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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내가 네 앞길을 선하게 인도할 것이니, 너는 지금 내가 네게 맡긴 일에 최선을 다하여라!”(2016.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이 옳다면 그런 보상이 없더라도 가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우리가 보상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니까요. ‘이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찾아오겠지’라는 기대조차도 내려놓아야 하죠. 그렇게 아무 얻어지는 것이 없어도 이 길이 맞는 것 같아요.






           


 

 

“내가 네 앞길을 선하게 인도할 것이니, 너는 지금 내가 네게 맡긴 일에 최선을  다하여라!”

 

인천효성초등학교 김만호 선생님




글,사진_주종호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인생을 자기 계획대로 밀어붙이려는 사람 vs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사람. 믿는 사람이라고 계획을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사람은 모험 같은 인생의 매력을 압니다. 그 매력에 푹 빠진 한 사람, 김만호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인도하심과 순종의 상호작용이 어떤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목사를 꿈꾸던 시골 소년
저는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부기리라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영적 요람인 고향 교회 ‘고도교회(부기교회)’는 제 나이와 역사가 같습니다. 제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에 교회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했지요. 어머니께서는 그 전부터 산을 하나 넘어 읍내에 있는 교회에 다니고 계셨지만, 아버지께서는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동네에 교회가 세워진다고 하니 착한 성품의 아버지가 교회 건축을 도우셨고, 그것이 아버지께서 교회에 나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토록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끊으셨고 성실한 성품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여기저기 자주 아팠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목사님께 기도 받기를 좋아했는데, 신기하게도 기도를 받는 즉시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그런 저의 순수한 믿음을 보시고 저를 많이 사랑해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저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항상 기도가 쑥쑥 흡수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씀하곤 하셨어요.
교회에서 목사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자란 저는, 누군가 저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항상 목사님이 될 것이라고 씩씩하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국어시간에 자신의 꿈에 대하여 글을 쓰고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도 저는 제 꿈이 ‘목사님’이라고 소개하는 글을 썼고, 선생님께서는 제 글을 보고는 잘 썼다며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하게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친구들도 제 꿈이 목사인 것을 모두 알게 되었지요. 고등학교 때도 저는 ‘김 목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는 주말에도 자율학습을 실시했는데, 아버지께서 담임선생님을 찾아와 자신이 장로이고 아들은 주말에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봉사해야 한다고 주말 자율학습에서 빼줄 것을 요청하셨어요. 아버지의 진지한 요구에 담임선생님은 저를 자율학습에서 제외시켜 주셨고 그때부터 친구들이 저를 ‘김 목사’라고 부른 것입니다.
    
진로를 고민하며 하나님과 씨름하던 고3 시절

고등학교 3학년 때, 사춘기가 찾아왔습니다. 꿈에 대한 의심이 전혀 없었던 저는 고3이 되어 그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교사, 작가, 심리학자 등 다른 꿈들을 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연한 것으로 믿어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까지 의심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기도와 어렸을 때부터의 신앙적 배경이 저를 지켜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자발적으로 신우회를 조직하여 매주 금요일 야간 자율학습 후 인근 교회에 모여 함께 기도제목을 나누며 기도회를 갖곤 했습니다. 대학 진학을 앞둔 우리의 기도는 간절했고 뜨거웠지요. 그 기도회 중에 방언의 은사를 받기도 했답니다.
그해 여름 교회학교 중고등부는 여름수련회로 공주 주미산금식기도원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고3이었지만, 이미 ‘김 목사’라는 별명을 얻은 터라 보충수업에도 불구하고 쉽게 허락을 받을 수 있었지요. 수련회 기간 동안 금식하면서 진로를 두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이 되길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그때 강사 목사님은 진로를 위해 함께 기도해주셨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기를 권면해주셨습니다. 또 기도원장님의 가족이었던 서울신학대학교 교수님도 자신이 있는 신학대학에 들어올 것을 추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가야 할 길이 목회의 길이라 확신했고, 그 길이 두렵고 험할지라도 순종하기로 결심한 채 기도원을 내려왔습니다.
진로를 결정한 저는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도착하여 부모님께 그 결정을 말씀드렸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주했던 말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제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셨고 크게 기뻐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님과 사모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 분은 제가 목사가 아닌 교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 가정 형편을 잘 아시는 목사님은 제가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매달 용돈을 주실 만큼 저를 아끼던 분이셨는데, 본인이 목회를 하면서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기에 제가 목회자가 되는 것을 만류하셨습니다.
상당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기도원에서 만난 목사님들도 하나님의 종이고, 우리 담임목사님도 하나님의 종인데, 왜 같은 종들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일치하지 않는 것일까? 저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었고 다시 진로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수능시험이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실, 수련회를 다녀온 이후 신학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정하고부터는 수능보다 성경을 더 읽고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 제 성적으로는 원하는 신학대학에 충분히 합격할 수 있었고, 그렇다면 이제는 공부가 아니라 성경 말씀에 더 시간을 들이는 것이 맞겠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저는 매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던 중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만호야, 너는 누구냐?”
“네, 저는 학생입니다.”
“그렇다면 학생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
“공부입니다.”
“맞다. 지금 너는 학생으로서 공부만 열심히 하여라. 내가 네 앞길을 인도해줄 것이다.”
저는 아직까지 그토록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와 같은 평안함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저는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평안함 가운데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해 수능시험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모의고사 성적이 좋았던 많은 학생들이 대입 수능에서 낮은 점수를 받고 재수를 고민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평소보다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일을 통해, 저는 인천교대 특차 시험에 지원하여 204명의 합격자 명단에 당당하게 올랐습니다. 만일 여기서 합격되지 않으면 정시전형에서 신학대학에 지원하려 했는데 그 기회는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만호를 교사로 부르셨습니다!
인천교대에 합격한 저에게 커다란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거취문제였습니다. 인천에 아무런 연고 없이 지방에서 올라왔기에 기숙사 생활을 할 것을 기대했는데, 당시 인천교대는 여학생들에게만 기숙사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집에서 자취방을 얻어주거나, 하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줄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고민이 금방 해결되었습니다. 원서 접수 때부터 합격자 발표, 등록까지 저를 친절하게 안내해주던 선배가 그 고민을 듣고는 자기와 함께 지낼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 선배는 교사선교회라는 기독교 동아리에 속해 있었는데 저는 그 선배를 통해 교사선교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교사선교회는 항상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교사로 부르셨습니다!’라는 사명선언문 현수막을 교대 진입로에 걸어 놓았습니다. 선교회의 많은 친구들은 그 문구를 본 순간 하나님이 자기를 교사로 부르셨으며, 교육대학교로 보내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현수막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교사로 부르셨습니다’라는 문장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 선택으로 교대에 들어왔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제가 목사가 되기를 원하고 계실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저는 방향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모임 저모임을 기웃거렸고, 아르바이트와 수많은 과제들로 하루하루 지쳐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견디기 힘든 답답함에 선배와 성경 공부를 하다 울어버렸습니다. 저는 교사선교회의 ‘선교’라는 말이 부담스럽다고 했습니다. 나는 목사가 꿈이었는데 내가 왜 교대에 왔는지 모르겠으며 현재의 내 생활이 너무 벅차고 힘들다며 눈물을 흘렸어요. 그 선배는 저를 위로하며 선교의 개념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 목숨을 걸고 나가는 것만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될 수 있도록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도 선교자의 삶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또 선교지의 선교사 자녀들을 가르치며 돕는 일 역시 선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어릴 적 꿈이 목사였으며 지금도 그 꿈을 잊지 않았고, 언젠가 하나님이 목사가 되기를 원하시면 순종할 준비를 갖추고 현재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저는 잊고 있던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만호야, 내가 너의 앞길을 인도해 줄 것이다.’라는 그 약속을 말입니다. 그 순간, 수능시험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저는 교사선교회에서 리더 형과 성경공부를 하던 중 하나님을 만났지요. 그리고 저도 리더처럼 선교적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했습니다. ‘나도 언제든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곳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리라! 하나님이 나를 선교사로 부르시면 선교사로, 목사로 부르시면 목사로, 교사로 부르시면 교사로 순종하며 살아가리라!’ 그제야 ‘하나님은 당신을 교사로 부르셨다’는 교사선교회의 사명선언문이 가슴 깊이 새겨졌고, 하나님께서 저를 인천교대로, 교사선교회로 그리고 교사로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힘들었던 교직의 첫 걸음마
2000년 3월 1일, 저는 인천단봉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교사의 삶이 시작되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시련의 시간이었습니다. 발령 받은 학교는 ‘유배지’라 불리는 곳으로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쓰레기 매립지 근처여서 메탄가스 냄새도 심했지요. 저는 2월 28일부터 출근하여 학기를 준비했습니다. 학생생활지도, 학생자치, 청소년단체 업무를 맡았는데 미리 계획하고 준비할 일들이 많았고 그로 인해 교재연구는 물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반 아이가 등교 중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아이는 머리를 다쳐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가 결국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습니다. 저는 큰 슬픔에 빠졌고 마치 제가 그 아이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 같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힘겨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교사의 삶이 이런 것인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이 부르신 교사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저는 하나님의 교사로 살아간다는 것에 자신이 없어졌어요.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하루 빨리 군대에 가는 것이 낫겠다 생각했습니다.


광야의 삶 군복무 시절
2000년 7월 1일, 학사장교로 입대했습니다. 교사 발령 4개월 만에 아이들과 눈물어린 이별을 하며 학교를 떠나게 되었지만, 아쉬움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이었습니다. 3개월간의 장교 훈련은 상당히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훈련에 임했고 무사히 임관했습니다.
그 후 3년의 군복무기간 동안, 저는 의지할 사람 한 명 없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장교로서의 고충은 만만치 않았어요. 선임 장교로부터의 억압과 괴롭힘, 술과 성으로 찌든 회식문화,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욕설들….
저의 보직은 모두들 가장 힘들다고 말하는 대대 교육장교였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보통 두세 배의 일을 했지요. 남들은 일과를 마치면 저녁을 먹고 퇴근을 했지만, 저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밤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어요. 퇴근 후에는 간부 숙소에서 선배들이 먹고 마신 술자리를 치우고, 설거지와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습니다. 빨래 심부름부터 만화책 빌려오기, 비디오 빌려다 주기 등 자질구레한 일들도 많았고요. 그러나 힘든 보직 덕분인지 성실함 때문인지, 대대 역사상 아무도 피해갈 수 없었다는 술 군기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군에서는 영적 공급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좋은 말씀을 들려주고 저를 지도해 줄 리더도 목사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부대 안에 있는 교회를 맡아서 군종병들을 관리하고 종종 예배를 인도하는 수고를 했습니다. 공급 없이 퍼주기만 하는 삶은 저를 점점 지치게 했지요. 아마 대학 4년 동안 하나님을 만나고 의지하는 법을 훈련받지 못했다면 3년간의 군 생활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힘들고 지치는 군대의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다시 교사의 삶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던 3년 3개월의 군생활을 통해 저는 연단되었고 인내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교사로 살아가길 서원하다 -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아가리라
2003년 10월 1일, 드디어 기다리던 교사의 삶을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복직하여 학교 관리자들과 선배들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열심히 척척 해냈습니다. 3년 전 첫 발령 때 어리바리하며 힘들어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요.
그렇게 열심히 교직에 적응하던 저에게 한 가지 두려움이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첫 발령 후 너무 힘들어 차라리 입대하기를 희망했고, 군생활 중에는 그 생활이 너무 힘들어 다시 교직생활을 꿈꾸었습니다. 또다시 교직이 힘들어 피하고 싶어진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군대로 돌아갈 수도 없지 않은가? 이런 고민이 시작되자, 저는 앞으로 교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결단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캠퍼스 사역을 하고 있는 교사선교회의 한 선배가 캠퍼스 사역을 함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대학 4년 동안 교사선교회에서 열심히 훈련을 받았고 그 유익도 알고 있었지만 저는 그 제안이 두려웠습니다. ‘학교에서도 열심 있는 교사로 인정받고 싶은데, 학교 일과 선교회 사역 두 가지를 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지치지 않고 끝까지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그냥 다른 일반 크리스천 교사들처럼 평범하게 교직생활을 하고 싶은 생각이 더 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달란트 비유 중, 하나님의 심판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몇 달란트를 주셨는지 모르지만, 내가 그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고 만다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서 어떤 변명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나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하시지는 않을까?’ 저는 마지막 때에 주님 품에 안겨서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역에 동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교단에 서는 교사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비교사 후배들이 대학 시절부터 하나님의 교사로 준비되어 교단에 서게 된다면 수많은 학생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며 대학생들의 성장을 도왔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예비교사뿐 아니라 현직에 있는 많은 동료교사들이 소명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다면 학교가 얼마나 많이 변화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줄곧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2004년부터 지금까지 이런 일들을 계속해서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충성을 다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우리 가족
제 아내는 한 학번 후배로, 예비교사 때부터 교사선교회에서 함께 훈련받고 성장한 자매입니다. 교제를 하게 된 것은 졸업 6년 후입니다. 아내가 두 번째로 근무한 학교가 제가 근무하던 바로 옆 학교였고 함께 카풀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잘 알아가며 가까워질 수 있었고, 1년 후 마침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만남의 시작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내는 뇌하수체종양이 발견되어 이를 위해 공동체에서 함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뇌하수체종양이 호르몬 분비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우리 가정에 자녀가 없을 수도 있었던 거죠. 그래서 선뜻 이성교제를 시작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제게 매우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호야, 생명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너는 왜 네 가정의 자녀를 위해 걱정을 하느냐? 내가 네 가정에 자녀가 필요하다면 자녀를 허락할 것이요, 너희 가정에 자녀가 없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저는 이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만남을 기뻐하고 계시다는 사실로 믿고, 자녀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후 3년 동안, 아내는 뇌하수체종양 제거수술을 비롯하여 큰 수술을 세 번 받았고, 호르몬 이상으로 배란이 되지 않아 임신할 수 없었습니다. 결혼 후 5년이 지날 때까지도 아기 소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에 자녀를 계획해 두고 계셨습니다. 결혼 6년째 되던 해, 하나님은 예쁘고 건강한 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2016년, 하나님과 함께 믿음의 모험을 떠나다
올해 저는 좋은교사운동 상근자로 일합니다. 교사선교회가 2016 기독교사대회를 섬기는 간사단체인데, 제가 기독교사대회준비위원장으로 기독교사대회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사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 사실 아직 무슨 일을 어떻게 준비해 나가야 할지 순서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예비하신 기독교사들을 위한 천국잔치를 열심히 기도하며 준비하겠습니다.
또한 학원복음화위원장으로 섬기게 되었는데, 많은 선생님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을 마음껏 사랑하며 섬길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며 돕겠습니다. 이를 위해 먼저 현장에서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우리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그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생님들이 누리는 기쁨의 감격은 물론 아픔과 어려움까지 함께 느껴보고 싶습니다.
마치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마음이지만 이 배낭을 기꺼이 짊어지고 하나님과 함께 모험을 떠나볼까 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제가 어떤 하나님을 경험하였는지, 그 이야기를 생생하게 좀더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따라 어떻게 살아갈지를 깨닫는 순간, 그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학교와 가정, 그리고 공동체에서 착하고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김만호 선생님. 이제 선생님이 계실 곳이 ‘좋은교사’니, 여기에도 하나님이 동행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나눠 주시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