니다. 81년에는 결혼을 했고요. 그리고 83년 어느 날, 목사님이 절 부르시는 겁니다. 신학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난 국어 선생인데, 제가 왜 신학을 공부합니까?” 했어요. 당시에 저는 주일학교 부장으로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목사님 말씀은 꼭 전도사나 목사를 하지 않더라도 성경과 교회 교육을 알아야 성도들에게 더 도움이 될 거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학교 근무시간을 핑계로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85년에 목사님이 저를 다시 부르시더니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제가 공부해야 한다고 하셨다며, “이 집사, 하나님께 서원한 적 없어?” 하고 물으셨어요.
그때 제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주일 동안 학교도 가지 않으며 성령 대부흥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새벽기도를 하며 저는 끊임없이 회개했고, 주의 음성을 들었어요. 나를 안다고 말씀하셨고, 나의 길을 인도하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주의 말씀을 들은 저는 “이제는 주님이 원하시고 명령하시는 대로 살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이 기도가 서원이었는지도 몰랐고 아주 오랫동안 잊은 채 살고 있었는데, 거의 17년이 흐른 뒤에 생각이 난 것이지요.
86년에는 지하철 3호선이 개통됐어요. 학교 근처 연신내역에서 대학원(수도침신-후에 대전 침신 서울 분교)이 있는 충무로역까지 딱 40분이 걸렸어요. 근무를 마치고 가면 대학원 수업 시간을 딱 맞출 수 있게 된 것이죠. 이제는 핑계 댈 수도 없고, 목사님을 통해 옛 기도를 떠올리게 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학부로 편입하여 2년, 목회학 석사 과정을 2년 동안 공부하게 되었어요.
아내의 도움도 컸어요. 아내가 말하길, “생활은 내가 책임질 테니,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해요.” 하더라고요. 저는 91년도에 교회에서 교육 담당 협동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지요. 그리고 지난 2010년 9월 25일 목사 안수를 받고 기독교 한국침례회 희망교회(고양외국어고등학교 내)의 협동목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어요. 그때 신학 동기들은 모두 목사가 되어 개교회를 잘 섬기고 있답니다.

 

기독교인이었던 교사에서 ‘기독교사’의 정체성을 갖기까지
저는 그렇게 학교에서는 국어 선생으로, 교회에서는 전도사로 열심을 다하며 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1998년 9월에 ‘선일여중 이상흥’ 앞으로 편지가 한 통 왔어요. 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다니는 학교며 이름을 알고 편지를 보낸 것이 기분 나빠 따져보려고 편지 속에 적힌 모임 장소로 찾아갔어요. 그것이 ‘기독교사대학’ 첫 모임이었지요.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간 곳에서, 모임이 끝날 때까지 제가 따질 만 한 타이밍을 노렸죠. 그런데 내가 따져 묻는 말에 아무도 대답을 안 하더라고요.
다음 모임이 있다기에 다시 따져 물으려고 한 번 더 갔어요. 그때 김진우 선생이 강의를 하는데, ‘기독교사로 부르심’이 무엇이냐, ‘기독교사’가 무엇이냐, ‘왜’ 기독교사냐, 이런 내용의 강의였어요.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교사가 되기까지 하나님의 부르심과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쭉 돌이켜보게 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의 서원을 기억하시고 주님이 길을 만들어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러자 나에게 손편지를 써 보냈던 임태규 선생을 비롯해 그곳에 있던 송인수, 정병오, 이희욱, 홍인기 선생 모두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보내주신 사람들로 여겨졌어요.
그길로 교회에 가 소리 내어 울며 기도했어요. 전도사와 선생으로 살았지만 하나님이 나를 학교 현장에 세우신 것에 응답하지 못하고, 나를 통해 이루기 원하시는 일에 촉을 세우지 못하고 산 것에 대해 통회하는 마음으로 기도했죠. 그동안 내게 맡겨진 아이들을 위해, 또 고통 받는 동료들을 위해 내가 얼마나 눈물 흘렸는가 생각하며 기도했어요. 하나님 참 잔인한 데가 있으시죠. 아프게 부르셔요.
그렇게 14주에 걸쳐 일곱 강의 ‘기독교사대학’ 과정을 마쳤어요. 스무 명 정도가 참여했지만 저를 비롯한 3명 정도가 개근을 했었죠. 이 시간을 통해서 저는 ‘기독교사’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어요. ‘좋은교사’를 만나기 전에는 그저 기독인으로서의 정체성 따로, 직업인으로서 교사라는 정체성을 따로 갖고 있었어요. 하지만 알고 보니 하나님은 나를 교회보다도 먼저 학교에 부르셨더라고요. 내가 서원했던 그 약속을 학교에서 지켜내도록 인도하신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어요.

 

교사를 섬기는 교사
올 8월에 정년퇴임을 해요. 한 학교에서 40년 가까이 선생으로 지냈네요. 저는 늦게 서야 교감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진정한 교사라면 끝까지 평교사로서 학생들 곁에서 성장을 돕고 그들의 바람직한 변화를 확인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겨야 한다고만 생각했어요. 관리자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명예욕에 빠진 사람으로 보기도 했었지요. 제가 교감이 된 것은 재단에서 갑작스럽게 통보를 해왔고, 저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교감이 되고 나서는 조금씩 생각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교감이 되고서야 알게 되었지요. 관리자, 특히 교장이 되면 어느 정도 자기의 소신에 따라 학교를 경영할 수 있고, 선한 교육 목표를 세울 수 있어요. 또 전체 선생님을 이끌 권한이 생기죠. 이 역할을 선한 영향력 지닌 선생님들이 맡는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좋은교사운동 안에서도 선생님들이 이런 고민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나를 교육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하게 깨닫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관리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봐요. 그렇게 준비된 관리자들이 한국 교육을 개혁하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 믿고, 공교육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육을 심을 것이라 믿어요. 저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
저는 이제 퇴임을 앞두고 무엇보다도 선생님들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현재 제가 가장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선생님들이 먼저 행복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제가 가장 많이 고민하고 또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저도 평교사로 있을 때는 교감의 고민을 알지 못했기에, 선생님들이 저의 마음을 알고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직생활을 하고 남는 저의 발자취가 후배 선생님들에게 조금이라도 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있지요.
지금까지 하나님이 내 삶을 이끌어 오신 과정을 보면, 그 어떤 것도 나의 계획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이미 나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인간인 저는 모두 겪고 나서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을 깨달을 뿐이죠. 그래서 퇴직 후의 삶도 어떻게 펼쳐질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걸어가고 싶어요. 절 쓰실 만 한 곳에 쓰시리라 믿으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긴 시간의 인터뷰였습니다. 인터뷰 내내 한참 어린 인터뷰어를 배려해주시는 모습, 편안하게 누리는 삶을 노년의 권리로 여기지 않으시는 모습이 느껴졌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선생님은 알맹이 없는 삶을 내보이기 부끄럽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무기삼지 않고 겸손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주위 선생님들을 섬기는 선생님을 보며 하나님께서 이미 열매를 풍성히 준비해 두셨으리라 믿게 되었습니다. 이상흥 선생님, 마지막까지 ‘스승’의 자리를 든든히 지켜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