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의 가치를 말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배덕만 목사(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전임연구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을 졸업하고 Yale Divinity School과 Drew University(Ph. D.)에서 수학했다. 현재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전임연구원, 백향나무교회 담임목사로 행복한 사역을 하고 있다. 올해 8월에 개최하는 제11회 기독교사대회 주강사로 말씀을 전하실 예정이다.
인터뷰 김정태 사진 한병선·김영식
배 목사님은 최근 목회 세습과 같은 한국 교회 안에서 빗어진 사건에 보다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하며 한국 기독교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 개신교 오피니언 리더라 할 수 있다. 또한, 2018 기독교사대회 저녁 말씀 시간을 통해 어떤 메시지로 도전을 주실지도 기대가 되어 이전 대회 주강사님들보다 일찍 만나 보았다.
목사님의 어릴 적 이야기,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제 아버지는 1·4 후퇴 때 피난 오신 분이시고요. 어머니는 6·25 때 군경가족이란 이유로 할아버지가 공산당에게 처형을 당했던 집안의 분이세요.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북한에 강한 적대감을 가진 부모님 밑에서 자랐어요. 두 분은 교회를 다니진 않았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경기도 고양군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왔어요. 마침 이사한 집 앞에 교회가 있어서 여름성경학교에 초청을 받아 가게 되었어요. 그때 아담과 하와 이야기가 너무 재밌더군요. 그 다음 주부터 제 발로 교회를 찾아 갔습니다. 그 교회는 기도와 방언과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은사주의적인 성결교회였어요. 저는 그런 체험은 부족했지만 소원하는 마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중2 쯤에는 교회가 너무 재미있어서 수요예배에도 빠지지 않고 다닐 정도였지요. 바로 그 즈음에 제 안에 목사가 되고 싶다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 아버지는 경제력이 없었고 어머님이 혼자서 가족의 생계를 끌고 가던 터라 대학이 아닌 취업을 목표로 하는 공고 진학이 현실적인 진로였지요. 그럴 때 중3 담임선생님이 저를 대학에 진학시켜야 한다고 제 어머니를 설득하셨죠.
때마침 서인천고등학교가 신설되면서 학생 모집을 했는데 제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어요. 3년 학비를 면제 받고 다니게 되었지요. 그 학교에서는 장학생들을 중심으로 특별반을 구성하고 특별 과외를 받게 했어요. 그 때 저는 평소 소원대로 서울신학대학교에 진학을 하려 했으나 그런 제 의지와 상관없이 서울대 종교학과에 가게 되었어요. 저는 그것이 배신이란 생각도 했어요. 게다가 고3 때부터 신앙에 회의감을 들기 시작했어요. 성경에 대한 질문이 생기더군요. 그런데 교회 선생님들로부터 적절한 답을 받지 못할 때가 더 많았고 그렇게 질문하는 제가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고민 중에 담임목사님을 만나 제 진로를 여쭈니 목사님은 “아무도 너를 신학교에 강제로는 못 보낸다. 하나님이 너를 부르시면 때가 되어 네 안에 불타는 마음이 일어나게 할 것이고 그 때는 누구도 네가 신학대 가는 것을 말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죠. 또 전도사님도 종교학과 공부가 나중에는 신학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니 대학 졸업 후에 신학대학원에 가도 목사가 되는 길이 있다고 하시어 결국 서울대 종교학과에 가게 되었어요.
대학에 가서는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런데 종교학과의 공부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부모님과 은사주의적인 교회에서 자라 온 저에게 충격적인 것이었어요. 제가 민주화 운동이 활발했던 88학번인데다 종교다원주의를 말하는 종교학 공부로 인해 제 신앙을 지키기 힘들었고요. 또 과에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많아 지적, 문화적 열등감도 심했고요. 당시 대학 분위기로 이념적 방황도 심했습니다.
그렇게 극좌와 극우를 오가다 대학 3학년 무렵에서야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온누리교회 수련회에 갔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바로 다음 주에 카투사로 입대해야 했어요. 아버지는 폐병으로 쓰러져 대전 요양 병원에 가시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수발해야 하셨고, 동생은 삼성으로 가고, 제 여자 친구의 집안에서는 저와의 교제를 엄청나게 반대하던 때였지요.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제가 군대에 갔지요. 그런데 신검에 불합격하여 1주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폐병이 있다고. 사실 과거에 아버지에게서 옮았던 것으로 약 먹고 다 나았는데 엑스레이상에 비활동성으로 남아 있던 것이 신검에 걸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일이 제게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어요. 그 일을 겪으면서 제 신앙이 많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방위로 입대하게 되어 아버님 병문안도 자주 하게 되고 또 여자 친구도 지속적으로 만나게 되고 하면서 신앙이 회복되었어요.
방위로 가서 좋은 친구들과 기도 모임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고교시절 교회 목사님 말씀대로 제 안에 뜨거운 마음이 불타오르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서울신학대학원에 갔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그런 길로 가게 되었고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유학을 하면서 주로 공부하신 주제는 어떤 것이었나요?
신학대에서 3년을 공부했고요. 처음엔 시골 목회를 생각했어요. 좋은 선생님을 만나 교회사 공부를 하면서 조교도 할 수 있었어요. 그분이 지속적으로 격려해 주셔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돈도 없고 영어도 준비 안 된 상태였는데 권면하셔서 결혼 후에 신학교 졸업하면서 유학 준비를 했어요. 그리고 불가능할 것 같은 유학길이 열렸습니다.
그 당시에 신앙적 고민이 많았어요.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보였어요. 솔직히 한국교회가 너무나 천박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이유가 오순절운동,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향이란 것도 보게 되었습니다. 축복만 강조하다 신앙의 본질을 상실한 것이죠. 대중 불교와 샤머니즘에 경도된 모습이 한국 교회에서도 보였지요. 그런 것들이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이제는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럴 즈음 90년대 초반 영성신학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어요. 그래서 영성신학을 공부하려고 유학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주위의 모든 분들이 말렸어요. 그 이유가 첫째는 영성신학이 당시에는 가톨릭을 공부한다는 오해를 사게 하는 영역이었어요. 둘째는 GTU(Graduate Theological Union)라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연합신학교 때문이었어요. 당시엔 잘 알려지지 않은 학교였지요. 그래서 제가 본질에서 벗어나는 길로 간다고 보신 것 같아요. 그래서 교수님은 개신교 영성에도 좋은 인물이 있다며, 조나단 에드워즈를 연구해 보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교수님의 제안으로 결국 예일대에 갔어요. 가서 에드워즈를 공부하면서 제가 할 수 없는 공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외국인이 공부하기엔 한계가 있었어요.
그 때 제가 유학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오순절운동에 대한 거부반응이었는데 두 번째 학기에 한국에서 교수님이 책을 보내어 주셔서 번역하게 되었어요. 오순절운동과 관련된 미국 역사책이었는데 그 책을 읽으니 제가 생각한 것과 상당히 다른 부분이 있더군요. 결국 제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제가 자란 것이 성령운동의 텃밭이었고, 거기에서 세상을 어떻게 하나님 나라로 바꾸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 보니 결국 찾게 된 답이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어요. 인간의 편에서 볼 때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는데, 오순절 초기 역사를 보니 특별한 것이 있더군요. 미국 이주 역사에서 성령이 임했을 때 흑인과 백인이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고, 교회 안에 여성 리더십이 생기며,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고 계급 갈등과 빈곤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런 부분을 더 공부해서 한국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제가 좀 더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익숙한 분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종교사를 공부하며 20세기 미국 오순절운동에 대한 논문을 썼습니다.
교회 목회를 하시다 어떻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전임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신 건가요?
2004년에 귀국해서 2006년부터 10년간 대전에 있는 건신대학원대학교에서 교회사 교수로 있었습니다. 귀국해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존 하워드 요더, 짐 월리스를 알게 되었는데, 한국에 와서 그런 분야에 관심 있는 분들을 만나게 되어 한국교회 개혁에 대한 글을 읽고 발표하는 모임에 함께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자리에서 한 목사님이 저의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발표를 듣고는 ‘배 교수가 목회를 잘 몰라서 무책임한 비판을 한다’는 지적을 하셨어요. 그 때 목회 경험도, 교회 개척 경험도 없는 제가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또 제자들을 교회 개척의 현장으로 보내는 것을 생각하니 그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시작해야겠다는 고민을 했고요. 2007년부터 대전의 주사랑성결교회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전에서 성서한국 지역모임에도 같이하게 되었어요.
그 와중에 느헤미야에서 교회사 연구원으로 저를 초청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와 강의를 했습니다. 그러다 전임 요청을 받아 1년 정도 고민을 했습니다. 느헤미야에서 신학대학원 수준의 과정을 열었습니다. 그러면서 전임 사역자의 필요가 생겼는데 김근주 교수님이 먼저 전임을 결단하셨고 그 두 번째가 저였습니다. 고민 끝에 대전에서 사역을 정리하고 서울로 2년 전에 이사했습니다.
최근 사랑의교회 호화 예배당, 목회자 성추문, 명성교회 세습으로 한국교회 위상은 더욱 추락했습니다. 도무지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 현실을 두고 그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또한,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금의 시대와 교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한국교회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어쩌면 올 것이 왔고 또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130년 한국교회의 역사는 정상적인 형태의 교회 발전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 신앙이란 것이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인데 한국교회는 시작부터 일종의 준국가교회 형태의 유산을 물려받았던 측면이 있습니다. 초창기 때부터 국왕의 특혜를 받았고 해방 이후에도 교회는 정치적으로 국가에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분단 체제에서도 이념 갈등에 상처를 받으면서 교회는 보다 더 우 편향하게 되었고 반공사회 속에서 정부와 깊은 유착관계를 형성하면서 일방적 특혜를 받았습니다. 물론 이 과정 속에는 하나님의 역사도 있겠으나 워낙 정부의 특혜 속에서 압축적으로 성장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겪어야 할 과정을 건너뛰면서 내적으로는 미성숙한 상태로 머물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근대화 과정과 똑같은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서구 사회가 겪었던 과정을 건너뛰다 보니 그 속에 담긴 가치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시민혁명을 직접 겪지 않은 국가와 교회이기에 교회 안에 말도 안 되는 현상들이 드러난 것이지요.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병리 현상은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불교계와 가톨릭도 갖고 있는 동일한 현상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현실이 결국에는 전화위복이 될 거라고 봅니다. 지금 기독교인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거품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앞으로 교인 수가 더 줄어들 것입니다. 대신 1세기의 초대교회 상황과 유사한 형태로 갈 것입니다. 국가가 더 이상 교회를 비호해 주지 않고, 사회 안에 반기독교인 문화 세력의 지형이 형성되면서 기독교가 아닌 세속사회에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거기서 교회가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런 상황은 팔레스타인에서 시작한 작은 기독교가 헬레니즘과 로마제국 하에서 생존해야 했던 1세기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게 존재했던 수많은 비기독교적인 기제들(가령, 정부의 특혜, 미국의 영향 등)이 없어지게 되었을 때, 그 때 교회의 생존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역사만으로 가능케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진정한 기독교인만 남을 것입니다. 세상에 저항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진정한 기독교인들이 만들어지고 그들이 남을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는 변방으로 밀려날 것이나 성문 밖에서 이 시대에 도전할 수 있는 기독교인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기독교의 위상 추락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오히려 살리시는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장차 보석 같은 기독교인이 출현할 것입니다. 그 소수의 보석 같은 기독인이 다수의 국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좋은교사운동입니다. 최근까지 일부 교회는 적대 세력을 증오하고 비난하는 정치적 행동을 노골화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과거 신사참배에 참여하며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했던 것처럼 남북 갈등을 부추기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좋은교사운동은 교회의 이러한 움직임에 난처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좋은교사운동이 갈 길을 묻고 싶습니다.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는 모두와 잘 지내고 싶습니다. 싸움을 피하고 싶지요. 그런데 결국에는 선택해야 할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사들도 대한민국 시민이고 어느 지역 주민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에서 여러 가지 자신의 정체성 중에서 기독교인이란 정체성이 제일 중요한 자신의 정체성임을 드러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기독교사라는 이 정체성이 다른 모든 개별적 차이보다 가장 중요하고 더 중요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지점을 만날 것입니다.
저는 한국 기독인의 가장 큰 고민은 ‘내가 기독교인이다’라는 데서 기독교에 대한 정의가 다 다르다는 겁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각기 다른 기독교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복음이 아니라 내가 어떤 특정 지역 출신이냐, 내가 어느 정도 돈을 버느냐 하는 것이 기독교를 규정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성경이나 복음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보다 내가 사는 동네와 계급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적이고 사회적 존재이기에 우리의 신분과 계급을 넘기가 쉽지 않겠지만, 복음은 그런 우리들의 차이를 극복하고 치유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게 합니다. 그래서 복음이고 구원이잖아요. 바울의 말처럼 남종, 여종, 이방인, 유대인이 함께 살게 되는 것, 복음의 능력입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서로 다른 것들이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지만, 우리가 할 일은 그 현실과 차이를 인정하자는 겁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이 같은 생각을 할 수 없어요. 북에서 온 사람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 못 해요. 서로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란 기대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기독교가 뭐냐, 성경은 뭐라고 하냐?”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이죠. 복음의 능력이란 다른 사람들을 서로 존중하고 품고 나서 그 다름 안에 존재하는 복음, 신앙이란 공통분모를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서로를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는 긴 치유의 과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노력을 좋은교사운동이 앞장서서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목사님이 쓰신 ≪교회사의 숲≫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교회에서 출발한 서양 교육이 교회에 적대적인 된 현실은 고통스러운 역설이다.” 종교개혁이 공교육 발전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그 영향을 생각했을 때 오늘날 한국 교육이 갖는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특별히 좋은교사운동은 어떤 부분에 좀 더 힘을 써야 할까요?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지배적인 문제 중 하나가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물론 무신론적 인본주의가 존재하지만 이 땅에서 인간의 가치를 가장 존중하고 진지하게 다룬 종교는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성육신,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 자체가 희랍의 영지주의와 이원론을 극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연동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대립의 개념으로 만들어 그 둘을 분리시키고 신에 대한 사랑을 종교적 행위(이벤트 참여)로 축소시키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영역에서 책임 있는 공적인 삶을 살게 하지 못했어요.
중세 유럽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정치적으로 압도적 우위를 갖는 사회를 추구했습니다. 즉, 기독교라는 특정한 이익집단에 봉사하는 사회, 기독교적 이권을 유지하는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이기심에 불타는 세력들이 기독교라는 옷을 입고 서로 전쟁하며 세력 다툼을 한 것이죠. 그러다 보니 기독교의 핵심과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비판하며 대안으로 등장한 근대 사회는 종교를 벗고 세속주의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 사회와 계몽주의가 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 하다가 인간에게 포로가 되는 인간, 인간이 다른 인간과 돈의 노예가 되는 시대를 열어버린 것이죠. 이런 시대에 기독교육자가 가르쳐야 할 세상은 과거처럼 기독교가 우월한 세상이 아니라,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사는 세상,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함께 배려하며 사는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 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의 가치를 말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또한 타락한 문화에 제일 앞장서서 그것에 저항하는 싸움을 이끌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공부 잘해서 계층의 꼭대기에 올라가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체제의 기만성을 폭로하며 진정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야 합니다. 서울대를 못 가도, 아니 대학을 못 가도 얼마든지 기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보여주는 선생님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독교사대회를 앞두고 좋은교사운동 회원들에게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제자들과 함께하셨을 때 제자들은 변화된 예수님을 보고 초막을 짓고 그곳에 머물고 싶어 했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은 산 밑으로 내려와 간질 걸린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간질 병자를 피해, 괴로운 세상을 피해 변화산으로 올라가려고만 해 왔다고 생각해요. 거기서 황홀경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변화산에 오래 머물지 않고 산 밑으로 내려오셨거든요.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변화산에서도 만나야 하고 산 밑에서도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두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선생님들에게 변화산이 교회라면 산 밑은 학교라고 생각해요. 이번 대회 때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끌어안고 살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산 위로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산을 오르고 내리는 삶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삶, 산 위도 하나님 나라, 산 밑도 하나님 나라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을 잘 준비하도록 기도해 주시고 함께 고민을 안고 와서 기도하고, 울고, 웃고, 토론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내내 주옥같은 말씀이 너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을 다그쳐 계층의 꼭대기에 올라가게 하는 교육보다 진정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대학을 못 가도 얼마든지 당당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보여주는 선생님이 되라는 당부의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번 2018 기독교사대회, 정말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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