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만남

끝까지 눈물로 씨를 뿌리며 교육을 회복시키는 자

포천초등학교에서 영어 전담 교사로 아이들과 만나고 있다. 교사선교회 부산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젊은 동료 교사들과 책 읽는 모임을 인도하고 있다. 고신대, 동아대 등에서 ‘기독교 세계관’과 ‘포스트모던 인식론’ 강좌를 맡아서 가르치고 있다. 한국교육철학회, 한국교육사상연구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 상당 기간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적 관점이 교육 현장을 주도하면서 기독 교사의 정체성을 세우기가 더 힘들어질 텐데, 이 난국을 헤쳐 갈 수 있는 삶에 밀착한 성경적 관점의 교육 철학서도 펴내고 싶어요.”

글/사진 ․ 김태현

  포천초등학교 이현민 선생님


끝까지 눈물로 씨를 뿌리며
교육을 회복시키는 자

요사이 학교 수업을 많이 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학교 상황이 너무 열악해서 현장에서 힘들어 하는 선생님들에게 어떤 힘도 제대로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름 ‘수업친구만들기 운동’을 한다고 동분서주했지만, 학교의 어둠 속에서 오히려 내가 위축되어 아무런 도움도 선생님들에게 드리지 못했다. 절망적인 학교 속에서 우리 기독 교사는 늘 눈물만 흘려야 하는 것인가? 이런 비관적인 질문을 던지는 중에 이현민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도 여러 굴곡진 삶, 특히 늦게 시작한 유학 생활이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묵상했던 말씀이 시편 126편이라고 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려보내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묘한 울림이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 특히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는 말에 어찌나 힘이 나는지! 그리고 즉각적으로 ‘들이대기’식 막장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이현민 선생님께 이 말씀이 어떻게 해서 약속의 말씀이 되었는지 그의 삶이 궁금해졌다. 교직 10년 차, 35세의 나이에 남아프리카로 유학을 떠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현실의 벽을 넘어선 그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힘을 좋은교사 선생님들과 같이 나누고 싶었다.

 

건방진 프로필 팍팍!

현재 44살, 교직 경력은 21년! 1967년 경남 통영시 근처, 용초도라는 섬에서 목회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남. 부친이 신학을 마치고 부임한 곳은 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빙계교회! 하루에 버스가 두세 번 지나가는 오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냄. 부친은 하루의 대부분을 묵상과 독서, 연구를 하면서 보내셨는데, 그 덕분에 독서 생활에 쉽게 입문. 그 후 “독서가 쉬웠어요!” 엄친아 발언 시작!

1977년 초등 4학년 때,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 가족들은 부산으로 옮겨 와 구호 시설인 ‘모자원’에 들어감.

상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은행에 취업하려 했으나 극심한 불경기로 졸업생들 중 단 두 명만 은행에 취업하는 것을 보고, 대학 진학으로 진로를 바꿈. 허약한 신체, 경제적 궁핍, 암울한 장래를 두고 하나님께 항의성 기도를 하던 중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고 회심! 할~렐~루~우~야!

1986년 부산교육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교수님들의 강의는 알아들을 수 없었고 공부하는 과목들도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라 실망.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서 보냄. 또다시 “공부가 쉬웠어요!” 엄친아 발언 재시작!

교회 청년부를 맡아 부임하신 곽주섭 목사님으로부터 제자 훈련을 받으면서 성경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 대학 졸업 즈음, 모든 교육 이론과 실천의 저변에는 신념이 전제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교육대학원에 진학! 하지만 신앙과 학문의 조화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시작됨. 박사 과정 진학을 못 하고 4~5년 망설임. 그러던 중, 교사선교회 홍세기 선생님과 고신대학교 김성수 총장님의 도움으로 포쳅스트룸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짐.

포쳅스트룸 대학교에서 2001년 입학 허가를 받고 2002년 남아공에 감. 당시 나이 35세! 새로운 모험 시작! 하지만 간 지 석 달 만에 ‘너무 늦게 왔다’라는 회의감에 빠짐. ‘다시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죽기 살기로 공부에 달려듦. 엄친아 본성 발동! 그리고 드디어 2006년 11월 30일, 40세 생일에 논문 제출! 논문 이름은「포스트모던 인식론과 학교교육」. 제목만 들어도 머리가…. 드디어 2007년 5월 25일 고대하던 박사 학위를 받음!

늦은 나이 유학을 결심하고 새롭게 한국의 교육을 바꿔 가려는 이현민 선생님은 욕심쟁이 우후훗!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고민하다

35세, 교직 경력 10년 차. 이때는 그야말로 안정기에 접어들 나이다. 좌충우돌했던 사회 초년생의 삶을 버리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교직 생활을 안정적으로 할 시기다. 그런데 이현민 선생님은 이 시기에 유학길에 오른다. 교직 생활 중에도 매일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기를 좋아했다고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말 그의 말대로 현실 감각이 둔해서일까? 아니면 공부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커서일까?

“저는 80년대 학번으로 신앙인으로서 부조리한 현실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대학 4학년 때 강의 시간에 체벌을 주제로 토론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엄한 훈육 속에 자랐기 때문에 저는 체벌 옹호론으로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체벌 반대론자들과 격렬하게 토론을 벌였는데, 지도 교수님께서 마무리를 할 때 ‘아직 교사가 되지도 않았는데 체벌을 하겠다고 한 사람들은 교사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존경하는 교수님께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수긍하기 어려웠습니다. 제 삶에 근거한 진실한 의견인데, 너무 쉽게 부정되어 버려서 낙심이 컸습니다. 그리고 저는 체벌 반대를 주장한 친구와 이 문제를 두고 3일 동안 계속 논쟁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하는 중에 의견 차이는 사람을 보는 관점이 달라서 생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어떤 의견의 차이가 전제가 달라서 생긴 거라면 아무리 논리적인 대화를 해도 합의에 이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대 4년 동안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강의 중에 한 번도 다룬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후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석사 논문을 쓰면서 제 신앙적 신념과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진리가 하나라면, 나의 종교적 신념이 교육학에서 말하는 진리와 일치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거짓일 텐데,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제게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과 교육을 통합시키는 생각의 틀을 더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생각을 실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멘토를 만나다

“교육학적 전제를 탐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석사 공부를 했다.” “내 신앙과 학문이 일치하지 않아 번민했다.” 사실 책 읽기와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 선생님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조금은 힘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느끼는 신앙적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의 집요함에 가볍기만 한 내 삶이 부끄럽기도 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삶에서 철학적 성찰을 진지하게 하며, 기독 교사의 참된 삶을 고민하는 그에게 소중한 만남을 허락하신다. 바로 교사선교회 홍세기 선생님과 고신대학교 김성수 총장님이다. 두 분을 통해 이현민 선생님은 비로소 뜻을 품고 그 힘든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교직 5년 차 때에 촌지를 받았습니다. 돌려줘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써 버렸습니다. 자괴감이 컸죠. 머리로는 신앙과 학문에 대한 기독교적 고민을 했지만, 삶은 그러질 않았습니다. 기독 교사의 삶이 아니었죠. 제대로 된 기독 교사로 살려면 공동체가 필요하겠다 싶어 교사선교회를 갔습니다. 솔직히, 교사선교회가 제가 기대했던 교사 공동체의 모습은 아니었어요. 성경 공부 내용은 단순했고, 하는 활동도 전도와 양육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양육 모임을 인도하시던 홍세기 선생님이 ‘○○야, 안녕’식의 전도용 대본을 외워 오라는 거예요. 저는 단순 암기를 가장 낮은 지적 능력으로 보는 당시 교육학 이론에 따라 아주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 외웠죠. 그런데 홍 선생님이 계속 외우게 하시는 거예요. 4주 동안 하니깐 겨우 외워지더라고요. 그리고 저에게 과제를 내주시는 거였어요. 1주일 동안 아이들 두 명에게 전도를 하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큰 기대 없이 두 명의 아이들에게 외운 대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아이 모두 자기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크더라고요. 그때부터 공동체에 주인 의식을 가지고 임했어요. 당시 교사선교회 회원들은 평생 동역을 꿈꾸며 공동체의 비전과 각자의 비전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어요. 저도 고민했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런데 말씀을 가르쳐 주시던 홍세기 선생님께서 ‘공부를 계속하라!’는 거예요. 성경 공부를 같이하면서 홍 선생님께서 저의 마음을 읽었던 것 같았어요. 그리고 고신대 교수로 계시던 김성수 교수님과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주선해 주셨어요.”

“김 교수님께 저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이 책 저 책을 소개 받아 읽었어요. 그런데 책이 너무 어려웠어요. 사실 저는 퇴근 후면 부산교대 도서관에 가서 계속 공부를 했어요. 결혼했을 때는 집 앞 독서실을 끊고 공부했어요. 나름 책을 읽는다고 읽었죠. 그런데 소개해 주신 책들이 어려운 것이었어요. 그래서 새벽 1시, 2시까지 매일 책과 씨름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책의 내용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정말로 신기하죠. 돈오(頓悟)를 한 거죠. 한순간에 깨달아지는 그 경험! 그 깨달음 후에 가장 먼저 바뀐 것은 성경을 보는 눈이었습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구원 차원이 아니라 이 사회와 창조 세계 전체를 회복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비전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고민해 왔던 신앙과 교육의 통합,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내적 확신이 생겼어요. 그리고 내가 현장 교사지만 ‘신앙과 교육이 통할 수만 있다면 내가 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김성수 총장님께 토로하니, 국내에서 박사 과정을 하지 말고 해외로 나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포쳅스트룸대학교를 소개해 주고 그곳에서 공부하라고 강력하게 권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교사선교회에서도 매달 50만 원을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다른 계산 없이 그냥 나갔죠.”

 

박사 학위를 받다!

하지만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온 지 3개월 만에 이 선생님은 돌아가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실패하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버티자”고 하면서 힘겹게 공부했다고 한다.

“3개월 만에 현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35세의 나이는 너무 늦은 거였어요. 앞으로 해야 할 공부의 전모를 파악하는 순간 확률적으로 성공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제 아내가 ‘아닌 것 같으면 지금 돌아가자!’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이미 외통수에 걸린 인생,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가 보자’고 얘기했죠. 그런데 공부가 너무 힘이 들었어요. 한번은 아주 어려운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 책을 펴기가 너무 힘이 들어 3일 동안 연구실에서 그 책을 보면서 울기만 한 적도 있었습니다. 정말 하루 종일 앉아서 그 책 표지를 넘기지 못하고 울었어요. 저는 지도 교수님에게도 큰 고민거리였어요. 만날 제가 무엇인가를 붙들고는 있는데, 성과가 없으니 교수님도 참 답답하게 생각했어요. 학위를 마치기까지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몰라요. 그때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말씀을 새겼죠. ‘그래 더 눈물을 뿌리자!’, ‘조금만 더 버티자! 버티자!’ 하며 공부를 계속했어요. 그런데 2006년 1월이 되자 막혔던 논문의 줄기가 술술 풀리는 거예요. 참 신기하죠. 4년 동안 죽어라고 공부했지만 보이지 않던 논문의 방향이, 갑자기 풀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면담을 마치고 일어날 때 교수님이 ‘2006년도에 잘하면 마치겠다’는 말씀을 하는 거예요.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논문이 2006년도에 다 써진 거예요.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제가 이전에 가졌던 학문적 고민들이 어느새 해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찌나 기쁘던지! 정말 이때의 감정은 말로 다 표현 못 할 것 같아요. 이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홍세기 선생님, 김성수 총장님, 교사선교회 선생님들, 여러 감사한 분들의 얼굴이 떠오르더라고요. 무엇보다 묵묵히 제 옆에서 저를 지지해 준 아내가 정말 고마웠어요!”

 

새로운 비상을 준비하다

이현민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실의 벽을 넘어서려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붙들렸던 그 지점을 끝까지 잡아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선생님은 젊어서부터 신앙과 학문의 조화를 꿈꿨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한국의 교육 상황을 풀어 보고 싶었다. 그는 끝까지 이 고민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30대 후반의 삶을 불태우며 그 고민의 답을 얻어 냈다. 이제 그가 꿈꾸고 있는 교사의 삶은 무엇일까?

“좋은 교육 이론이 좋은 교육적 실천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교육 이론이 없으면 항구적이고 근본적인 교육의 변혁과 실천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현장 교사들에게 필요한 특히 기독 교사들이 공감할 수 있는 교육 철학적 이론 체계를 세우고 싶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동료 선생님들이 그런 관심을 세우는 일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상당 기간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적 관점이 교육 현장을 주도하면서 기독 교사의 정체성을 세우기가 더 힘들어질 텐데, 이 난국을 헤쳐 갈 수 있는 삶에 밀착한 성경적 관점의 교육 철학서도 펴내고 싶어요. 제게는 이론 작업이 여전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제가 관심을 가진 분야의 책이나 글을 보면 가슴이 뜁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이 목표를 두고 버티면서 살아 보렵니다. 하나님께서 또다시 은혜를 주시겠지요.”

이 선생님의 일관되고 한 가지에 집중하는 삶을 보면서, ‘나는 지금 어디에 붙들려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머릿속에서 순간 ‘행복한수업만들기’, ‘수업코칭’, ‘수업친구만들기’, ‘기독교적인 수업’, ‘기독교학교’ 등의 단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붙들린 이런 지점들을 가지고 이현민 선생님과 같이 내 온 삶을 던질 수 있는가? 그것들을 위해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면 떠나겠는가? 순간 ‘휴우’ 하고 큰 숨이 나도 몰래 나온다. 아직 나는 제대로 붙들지 않은 것이다. 붙들어야 하는데 현실의 안일함과 피곤함 속에서 대충대충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더 비장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그 소명을 붙잡아야겠다. ‘적당히’가 아니라 ‘온전히’ 내게 주신 그 길을 걸어가야겠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자신의 길을 걸어갔는데, 나는 죽지는 못할지라도 ‘끝까지’ 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생각했다. 결국 학교의 어둠과 아픔, 눈물 속에서 우리가 현실을 이길 힘은, 좀 더 치열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 내게 주신 소명을 끝까지 붙드는 것. 그리고 끝까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일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