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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빼기의 삶, 함께 살아요(2016.3)

"더하기의 삶을 지양하고 빼기의 삶을 지향하는 기독교사"

모든 기독교사가 궁극적으로 이렇게 되기를 소망해요. 세상이 원하는 연수를 더하고, 승진 점수를 더하고,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끊임없는 더하기적인 삶을 강요하는 이 시대에서 잠잠히 우리 삶을 돌아보고, 나를 비우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만들어 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빼기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빼기의 삶, 함께 살아요

 

인천삼목초등학교 박승호 선생님

 

 

 

 

 

 

인터뷰, 사진_김정태 / 글_김현경

 

 

 

모자란(?) 학생에서 교사로, 교사에서 기독교사로 살아온 박승호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선생님은 특별한 것 없는 사람이라 인터뷰하기 부끄럽다고 하셨지만, 하나님 나라 안에서 어느 누구도 평범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삶으로 배우고 또 살아내는 ‘참된’ 기독교사란 어떤 모습일까요?

 

 

교사 박승호가 기억하는 박승호 어린이
교사가 아니라 법조인이 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때 진로를 고민하다가 막연히 법조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죠. 수능 칠 때까지 계속 그 생각으로 공부했어요. 수능 날 수리탐구 두 문제를 풀고 답안지에 마킹을 하는데요. 80번 문항에 79번 답이 마킹이 되어있는 거예요. 120점 만점에 50점 정도 받았던 것 같아요. 점수가 낮아서 법대는 못갔고요. 담임선생님과 어머니께서 교대에 가서 교사가 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해주셨어요. 딱히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 바람대로 교대에 지원했어요. 원서 접수는 했는데 수능 점수가 너무 낮아서 재수 학원에 등록해놓고요. 그런데 놀랍게도 담임선생님께서 두 학교에 추가 합격으로 붙었다고 전화로 전해주셨어요. 사실 법대도 지원했었거든요. 결국은 어머니 꿈이기도하고 바람이기도 한 교대에 가게 됐어요.
생각해 보니 제 안에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좋은 인상이 있기도 했어요. 저는 대구에서 나서 쭉 대구에서 자랐는데요. 대구칠곡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었던 이혜연 선생님 생각이 나요. 지금은 대구교육청 장학사로 계시는데, 그땐 초임 발령받은 선생님이었어요. 우리들의 상식 밖의 요구도 기꺼이 웃으며 들어주셨던 선생님으로 기억해요. 예를 들면 비오는 질퍽한 운동장에서 축구 하자고 떼쓰는 아이들의 말도 들어주셨죠. 선생님은 우산 속에서 운동장을 뛰노는 우리를 바라보시고요.
그때 친구들과 지금도 가끔 연락하고 만나기도 하는데, 다들 그때를 추억하곤 하죠. 이혜연 선생님을 통해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 좋은 인상을 많이 받았어요. 학생들의 작은 말에도 귀 기울여 주시는 선생님의 따뜻함 같은 거요. 교사가 된 지금의 저에게 학생들을 대하는 기본을 가르쳐주신 것이나 마찬가지죠.
하여간 동네 형 말마따나, 저는 은혜로 교사가 되었어요. 어릴 때부터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제가 교대에 들어가서 많이 달라졌다고 해요. 어릴 땐 엄마 치마폭 못 떠나는 코흘리개였거든요. 사실 머리도 좀 나빴어요. 책을 읽거나 뭘 들으면 하나도 기억을 못한다던가, 당연히 알 만한 맞춤법을 늘 틀린다던가 했죠. 고등학교 때 문학 시험을 보고 있었던 일인데요. 분명히 90점은 나올 줄 알았는데, 점수가 낮게 나온 거에요. 그래서 답안지 보러 갔더니 선생님이 “너 이런 걸 틀렸냐?” 하셨어요. 다 맞춤법 때문에 틀렸더라고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멍청한 편이었던 것 같아요. 평범한 친구들만큼의 성취를 하기 위해서 저는 시간을 굉장히 많이 투자해야만 했거든요. 어머니가 삼국지 대여해오시면, 형이 12권 읽는 동안 저는 한 권 정도밖에 못 읽기도 했고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난독증인가 싶기도 하네요.) 이랬던 제가 이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으니, 은혜로 된 것이 맞지요.

 

담보된 시간
학교 다닐 때 추억은 많이 없는 편이에요. 제가 다녔던 S 고등학교는 미션스쿨 같지 않은 미션스쿨이었어요. 1학년 때 기독교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요. 담임선생님이 동아리 같은건 할 생각도 말라고 하셨어요. 공부해야 된다고. 그때 학교에서 연합고사 200점 만점에 180점 이상인 학생들을 모아 우등반으로 편성했었어요. 열다섯 반 중에 세 반이 있었고, 저는 그 중 한 반이었어서 공부에 대한 압박이 더했죠.
미션스쿨이라고 별로 좋은 것도 없었어요. 주일에 나오라 하지는 않았지만 토요일에도 학교에 나가 밤 10시까지 공부해야 했어요. 그야말로 공부, 공부, 공부하는 학교였죠. 학교에서는 대부분 공부만 했고, 재미있거나 특별한 활동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교사가 되고 나니,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현재의 행복을 담보하여 쉼 없이 달려가게 만드는 교육 시스템이 학생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였을까요? 학교보다는 교회에서 참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어요. 추억도 많고요. 학생회 총무 맡아서 (요즘은 없는) 문학의 밤 같은 것 하고 그랬어요. 교회 학생회에 60명 정도 모였는데, 문학의 밤 하면 200명씩 왔어요. 합창, 연극, 워십 등을 하면서 재미있게 교회생활했어요. 학창 시절 추억의 대부분은 교회 활동을 하면서 가지게 된 것 같아요.

 

내 인생의 말씀
자연스럽게 제 신앙 이야기를 할 수 있겠네요. 아버지는 교회 안 다니셨지만 어머니의 믿음이 좋으셨어요. 물론 저는 모태신앙이고요. 기독교 신앙이 ‘나의 신앙’이 된 계기에 대해 종종 질문 받을 때가 있는데요. 사실 그런 질문에는 대답 할 말이 없어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임팩트 있는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교회를 계속 다닐 수 있었던, 그런 것은 있었지요. 저는 어릴 때 어머니가 힘들게 사시는 것을 보면서 자랐어요. 실직하신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가끔 가정불화를 일으키셨죠. 그런데도 어머니는 늘 기도하는 삶을 사셨어요. 그런 어머니를 보며 ‘가정의 힘든 시간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신앙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죠.
어머니께서도 ‘신앙 안에서 바르게 자라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없다’고 늘 이야기 해주셨어요.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이런 것이 제가 크게 흔들리지 않고 신앙생활 할 수 있었던 이유죠. 저의 신앙의 멘토는 어머니입니다. 늘 한결같고 순전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을 여사님이십니다. 사실 지금 기독교사로 넘어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밑바탕은 모두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제 인생에서 중요한 두 구절의 말씀이 있어요. 하나는 어머니가 가정예배에서 늘 들려주셨던 신명기 말씀이에요. “네가 네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명기 28:1)”
다른 한 구절은 고3 때 담임이셨던 문충환 선생님을 통해 제게 주신 말씀이에요.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 1:9)”
이 말씀을 선생님이 수능 전날 아침 일찍 오셔서 초코바에 붙여서 우리반 친구들 모두의 책상 위에 놓아 주셨어요. 시험 잘 치고 오라 말해주시고. 선생님이 붙여주신 그때 말씀이 이후에도 시험치거나 어려움에 마주하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암송하게 되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이 되었어요.
문충환 선생님은 대구 동부교회 집사님이기도 했어요. 수학 선생님이셨고, 가르칠 땐 엄하셨어요. 그런데도 모든 학생들이 좋아했던 선생님이셨죠. 늘 검소하게 오토바이나 티코 타고 다니시고, 가끔 선생님의 신앙 이야기도 해주시는 분이셨어요. 제가 교대 합격 했을 때도 전화해서 같이 기뻐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기독교사로 첫 Step
그렇게 교대에 입학을 했지요. 처음에는 시험을 잘 못 쳐서 들어간 학교였기 때문에 방황을 했어요. 열심히 놀았죠. 술을 막 먹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매일 수업 빼먹고 과 친구들과 당구치고 과방에서 포커도 치고 그랬죠. 수능을 다시 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한 학기 놀다보니 공부하기가 너무 싫은거에요. 생각을 접었죠. 교사에 대한 부르심 없이 열심히 놀았던 시간이었어요.
2학기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IVF에서 함께했어요. 고3때 교회에서 형들이랑 어울려 술 마시기 시작하는 친구들을 보며 ‘이건 아니지 않나’ 고민한 적이 있었어요. IVF에서는 반대로 ‘이렇게 열심히, 순전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생각하며 놀랐지요. 그 중에 허은정 누나라고, 리더였는데요. “기도했니, 큐티했니, 말씀 보고 있니?” 만날 때마다 물어봐주었어요. 그런 분들 만나면서 새롭게 신앙의 눈을 뜨게 되었어요. 교회에서 배우지 못했던 신앙생활의 다른 모습들을 IVF에서 배울 수 있었어요.
2학년 때부터는 PBS도 하고 QT와 기도 생활을 시작하면서 방황을 정리했어요. 1학년 때 IVF 겨울 수련회를 다녀왔던 기억이 나는데요. 6박 7일 동안 PBS를 제대로 배우면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3학년 때 쯤 한 선배와 우연히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그 선배가 교사로의 삶을 어떤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는지 들을 수 있었죠. 자신은 바울과 모세, 엘리야 같은 믿음의 거장들에게 거룩한 질투심이 든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런 믿음의 선배를 닮은 교사가 되고 싶다고요. 그 선배와 이야기 나누면서 저 역시 기독교사로의 삶을 꿈꾸게 되었어요.
캠퍼스에서 동기들과 함께 신앙생활 한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 같아요. 2학년 마치고 군대 가려고 할 때, IVF에서 4학년 마치고 가라고 했어요. 고민을 한참 하다가 결국 4학년 마치고 학사장교로 다녀왔어요. 만약 2학년 때 군에 갔으면 끝까지 IVF에 남아있지 못했을 것 같더라고요.

 

상황을 이기는 열정
임용 시험을 치고 7월에 입대했어요. 그 전에 교대 활동학사를 했고, 군 복무 후에 11월에 발령받았죠. 지금 사는 인천으로 그때 처음 왔어요. 아무 연고가 없어서 군대에 다시 온 느낌이었죠.
인천으로 오면서 주안장로교회에 나갔어요. 혼자고 아무것도 모르고 외롭기도 했던 신규교사시절, 교회 덕분에 안정될 수 있었어요. 교회 생활이 굉장히 좋았어요. 그래서 주중에도 2~3일씩 교회 나가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문득, 교회 잘 나가는 것도 좋지만 교사로서도 잘 살아야 한다는 고민을 하게 되었죠. 그렇게 TCF와 인연을 맺게 되었어요. 서울 TCF에 2005년 9월쯤부터 나갔어요. 서일향, 최영철 선생님이 인천 개척한다고 했을 때였어요.
제 신규 시절은요…. 신규 땐 열정이 있잖아요. 특별히 저는 복음을 아이들에게 소개해야겠다는 열정이 많았죠. 신규 4년 내내 토요일에 아이들과 성경공부하고 10명씩 교회 데리고 다니고 그랬어요. 주일 아침에 학생들과 같이 집에 모여서 라면 끓여먹고 같이 교회 가고 그랬어요. 학교 옆에 있는 만수감리교회에 아이들과 같이 다녔어요. 저는 주일학교 교사하면서요. (주안장로교회는 청년부만 다니고요.)
그땐 학교에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어요. 아무도 뭐라고 안했어요. 아침마다 기도하며 시작했고, 4년 동안 가장 열심히 복음도 전했죠. 교실에서 하고 싶은 것 다 했어요. 불신자였던 선배 교사도 저 하는 것 보면서 괜찮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아이들과 서대문형무소, 서울랜드 데리고 다니며 체험학습도 많이 했죠. 토요일에는 찜질방도 가고요.
지금은 이렇게 하면 말이 나오기도 하고, 나이가 드니 무서워져서 잘 못해요. 그땐 상황이 주어져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상황이 아닌, 한 기독교사의 열정이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주어져도 주저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에요. 그때만큼의 열정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변화하는 기독교사상(像)
신규 때는 교회 데리고 가고 교실에서 복음 전하고, 그게 기독교사가 할 수 있는 전부인줄 알았어요. 기독교사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전히 답하기 어렵지만 그땐 더 몰랐었죠. 2004년 기독교사대회에 참석하며 ‘기독교사가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많이 볼 수 있었고 많이 배우기도 했어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쭉, 기독교사로서 어떤 삶을 살아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좋은교사에서 교단에서 복음을 어떻게, 얼마나 전해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 한 적이 있어요.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교육과정이나 교사의 삶에 복음을 녹여내서 간접적으로 전해야 한다, 이런 논의들을 했어요. 그때까지 저는 간접적으로 복음 전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여전히 저는 구체적으로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접 복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선생님 안에 숨어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할 때 복음의 능력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이런 고민의 연장선으로 2013년 핀란드 덴마크 교육 탐방에 가게 되었어요. 다녀와서 저에게 각인된 키워드는 북유럽 교육 뿌리에 남아 있는 기독교철학이었어요. 학교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꼭 말로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학생들이 나를 볼 때 하나님이 보이고,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고 느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어요. 내가 어떤 철학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느냐가 복음 전하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였어요.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들이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마땅한 교육 철학이나 이념이 없어서 그래요. 사실 우리나라 교육 이념은 홍익인간이에요. 하지만 우리 교육은 홍익인간 이념 위에 세워져있지 않거든요. 신자유주의 같은 사상이 아무렇게나 혼합되어 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도 바뀌는 식이죠.
그런 면에서 덴마크 교육을 보고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신학자이자 목사, 정치가인 그룬트비가 교육의 밑바탕을 깔아놓았고, 그 정신 위에 콜이라는 사람이 학교를 만들고 전반적인 교육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학교 교육은 주고받는 살아 있는 말(living word)로서 이루어진다’는 철학을 기반으로, 더불어 살아가고 대화하는 민주시민을 길러내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교육이죠. 교육 자체가 기독교적이에요. 이렇게 그룬트비와 콜의 정신을 이어 받아 운영하는 학교가 25~30%라고 하니, 놀라웠어요.
공립학교의 경우에는 그룬트비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말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그 정신은 기억되고 있죠. 왕립도서관 갔었는데 가운데 그룬트비 사진이 걸려있더라고요. 철학이 세워지고, 후대에게 기억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느꼈죠.
독일도 마찬가지였어요. 독일의 루터교는 신앙생활 면에서는 거의 무너져있지만 교육에 루터교의 철학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어요. 정권이 바뀌어도 전체적인 줄기가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해 감동을 받았어요.
다녀와서 TCF 안에서 교육철학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고, 선생님들과 모임하며 많이 생각했어요.

 

제자 삼기. 삶으로. 끝까지
이런 경험을 통해서 결국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제자 양육이에요. 여전히 저는 학교에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교사의 삶이 뒷받침되어야하고, 복음에 기초를 둔 교육철학이 있어야하죠.
TCF에서도 제자 양육에 대한 소모임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어요. 교사선교회 김기웅, 주종호 선생님을 모시고 어떻게 효과적으로 우리 아이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할 수 있을지 고민하죠. 특히 도전을 받았던 것은, 아이를 맡은 1년만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책임진다는 것이에요. 내가 맡은 아이가 바르게 신앙생활하며 성인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삶, 제가 기독교사로서 평생 놓지 말아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빼기의 삶, 공동체와 함께
올해 현승호 선생님과 TCF 공동대표로 섬기게 되었어요. 대표가 되면서 힘쓰고 싶은 분야는,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부분이에요. 기독교사로 각자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세요. 교단에 선생님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어요. 우리 기독교사들이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특별히 TCF 안에서는 지역모임이 혼자 남겨지지 않고 선생님들이 공동체를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일, 이것이 공동대표로서 제가 맡은 가장 큰 부분이에요.
“더하기의 삶을 지양하고 빼기의 삶을 지향하는 공동체” TCF 공동체가 궁극적으로 이런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해요. 세상이 원하는 연수를 더하고, 승진 점수를 더하고,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끊임없는 더하기적인 삶을 강요하는 이 시대에서 잠잠히 우리 삶을 돌아보고, 나를 비우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만들어 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빼기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빼기의 삶은 혼자서는 살아낼 수 없는 것 같아요. 혼자가 아닌 다양한 공동체와 함께 기독교사로서 교단에서 살아내는 저와 선생님들 한 분 한 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계속해서 기독교사로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대로 살아내는 것이 꿈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선생님 삶의 자취를 따라가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서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