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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내 힘이 빠질 때 주의 일이 시작됩니다(2013.07)

사람들이 수영을 배울 때에 힘든 것 중에 하나가 힘을 빼는 겁니다. 물에 뜬다는 것을 믿고 힘을 빼면 수영을 배울 수 있는데 교육도 그런 것 같아요. 교사가 뭔가를 세련되게 준비하면 잘 될 것 같은데 실패하는 거죠.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실패하지만 힘을 빼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나갈 때 교육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서울 숭실고등학교 김성수 선생님 

내 힘이 빠질 때

주의 일이 시작됩니다

 

 

 

 

/ 사진·김정태

 

 

 

 

 

난 기독교사대회 주제어였던 ‘A new kind of teacher’의 새로운 해석을 아시나요? ‘사람을 낚는 새로운 어부, 기독교사라는 신선하고도 황당한 재해석으로 연세대 강당에 모인 많은 선생님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던 김성수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TCF 안에서 선생님의 개그 감각은 거의 유재석을 능가한다고 하는데 남다른 그만의 웃음 코드의 비밀과 선생님이 생각하는 좋은교사와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 엄격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도 싹튼 개그 본능

저는 경남 진주에서 공무원이신 아버지와 전업 주부셨던 어머니 슬하의 2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고등학생 때까지 진주에서 자랐어요. 친가는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3대째 믿음의 가정이었고 외가는 외증조부 때부터 4대째 믿음의 가정이었어요. 물론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복인 줄 모르고 자랐죠. 예배, 교회 출석이 그냥 자연스런 생활의 일부였어요.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의 고지식하며 다소 엄격한 남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삼남매가 다 규범적인 생활을 하며 자랐는데 그 중에서 장남인 제가 장난이 제일 심한 편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께 혼나면 동생들이 저를 보고 조심하게 되는 그런 희생양, 시범케이스로 엄하게 자랐던 것 같아요. 최근 우연히 초등학교 때 동창을 만났는데 그 동창이 저보고 너 많이 사람 됐다는 뜻의 말을 하는 걸 보면 지금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개구지고 장난이 심했던 아이였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학교에서 소풍을 가면 개그 프로그램을 짜서 연습한 것을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장기자랑 하고 했어요. 벌써 그때부터 제 안에 나대는은사가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은 평생 새벽기도를 나가시는 분들이시라 성장할 때는 그런 엄격한 신앙 교육을 답답한 것으로 느꼈으나 지금은 그런 엄격한 교육을 감사하고 있고, 아버님의 엄격했던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이라 생각해요. 경제적으로 부유하진 않았지만 아버지는 저희 세 남매에 대해 나름 자부심을 갖고 계셨어요.

 

중고등부에서 경험한 성령의 뜨거움

중고등부 시절 학교생활에서는 재미를 못 찾았지만 교회에서의 자치 활동은 제게 충분히 재미를 느끼게 했어요. 특히 교회 친구들과 사귐이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중등부 임원을 할 때 남해도로 갔던 여름 수련회에서 집회 중에 성령의 뜨거움을 느끼면서 제 신앙이 새롭게 갱신되는 일이 있었어요. 비도 많이 왔던 그날, 예배 중에 체험했던 그 뜨거움을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학교에서는 존재감 없이 조용히 보낸 편이었어요. 제 기억에 그때 제가 다닌 고등학교는 영화 <말죽거리잔혹사> 같은 분위기였어요. 일반 학생들은 주로 찌그러져 공부하고 힘센 아이들은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었던 폭력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정의롭게 나설 입장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힘이 되지도 않았고요. 왜 그런 학교 분위기였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진주 지역의 과열된 학업 경쟁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요즘의 과고나 외고를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고전음악과 서울을 동경했던 진주 촌놈

1때 국어, 국사 과목을 배우면서 고전문학에 흥미를 느꼈어요. 교직을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고교 은사이신 교회 장로님께서 제가 한문학과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교직을 이수하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제가 대학 진학할 당시 교직이 그렇게 인기 직종이 아니어서 지원하면 교직을 이수할 수 있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저는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고 싶진 않았어요. 막연히 서울을 동경하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서울을 동경한 결정적 이유는 음악 감상 때문이었습니다. 2때 친구 집에 갔다가 클래식 음악을 들었는데 그만 그 음악에 매료되어 버렸어요. 그때 들었던 음악이 바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었습니다. 또 라디오 방송에 클래식을 들려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문제는 클래식 음악이 나오다가 특정 시간이 되면 그냥 지방 뉴스 방송으로 넘어가는 일이 많았어요. 그러면서 하루 종일 클래식 음악 방송을 들을 수 있는 서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요. 유치하지만 그게 제가 서울로 오게 된 강력한 동인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진주에서는 클래식 연주회에 가볼 기회가 거의 없었거든요.

 

국제 혁명주의자를 꿈꿨던 대학 시절을 지나 교사가 되다

고교 졸업 후 동경하던 서울에 와 보니 서울 사람들은 나보다 모든 면에서, 특히 문화적으로 월등할 것이라는 생각에 많이 주눅 들어 있었어요. 또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해야 해서 학교 도서관, 서점, 교회가 제가 활동할 수 있는 전 영역이었죠. 특히 1학년 때는 선배들이 술도 권해서 오리엔테이션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고립된 대학 생활을 했어요. 기특한 것은 제가 대학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비싼 돈을 쓰며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유익한 것은 도서관을 잘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1학년 때 도서관 사용법을 스스로 터득했어요. 거기서 대학 공부는 어떻게 해야할지를 알았어요.

그 후 대학 2학년 때부터는 사람들과 어울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어요. 주로 어울렸던 선배들이 대체로 학구적인 선배들이었던 것 같아요.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했죠. 당시 사회가 문민정부 때였는데도 사회적 갈등이 여전했고 대학 내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활동하는 시기였어요. 데모도 자주 하고 대자보도 자주 붙을 때라 그런 것들을 보면서 가치관의 혼란이 왔어요. 급기야 기독교 신앙이 허약해 보이고 이것이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치고 세계를 구원할 것인가? 나약한 기독교가 무얼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점점 발전하더군요. 그 결국에는 체제 전복, 혁명 같은 과격한 생각을 가득 품게 되었어요. 그런 생각을 키운 채 방학 중 진주로 내려가면 아버지와 자주 부딪혀서 다투기도 했어요. 그 길로 서울에 올라오면 아버지께선 아들과의 다툼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편지로 달래주려 하셨지요. 정말 정이 많은 아버지이셨어요.

돌아보면 그때 사회에 대한 막연한 비판이 심했어요. 굳이 표현하면 국제 사회주의자였던 것 같아요. 전 세계 민중들의 연대를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구체적인 어떤 행동을 하진 않았어요. 성경도 그런 관점에서 읽었죠. 예수님의 혁명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게 참 복음이라고 봤어요. 물론 그때 교회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졸업할 때는 진로를 두고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선택한 것이 대학원이었습니다.

그러던 대학원 1학년을 마칠 즈음에 숭실고로부터 운명의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그때 졸업할 때면 임용고사를 치거나 사립학교 교장 연합회에 원서를 내는 데 저도 원서를 썼어요. 당시는 면접 후 바로 채용을 결정하는 시기였죠. 이력서와 성적증명서를 가지고 숭실고로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가서 면접 보러온 다른 예비교사들을 보니 저는 면접 볼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였어요. 청바지를 입고 심지어 이력서에 증명사진이 없을 정도로 부족한 상태로 면접실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면접관님들이 신앙에 관한 것만 물어보셨어요. “아버님은 장로님, 어머님은 권사님입니다. 교회는 고신 교단입니다.” 그러니까 면접관님들이 모두 !” 하시는 겁니다. 그때 미션스쿨인 숭실고에서 교사 채용 기준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그 사람의 신앙과 신앙 배경이었던 거죠. 그 당시에 제 신앙은 파행이었으나 다행히 제 신앙 배경만 물어보신 바람에 그게 제게 플러스가 된 거죠. 또 대학 졸업 성적이 좋은 편이라 교사로 채용되었습니다.

 

내 인생의 BCAD를 나눈 ‘2004기독교사대회

그때가 1999년이었는데 당시 이슈가 교실붕괴였어요. 저와 함께 발령을 받은 7명의 신규교사 중에서 그 해에 두 분이 못 버티고 학교를 그만둘 정도였어요. 그 정도로 학교가 붕괴되어 있었죠. 교직에 대한 회의를 가질 만한 상황이었어요. 물론 저도 힘이 들었어요. 어떤 교육철학도 없었던 제가 갖고 있었던 교사의 모습은 쌓아 놓은 지식을 잘 쏟아내는 것이었죠. 그리고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기특한 생각은 학생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거였어요. 그 방법 중 하나가 학생들의 인사를 잘 받아주는 것이었죠. 학생들의 인사에 라고 답하는 것을 성심껏 실천하려 했습니다. 그 정도로도 저 스스로를 좋은교사라고 자위했어요.

그런데 진짜 교사가 되려는 준비를 하게 되더군요. 아이들에게 내가 아는 고전의 의미와 풍부함을 어떻게 잘 이야기해 줄까를 고민하기 시작하고 그 이듬해에 담임을 맡으면서 더 좋은교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어요. 근무 학교가 인문계고이다 보니 많은 선생님들이 생각하는 존경받는 교사의 상이란 이런 것들이었어요. 학생들을 대학에 많이 보내는 교사, 졸업한 후에 제자들이 많이 찾아오는 교사, 제자들의 결혼식 주례를 부탁 받는 교사, 유치하지만 이런 것들을 교사로서 가장 보람 있게 살아온 증거로 봤어요. 물론 저도 그런 증거가 있는 교사가 되고 싶었죠.

그래서 인성 교육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학생들과 공동체 프로그램을 많이 했어요. 집으로 데려 와서 라면도 끓여 먹이고 잠도 같이 자고 하면서 학생들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했어요. 심지어 방학 때는 조를 짜서 우리 집으로 초대했죠. 어쨌든 그렇게 아이들과 어울리며 소통하려는 노력을 상당 기간 계속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뭔가 근본적인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그러다가 어떻게 하면 학교를 좀 더 교육적으로 활발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자구책으로 기독교사대회에 참가했던 것이죠. 그때 2004기독교사대회에서 계속적으로 나왔던 메시지가 구원은 개인이지만 사역은 공동체로 하는 겁니다였어요. 그 메시지가 시간마다 들려지는 겁니다. 거기에 완전히 넘어갔어요. 마지막 날 같은 학교 안한영 선생님과 기숙사 앞에 앉아서 공동체에 들어가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성경 연구를 차근차근 한다는 TCF에 안한영 선생님과 같이 들어갔던 것이죠. 그때부터 기독교사의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고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2004기독교사대회는 교사 김성수에게 BCAD를 나누는 특별한 사건이었어요.

 

아내, 내가 나댈 수 있는강력한 신뢰의 근원

제 아내는 3학번 아래 한문학과 후배였어요. 97년부터 연애해서 2000년에 결혼을 했죠. 제 아내는 처녀 때 밝고 천진난만한 아가씨였어요. 지금도 돌직구성 발언을 수시로 날리고 있지요. 어쨌든 아내에게 감사하는 부분이 많아요. 저의 모자라는 부분이 적지 않아서요. 특히 아내에게 감사하는 것은 제 아내의 집안이 가톨릭 집안이었어요. 그래서 결혼이 어려울 뻔 했는데 제 어머니께서 아내에게 네가 우리 집안에 시집오려면 교회를 다녀야 한다.”라고 하셨죠. 그리고 아내는 바로 교회에 나갔어요. 사실 그 상황에서 제 아내가 받은 상처가 많았어요. 그런 상처들을 내색하지 않고 제게로 와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어요. 그 무엇보다 제 아내의 저를 향한 깊은 신뢰는 제가 밖으로 나댈 수 있는강력한 동인이죠.

 

아이들이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교내 축구대회 아나운서

연극 감독, 토크쇼 사회자, 축구대회 장내 아나운서 등 앞에서 말하는 걸 잘 하게 된 건 한마디로 제 달란트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덜 떨리는 뻔뻔함이라는 달란트를 받은 거죠.^^ 특별히 사회자나 진행자로서 결정적인 자신감을 갖게 된 계기는 2010TCF 30주년 기념 수련회 때 토크쇼를 진행하면서부터였어요. 그때 청중들의 빵빵 터지는 반응을 접하면서 ! 뭐가 되는구나!’라는 것을 느꼈어요.

하지만 제 개그의 코드는 개그맨 유재석씨와는 달리 한 사람의 약점을 파고 들어가 그를 희생시켜 웃게 만드는 것이라 바람직하진 않아요. 다만 희생되는 분들과의 유대 관계가 반드시 선행되지요.

저는 요즘 학교 스승의 날 기념 사제동행 축구대회에서 장내 아나운서를 합니다. 언젠가 학생팀과 교사팀이 시합을 하는데 공차는 것만 보는 것이 너무 밋밋한 거예요. 그래서 교감 선생님께 허락을 구하고 출전한 교사와 학생 선수들의 명단을 받아 각 교사들의 유행어와 약점, 별명을 조사해서 장내 아나운서를 하기 시작했죠. “아 저게 축구입니까?” “쫛쫛선생님, 종례 좀 그만 하시죠!” 이런 식의 멘트를 날리면 학생들이 빵빵 터지는 겁니다. 교실에서만 들을 수 있는 선생님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대운동장에서 마이크로 공개되는 거죠. 제 멘트에 해당되는 선생님들이 공 차다가 멈칫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도 제가 사전에 선배와 후배 선생님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 후에 날리는 거친 멘트들인 거죠. 축구 후에도 다시 선생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면서 용서를 구해요.^^ 그런 멘트들을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해요. 많은 아이들은 제게 다가와 선생님, 이번 축구 대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어요. 정말 멋진 해설이었어요.”라고 말해요.

 

북한 선교를 꿈꾸며, 기독교적 진로 지도를 고민하며

지금 저의 큰 관심사이자 기도 제목은 두 가지인데요. 그 첫 번째는 북한 선교입니다. 숭실고가 원래는 평양에 있었어요. 그런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라 그런지 언젠가부터 저는 북한 선교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제 개인적으로는 통일 후에 반드시 남과 북 사이의 인적인 교류가 있을 것이고 그러면 누군가 평양에 가서 제2숭실고를 세우고 북한 사람들과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할 것인데 누가 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제가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도하면 그런 생각을 계속해서 갖게 하세요. 그리고 제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죠이어스 교회)에서도 북한 선교에 사명을 갖고 북한 땅에 노인요양 시설을 짓고 있어요. 이렇게 북한 선교에 계속해서 연결되고 하는 것에서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2년 전 교회 사람들과 함께 중국 연길에 갔어요. 조선족 어린이 사역을 하면서 북한쪽 접경 도시를 보았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뜨거움이 있었어요. ‘! 이건 하나님께서 북한 선교에 마음을 부으시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또 최근에 과목을 한문에서 진로 상담 교사로 옮기게 된 것도 북한 선교와 관련되어 있어요. 통일이 되어서 북한 청소년들이 교육을 받을 때 그 아이들에게 진로 교육이 꼭 필요할텐데 어떤 진로 지도를 받게 해야 할지 그 필요들이 너무 분명하게 보이는 거죠.

또 하나는 기독교적 진로 상담 교육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진로 교육이 많이 보편화 되었어요. 그런데 진로 교육의 한계를 말하자면 개인의 소질과 적성을 잘 발견해서 그 소질과 적성에 맞는 길을 찾아 가라,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적으로 바라볼 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너를 통해서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가?’란 질문을 해야 하는 것이죠. 지금 숭실고에서 이걸 해보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서울 TCF 모임에서도 기독교적 진로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해요.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때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물을 때 자신을 알게 된다는 거죠. 그때 내가 선명해지죠. 진로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부분을 학교 교육과 부모 교육에 확장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 지금 갖고 있는 고민이자 관심사입니다.

 

내 힘이 빠질 때, 내가 연약할 때 그 분의 일이 시작됩니다

기독교사로서의 정체성이 혼미할 때, 저는 제자의 결혼식 주례에 서는 것을 교직의 영광으로 아는 삶을 살았습니다. 계속 그랬다면 저는 지금, 우리 시대 일반계 고교의 한계를 들이대며, ‘어쩔 수 없잖아, 교회 다니는 학생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방법은 좋은 대학 가는 것뿐이야.’라고 말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은 기독교사모임을 통해 만난 선생님들의 영향력 있는, 다르게 살고 있는 삶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또 내 눈 앞에서 지금 이 학생이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요즘엔 크게 섭섭해 하지 않아요. 왜냐면 이 학생의 변화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에 조바심을 내지 않고, 뭔가를 이루려고 억지로 하는 것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어쩌면 수영과 신앙과 교육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수영을 배울 때 힘든 것 중에 하나가 힘을 빼는 겁니다. 물에 뜬다는 것을 믿고 힘을 빼면 수영을 배울 수가 있는데 말이죠. 마치 하나님을 의지해 힘을 빼면 은혜의 바다에 둥둥 뜨는 것인데 내 힘으로 뭔가를 하려고 용을 쓰면 안 되는 것과 똑같다고 봐요. 교육도 그런 것 같습니다. 교사가 뭔가를 세련되게 준비하면 잘 될 것 같은데 실패하는 거죠.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실패하지만 힘을 빼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나갈 때 교육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역설을 알게 되니까 도리어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선생님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크게 웃었던 순간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항상 선생님이 있는 곳에 활기와 유머와 열정이 나눠지는 그 이면에는 부모님의 신앙 교육과 함께 그의 삶을 잔잔히 이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일 시대를 준비하며 기독교적 진로 상담 교육을 꿈꾸시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오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발걸음을 친히 이끄실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김성수 선생님! 연극 무대에 오르기 한 시간 전에야 대본이 나오는 것도 그 믿음 때문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