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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일기

너희들도 기뻤으면 좋겠어



담임 엄마의 말랑말랑 연애편지 13
너희들도 기뻤으면 좋겠어

이 여 진


 ^____^ 안녕? 담임 샘이 보내는 첫 번째 연애편지. 인사 올립니다. 사실 쓸까 말까 고민을 좀 했어. 작년 한 해 연애편지를 써 보니 이게 참 행복하면서도 힘들더라고.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규칙적으로 긴 글을 쓰려면 꽤 많은 성실함이 필요하거든. 

 그래도 결국 또 쓴다. 편지가 주는 기쁨을 알기에. 진심이 전해지는 행복함을 알기에. 그리고 나는 온 힘을 다해 2학년 11반을 사랑하기로 다짐했기 때문에 또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다. 한두 번 받을 때 까지는 손발이 오그락오그락 하겠지만 세 번째부턴 그러려니 하게 될 거야. 맞제? 지혜야. (지혜는 2년 연속 저와 담임의 연으로 만나고 있는 행운아 1인입니다.)  


내 마음을 먹고 자라길

 벌써 3주가 지났다. 얘들아, 신기하지 않나? 우째 이래 시간이 잘 가노. 학교에 있으면 정말 시간이 금방금방 간다. 그래서 아가씨 선생님이 노처녀로 승화되어 가는 것도 잊고 담임 삼매경에 빠져서는…. 쩝 그러하다. 참.

 나는 작년과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음, 일단 교칙에 아주(?) 너그러워졌다. 11반은 화장도 너무 많고, 치마는 대부분이고, 휴우. 시작하려니 끝이 안 보여서 일단 기본적인(?) 것만 야단치고 있지. 이것만 해도 너희들한테는 얼마나 낯선 깐깐함일까 안쓰러워하면서.

 잔소리하는 것, 야단치는 것. 그런 것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누가 그랬더라? 애들은 잔소리를 먹고 자란다고. 난 반대일세. 너희들이 내 마음을 먹고 자랐으면 좋겠다.

 

 좀 힘들지만, 그래도 얘들아 이 공동체 안에 들어왔으니, 이곳에 있는 규칙을 지키자. 학생부 선생님들은 이른 아침부터 나와서 고생하시는데, 나 혼자 너그러운 척, 착한 척, 야단치지 않고 보내기가 더 미안하더라. 내가 화를 내지 않고 말로 해서 덜 무서운 게냐. 이제 화를 낼 테다!

 그리고 또 뭐가 달라졌을까. 공부를 좀 더 많이 압박하는 것? 음… 작년보단 내 맘이 좀 더 급하네. 조만간 너희들의 진학이 다 결정된다고 생각하니까 어떻게든 너희들이 올 한 해를 후회하지 않게 시간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더 많이 다독이고, 더 많이 응원해 줘야겠다는 마음.

 

쉬는 시간이 없는 시간표

 음… 요즘 나의 고민? 요즘 나의 고민은 너무나도 바쁘다는 것이다. 지켜보면 알겠지만, 하루 중 여유 시간은 죄다 수업 준비로 보낸다. 그래도 난 늘 시간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다.

 올 한 해 1학년을 한 번 더 했다면, 작년에 완전 열심히 준비했던 수업 지도안을 한 번 더 우려먹을 수 있었을 것이나 난 과감히 오직 님들과 한 해를 더 보내겠다는 일념으로 2학년을 맡은 것이다. 에헴.

 그리고 또 무슨 고민을 하지? 어떻게 하면 남자 반 수업을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그리고 빨리 상담을 끝내야 하는데 아직도 열세 명이나 남아서 큰일이고, 야자 마치고 집에만 가면 자꾸 초코파이 세 개를 연속 복용해 버릇해서 고민이고, 나날이 피부가 수척해져서 걱정이고.

 

좋아하는 게 많아서 좋아

 그래도 생각보다 참 괜찮은 11반이라서 즐겁고, 2학년 선생님들이 다들 참 좋아서 즐겁고, 올해도 작은 교무실에 있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상담을 하고 나면 정말 늘 마음이 따뜻하고 다정해져서 행복하고. 요즘 아침마다 차 안에서 먹는 토마토가 꿀맛이라서 행복하고, 야자 감독을 하다 보니 매일 야자 1교시에 말씀 묵상을 빼먹지 않을 수 있어서 좋고, 늘 기도하다 잠이 드니 좋고. 선생님은 그래도 즐거울 때가 훨씬 더 많다.

 지금 선생님 책상 위에 하얀색 수증기가 뽕뽕뽕 솟아나는 미키 마우스 가습기가 있어. 가습기에서 나는 물 냄새가 좋아. 비 개인 신어산 풍경도 좋아. 산을 둘러싼 뭉글뭉글 물기가 잔뜩 어린 구름도 좋아. 급식 시간도 좋아. 휴대폰에 문자 오는 소리도 좋고, 만지면 기분 좋아지는 분홍 곰 마우스 패드도 좋아. 너희들의 웃음소리도 좋고,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야자 시간도 좋아. 아이들과 조곤조곤 상담을 하는 것도 좋고, 공강 시간에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 놓고 수업 준비를 하는 것도 좋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게 많아서 좋아.

 

 사랑하는 11반, 나는 너희들이 기뻤으면 좋겠어. 기쁨과 슬픔은 결국 내가 선택하는 거란다.


좋아하는 것이 많아 즐거운,
그리고 11반이 좋아서 즐거운,
여진 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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