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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주님의 마음을 닮은 교장, 삶으로 믿음을 확증하며 살아가는 교장이 되고 싶어요.(2015.11)

예수 믿어서 세상적인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어서 오히려 손해를 보고 예수 믿어서 어려운 일을 감당하고 예수 믿어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권리포기 할 때 진짜 예수를 믿는 거라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살았을 때에야 기독교사로서의 정체성을 많이 회복할 수 있었어요.

 

 

주님의 마음을 닮은 교장,

삶으로 믿음을

확증하며 살아가는 교장이

되고 싶어요.

 

인천만수북중학교 김태용 교장 선생님

 

, 사진_ 주종호

 

인터뷰 가는 길, 과거에 선생님들과 이런 농담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교직 평생에 좋은 관리자 한 분이라도 만나면 그건 로또 맞은 거다.’ 조금 과장된 감은 있지만 그만큼 훌륭한 인품과 지혜를 갖춘 관리자를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신앙의 선배로서 , 저 위치에서는 저렇게 살면 되는 거구나.’하는 모습을 보여줄 분은 더욱 드물었지요. 오늘의 인터뷰는 그런 희소한인물과의 만남이었기에 더욱 기대가 됐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은 우리 가족의 이야기

저는 1958년 인천에서 32녀 중 넷째인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제일 위에 누나가 있고 그 다음에 형 둘, 그리고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형제들 모두 인천에서 초,,고등학교를 다녔지요. 제 아버지(200582세로 소천)12남매의 장남이셨습니다. 고향인 수원을 떠나 18세에 인천에 와서 일을 하시다 1947년에 어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셨어요.

생활은 많이 어려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일용직 일을 하시면서 평생 개인 소유의 집을 가져본 적도 없고 동생들도 많은데다 막내고모도 우리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었지요.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입니다. 학교에 다녀와서 보니 우리 집이 없어진 거예요. 무허가 주택이라고 밀어버린 거였죠. 아버지께서 다시 두 달 동안 흙벽돌로 집을 지으셨고 방 하나에 할머니까지 총 일곱 식구가 생활할 공간이 마련됐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그야말로 도시 빈민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살았어요. 저는 그 흔한 일일공부 시험지나 학원, 과외라는 것도 한 번도 못해보고, 수학여행도 못 가보고 청소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인 1972, 인천여상을 나와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간호사 일을 하고 있는 당시 25세였던 누나가 서독에 간호사로 취업해 갔습니다. 그때는 제가 어려서 잘 몰랐는데 매월 누나가 서독에서 보내준 돈으로 우리 식구들이 생활을 하고 공부도 했던 거였어요. 또한 장남이자 해방동이인 매형은 광부였답니다. 월남전에 참전했었고 이후 서독에 광부로 취업해 가서 일하다가 누나를 만나 결혼을 했지요. 작년에 영화 국제시장이 개봉했을 때 영화를 보면서 우리 가족사와 너무도 흡사한 이야기에 엉엉 울면서 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신앙의 성장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와 인천숭의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을 시작하셨고, 우리 형제 자매들도 거의 반강제적으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답니다. 어머니는 늘 나는 배운 것도 없고, 돈도 없고, 빽도 없지만 하나님이 분명 너희들을 통해 위대한 일을 계획하실 것이다.’라며 우리를 세뇌(?)시켰던 분이셨어요. 지금 90세 고령이시지만 아직도 매일 아침마다 새벽기도를 하고 계시답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에는 토요일 저녁에 교회 중고등부 예배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예배를 드리는데 1학년 아이들이 예배에 집중하지 않고 너무 떠드는 거예요. 그래서 당시 중학교 2학년인 저는 후배들을 훈계한답시고 그날 밤 교회 뒤 골목에 그 애들을 모아 엎드려뻗쳐 놓고 막대기로 몇 대씩 때렸어요. 이 사건으로 교회 어른들과 어머니에게 엄청 야단을 맞자, 저는 정의로운 일을 했는데 오히려 이런 대접을 받아? 이런 중고등부 예배는 안 나간다.’라며 그때부터 학생회 예배에 참석을 안했습니다. 주일 예배는 나갔어요. 정황상 주일날도 안 나가는 것이 맞지 않나 싶지만, 주일마저 교회에 안 가면 어머니께서 밥을 안 주셨을 거라 빠질 수가 없었어요.

저는 초등학교 때 전교 어린이회 부회장으로, 중학교 시절에도 나름 공부도 어느 정도 했고 키도 커서(2 178cm)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명문학교에 가고 싶어 했죠. 1974년 고입 당시 서울, 부산은 고교 평준화 원년이었지만, 인천은 비평준화 마지막 입시가 실시됐어요. 그래서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당시 최고의 명문 고교였던 제물포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보러 왔었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대학까지 보내려는 생각을 하셨던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없는 집구석에서 저 여편네 남편 등골 빼 먹는다며 인문계 진학을 싫어하셨죠. 하지만 저는 제물포고등학교에 가고 싶었고 결국 시험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만 낙방하고 말았죠. 겉으로는 인문계 진학에 반대하셨던 아버지가 술을 잔뜩 마시고는 우리 막내 아들놈이 떨어질 리가 없다며 당시 수원에 있었던 경기도교육청에 확인하러 가셨답니다. 그런데 뭘, 떨어진 걸 어떻게 합니까.

시험에 낙방 후, 후기 고교로의 진학은 청소년 시절 저에게 엄청난 상처와 열등감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저보다 공부를 못했거나 제가 숙제를 가르쳐 주던 아이들도 합격을 해서 다니는데 저는 그러지를 못하니, 그 학교 교모를 쓴 친구들만 보아도 속이 편치 않았죠. 그러던 중 고2 여름방학 어느 토요일 저녁, 어려서부터 저를 잘 아는 중고등부 교사이셨던 권사님께서 중고등부 예배에 나오라고 간청하는 바람에 3년 만에 억지로 중고등부 예배에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날 권사님께서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멀리하신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셨는데 꼭 하나님이 나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날 설교가 저를 다시 신앙의 길로 돌아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교회에 열심히 나가게 되었습니다.

 

가난과 아내의 권유로 시작한 교사, 그리고 가정

원래 저는 어려서부터 의사가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집에서는 의대 진학을 심하게 반대하셨지요. 특히 아버지의 반대는 대단했습니다. 당시 C의과대학 본고사를 치르는 날 아침,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강제로 미역국을 끓이게 하셨습니다. 저놈이 의대에 떨어져야 한다는 거였죠. 아마 미역국을 먹고 본고사를 보러 간 사람은 저밖에 없었을 겁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국 의대 진학에 실패하자 아버지는 저에게 잘했다고, 정말 잘했다고 굉장히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동네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사범대학은 돈이 안 든다니 사범대학을 가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지요. 게다가 우리 가정형편을 잘 알고 계셨던 고3 시절 담임 선생님도 너는 수학에 소질이 많으니 수학교육과에 진학하면 좋은 교사가 될 것이라며 사범대 진학을 권하셨어요. 그래서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에 거의 반강제적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교사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사범대학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지요. 대학생활은 매일매일 과외가 주업이었고 학과 공부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습니다. 학과 수업 중에는 책상 밑에 수학의 정석책을 꺼내놓고 그날 저녁에 과외에서 가르칠 내용을 풀고는 했죠. 당시 인천에서 서울 종로 3가까지 경인전철로 통학을 했는데 등굣길인 종로 3가에 내리면 C의과대학이 바로 버스 정류장 건너편에 있었고, 학교 가는 길에 S대학교 의과대학을 지나고, 명륜동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K대학교 의과대학이 있어서 매일매일 내가 계속 수학교육과를 다녀야만 하나?’하고 고민하면서 지냈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교회 청년부 생활과 과외로 인한 돈벌이(?)가 몇 안 되는 위안이었죠.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교 4학년 복학 무렵에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서로 잘 알고 지내온 모교회 대학부 3년 후배인 지금의 아내와 3년간 서울에서 몰래 연애를 했지요. 시기가 시기인 만큼 취직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대우그룹 입사가 거의 확정되었을 무렵 당시 연애 중이었던 지금의 아내가 일반 대기업은 주일 지키기가 어렵고, 내년부터 중고등부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기로 했으니, 여름에는 수련회에도 가야 하고, 사범대학을 다녔으니 비록 월급이 적더라도 교직을 택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에 저는 교직을 택했고,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그것이 정말로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사가 된 후 결혼을 했고 연년생으로 딸과 아들을 낳았습니다. LG그룹 인재개발실에 근무하는 큰 아이는 대학 시절 기독학생동아리에서 만난 동기와 작년 가을에 결혼하여 서울에서 살고 있고, 작은 아이는 대학 졸업 후 비행조종사 후반기 훈련 중입니다. 두 아이는 물론 사위도 기독청년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어 무엇보다 감사합니다. 간호학과 출신인 아내도 대학병원 수간호사를 거쳐 지금은 간호부 차장으로, 병원 내 신우회 및 의료선교회 총무로 직장생활 후반부를 열심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좋은교사들과 좋은학교를 만들다

초임시절에는 젊은데다 발령지가 고향인 인천이라서 새내기 교사로서의 패기와 자신감이 충만했습니다. 신앙적인 열정도 뜨거워서 아침저녁 조회와 종례시간에 학급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죠. 그러다가 두 번째 학교에서부터는 신앙적인 열정보다 습관과 경험을 따르는 교육공무원으로서의 편안한 일상을 살기 시작했고 그렇게 20여 년을 지냈습니다. 나름대로 교과 교육도 잘 했고 학급 관리도 잘 해서 인정을 받았어요. 2002년 겨울 인천광역시교육청 장학사 시험에 합격하여 교육전문직원 생활도 5년을 하였고, 두 학교에서 교감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2006년에 기독교사 연합단체인 좋은교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교회에 다니던 현직 교사인 청년이 제게 <좋은교사> 저널이 아주 유익하니 한번 읽어 보시라며 월간지 <좋은교사>를 건네주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격년마다 열리는 기독교사대회에도 계속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2010년 교감 시절, ‘내가 학교장이 되면 우리 인천지역에도 경기도의 혁신학교와 비슷하게 복음의 능력으로 교육을 새롭게 하는 좋은 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좋은교사에서 기획한 좋은학교 만들기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때 만난 분들이 지난 4년간 신흥중학교에서 함께 꿈꾸고 동역했던 기윤실 교사모임 안보경, 한성준, 김애희 선생님이었습니다. 이분들과의 만남은 교직 후반의 저에게 정말 큰 복이었고, 그 이후 합류한 김은영, 이명문, 유진아 선생님, 그리고 제 제자인 이상기 선생님도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그분들이 한결같이 하였던 말입니다.

교장 선생님,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 앞에 소모품입니다. 소모품처럼 그렇게 봉사할 겁니다.”

교장 선생님, 저 소모품인데 어디 소모품 쓰실 일 없어요?”

젊은 분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이 저에게 큰 충격이었고, 이 말이 언제나 저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들려왔던 기억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분들로부터 큰 위로를 받았어요.

 

이곳 또한 개척하라

제가 잘 쓰는 표현이 주님의 마음을 닮은 교장, 삶으로 믿음을 확증하며 살아가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장, 구성원 모두가 행복하고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권리포기와 솔선수범하는 교장입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교육을 새롭게 하는 것,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목표고 그 일에 제가 쓰임을 받으면 된다는 생각. 이것이 저의 소신이자 바람입니다.

지난 4년간 전임학교에서의 교장 역할이 그리 쉽지는 않았지만 어려운 때마다 10여명이 넘는 좋은교사 회원 기독교사들의 기도와 지지로 대과없이 잘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831, 신흥중 교장 직임을 마무리하던 날, 전교생들이 롤링페이퍼를 작성해 전달해준 일과 저의 4년간의 흔적을 동영상으로 제작해 교직원들과 함께 감상한 일, 신뢰서클 형식으로 마음을 전달한 일과 학생회 대의원들의 교장선생님, 감사했어요. 저희들 모두 정말 행복했어요.’라는 영상 편지 등, 이임에 즈음한 환대에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또한 제 후임으로, 인천지역 중등 최초의 평교사형 교장 공모로 정철모 교장 선생님께서 부임하셔서 좋은교사운동 회원들이 갖고 있는 달란트와 리더십이 잘 이어질 수 있게 된 것도 무척 감사한 일입니다.

신흥중학교는 상황이 어렵지만 동역자들이 있었다면 지금 있는 학교는 상황은 편한데 동역자가 없습니다. 약 한 달 여 간 지내면서는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어서 동역자를 찾아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우회도 없는 불모지와 같은 이곳 만수북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기윤실 교사모임 인천남동연수지역 신입회원으로 가입하여 새롭게 교육의 터전을 기경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준비하며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교직생활 5년이 남았습니다. 남은 기간 변함없이 복음에 빚진 자, 세상과 이웃에 빚진 자, 상머슴의 심정으로 기독교사의 초심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계획이자 각오입니다. 정년 후 건강과 여건이 허락되면 아내와 함께 제3세계에 가서 수학교사로 교육봉사를 하고 싶기도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좋은교사운동 사무실에서 자원봉사자로 봉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학교에서 열심히 일하고, (연금 수급자)같이 비용 부담도 없고 시간 남는 사람이 봉사하도록 시키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쓴 시 한 편을 나누고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어느 교사의 고백

 

김 태 용

행복했습니다.

조카 같은 학생, 자식 같은 제자들,

가족과 같은 동료와 함께 함이 행복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혹여 내게 과분한 희생이 있었을지라도

좋은 학교를 세워감이 감사했습니다.

 

꿈꿨습니다.

교무수첩 속 제자들 한 명, 한 명 사진을 보며

행복한 미래를 꿈꿨습니다.

 

그러나 변했습니다.

가르침에서 관리로,

소명에서 의무로,

책임에서 면피로,

해도 안 된다는 절망으로 변했습니다.

 

그래도 다시 꿈꾸고 싶습니다.

더불어 함께! 가르침의 보람과 배움의 기쁨이 넘치는 학교

인생의 고비고비 마다 학창시절의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인해

다시 일어서는 제자이기를 바라는 꿈 말입니다.

 

삶으로 믿음을 확증하며 사는 거룩한 나그네가 소망인 사람’. 김태용 교장 선생님의 스마트폰 배경화면 글귀입니다. 선생님은 이것이 자신의 꿈이자 정체성이라고 했습니다.

인터뷰 도중, 퇴근인사를 하러 들르신 교감 선생님이 제게 교장 선생님 자랑을 했습니다. “우리 교장 선생님 보면 예수님이 성경 속에서 튀어나오신 것 같아요.”

예수님이 택하셔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 김태용 교장 선생님을 통해 또 한 곳의 척박한 땅이 아름답게 개척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