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교사는
아이들 상처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집니다”
서천석 (서울신경정신과 원장, 행복한아이연구소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일하던 중 어른들이 앓고 있는 마음속 병의 뿌리가 어린 시절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소아청소년정신과 과정을 밟았다. 지금은 아이들은 물론 상처 입은 어린 날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한 부모들을 상담하는 의사로 살아가고 있다.
2010년부터 MBC 라디오 <여성시대>의 ‘우리 아이 문제없어요’를 진행하고 있고, MBC의 <아빠! 어디가?>, KBS의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 육아예능 프로그램의 자문의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여러 방송과 강연 등을 통해 많은 부모들을 만나고 있지만 정작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그의 작은 진료실이다. 그림책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한겨레신문》에 <서천석의 내가 사랑한 그림책>을 연재하고 있으며,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라는 상담 코너를 네이버캐스트에 연재 중이다. 저서로는 《하루 10분, 내 아이를 생각하다》,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가 있으며 이 저서들을 통해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가 제정한 저작상의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된 바 있다. (예스24 제공)
인터뷰·김진우 / 사진·김현경
소아정신과 의사 서천석은 <서천석의 마음연구소>, <슈퍼맨이 돌아왔다>, <두근두근 학교에 가면> 등의 방송으로 대중에게 친근하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를 들으면 왠지 어깨에 놓여 있는 짐 하나를 덜어내는 기분이 든다. 마음이 좀더 밝아지고 따뜻해진다.
‘쉼이 있는 교육’ 운동과 맞닿아 서천석 원장을 만나게 되었다. 과도한 공부로 쉼을 잃어버린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정신과 의사로서 주는 어떤 메시지는 무엇일까? 한편 그가 바라보는 학교와 교사의 모습이 어떤지도 궁금했다.
교사와 의사는 사람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신과 의사 입장에서 학교라는 환경은 건강한가? 대답은 다소 충격적이다. 서 원장은 각자도생의 구조에 던져진 교사의 위기가 곧 학생의 위기와 연결되는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인터뷰는 2월 27일, 동화책으로 가득한 ‘타샤의 책방’에서 진행되었다.
학창시절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은 어떤가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문예반을 했어요. 그때 문예반 선생님은 저에 대해, 제가 쓴 글에 대해 얘기해줬고, 내가 잘하는 것이 있다고 인정해주었죠. 개인적으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첫 번째 기억이에요. 그때 글 열심히 썼죠. 한편으로 그 선생님은 촌지를 받았어요. 특히 상을 받으면 꼭 촌지를 내야 했어요. 이것 때문에 어린 마음에 혼란이 있었고, 글쓰기 흥미가 떨어진 측면도 있었죠.
그 외에 선생님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은 별로 없어요. 선생님도 인간이다 보니 애들도 매력적이어야 기억에 남을 텐데. 저는 별다른 매력도 없고, 딱히 도움이 필요한 아이도 아니어서 주목을 못 받았죠. 공부를 좀 하면 보통 반장, 부반장 하잖아요? 근데 저는 그런 것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경우엔, 제가 보기에 인생의 패배자 느낌이었어요. 서울대 출신이 절반이 넘었는데 ‘내 친구들은 잘나가는데 나는…’ 식의 신세 한탄을 많이 들었거든요. 수업도 잘 안 하셨어요.
그 때문인지 고등학교 때는 혼자 철학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책 읽고 얘기하기 좋아하는 친구들이랑 친하게 지낸 것도 있지만, 뭔가 있어 보이잖아요.(웃음) 치기였기도 했고. 국민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철학 부분 보면서 흥미가 생겨 대학생 형들은 뭐 읽나 물어보며 책을 봤었죠. 당시에는 까뮈, 사르트르같은 실존주의 철학을 열심히 읽었어요.
학창시절에 저는 어떤 선생님 영향을 많이 받았다기보다 학교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학교 자체에 ‘우리 학풍은 리버럴하다’는 식의 굉장한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당시에 많이 하지 않았던 연합서클이 활성화되어있었죠. 당시에 청계천에 있는 청소년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방을 빌려주었어요. 학생 때 갈 데가 없으니까 그 방에서 친구들과 연합 서클 창립도 하고 선언문도 만들고 했죠. 여자 회원도 받고. 그렇게 놀았어요.
선생님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는 게 아쉽긴 해요. 정신과 의사가 되면서 한명의 좋은 선생님으로 인해 인생이 크게 달라진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사람을 변화하게 하는 건 사람이기 때문이겠죠. 그런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아쉬워요.
정신과 의사가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나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아프셔서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과에 갔는데, 이미 저는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철학, 사람의 선택이나 판단,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지 공대나 자연대 쪽엔 흥미가 없었거든요. 정신과는 의대 다니면서 심리학 등에 관심 가지며 선택을 하게 되었죠.
소아정신과는 공중보건의 활동을 하면서 생각하게 되었어요. 대형 정신병원에서 근무했는데, 성인 중증 지적장애와 자폐성 장애인들이 있었어요. 한 80명 중에 3명 정도만 대화가 가능했고, 대부분은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분되지 않았어요. 그분들을 마주하며 생각을 많이 했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이분들을 어릴 때 도왔다면 지금보다 더 나았을 수 있을 텐데. 이미 성인이 된 환자들에게 복지 외에는 도움 줄 수 있는 것이 사실상 없더라고요. 그때 조기의 도움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릴 때는 정신적인 문제를 치료하기가 비교적 쉽지만 성인에게는 너무 어려워요. 그전에는 스트레스, 수면, 성문제 등에 관심이 있었는데 이런 경험으로 전공을 바꾸게 되었어요.
소아정신과 의사로서 사회에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을까요?
의사라면 누구나 아는 비유가 있어요. 어항 물이 더러워서 물고기가 자꾸 병에 드는 거예요. 의사니까 물고기를 꺼내 병을 고쳐주는데, 물고기가 다시 어항에 가면 또 병에 걸리는 거죠. 그러다보면 어항 물을 바꿔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겠어요? 이게 제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에요.
하지만 이런 질문도 가능하죠. 사회 환경이 문제라면 왜 일부만 병에 걸리냐. 모두가 우울증에 걸리고 심각한 문제를 겪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볼 땐 이런 거예요. 어떤 환경에서든지 환경에 가장 취약한 사람이 병에 걸리기 쉬워요. 이때 사회적인 허용도가 높은 곳에서는 1~3%의 사람들만 병에 걸리는 거고, 사회적인 환경이 열악하면 5~10%까지 병에 걸릴 수 있는 거죠.
다시 말해 개인의 기질이나 조건이 어느 정도 나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조금만 나빠도 적응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환경이 있다는 말이에요. 저 같은 의사가 보는 사람들은 그런 면에서 조금 약한 사람들이죠.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환경에 그럭저럭 적응해서 같이 살 수 있을까, 제가 하는 고민은 이런 거예요. 갑자기 강하게 만들 수는 없거든요.
치료를 끝내고 나가는 환자가, 내가 본 마지막 모습으로 잘 사는 것이 의사의 바람이죠. 치료해서 내보냈는데, 다시 오겠다 싶으면 의사로서 무력감을 느끼는 거고요. 그런 무력감을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 사회가 좀 더 긍정적인 방향이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 사람이 더 수용되고 저 사람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금의 약점을 가진 사람도 적응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게 정신과 의사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죠.
정신적 약점을 지닌 아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으신가요?
아이가 가진 문제에 대해 부모가 너무 놀라면 안 됩니다. ‘아이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야 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없을 거다’ 이런 식의 생각 자체가 이루기 어려운 목표거든요. 비현실적인 것이 목표가 되면 불행할 수 밖에 없어요.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 자체가 완전할 수 없잖아요. 불안과 불안정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삶의 조건이라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한 거죠. 부모의 불안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이도 자기에 대한 믿음이 없어져요. 아이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완전히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세요.
아이와 지금 실천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찾고, 그 순간을 함께 느끼고 발전할 수 있으면, 괜찮은 인생 아닌가요. 부모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내면에서부터 부모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거예요.
우리 사회에서 부모들의 불안이 높다고 보십니까?
높습니다. 사회적 허용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요. 어느 수준 이상이 되지 않으면 너를 허용하지 않아, 차별받아 마땅해, 이런 흐름이 있어요. 도리어 부모가 사회의 앞잡이가 되어 아이들을 채찍질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최저선을 보장하지 않으니 누군가는 그 선으로 떨어져야 할 텐데, 내 자식은 안 된다는 거죠.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문제는 아이들도 이것이 우리 사회의 조건이라고 당연시하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공부 안하면 힘들게 사는 게 당연하다, 내가 좋은 조건에 있는 것은 스스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죠. 아이들은 자신이 애초에 얼마나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는지 고려하지 못해요. 이런 식의 사고가 어린 친구들로 갈수록 더 심해요.
부모로부터 불안을 전달받은 아이들이 자라서 불안을 재생산하는 구조가 반복되는 것 같은데요. 부모에게 어떤 처방을 내릴 수 있을까요?
실제 임상 현장에서는 부모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않게끔 해요. 그 다음에는 현재에 집중해서 아이와 함께 할 만 한 것을 해 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해요. 구체적인 목표를 이뤄내야만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잖아요.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만 있어도 삶이 괜찮거든요. 만족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어요. 걱정과 불안에 에너지를 쓰지 않는 만큼 ‘지금’에 집중할 에너지도 생기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열악한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아까도 말했듯 사회가 최저선을 보장해 주지 않으니까요. 조금 다르게 말하면, 이 사회는 정신과 의사가 계속 돈을 벌게 되는 구조라는 거예요. 요즘 자기계발서는 어떻게 하면 상처를 안 받나, 불안을 이겨내나 고민해요. 작년에 최고 인기 많았던 책이 <미움받을 용기>라는 심리학 책 이었잖아요. 전 사회가 정신적 혹은 심리적인 치유를 원하고 있어요. 세계적인 흐름이 있는 것도 맞지만 우리나라에서 좀 더 극단적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요. 하지만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죠. 다들 우리도 아프다고 외치는 거예요. 정신과 의사는 더 어렵고 극단적인 사람들을 돕는 것이 역할인데 이제 대중들이 나도 상처가 있다며 도움 받기 위해 모여드는 상황인 것이죠.
학교에도 심리적인 어려움이 있는 학생들이 있는데, 교사들은 이 아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혹은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 주변에 교사들이 많은데, 교사들을 보면 그 문화의 독특함을 느껴요. 교사 문화의 가장 큰 문제는 성장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실은 닫혀 있고, 수련 과정도 없어요. 내 성장을 책임질 사람은 오로지 나뿐인 거죠. 하지만 세상에 혼자서 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 성장하도록 돕고 책임져주는 시스템이 있어야 성장이 가능해집니다.
서로 간섭하지 않는 교사 문화는 개인을 존중하는 문화라기보다 관료제가 침투하기 좋은 환경으로 고착시키는 환경이에요. 시키는 것만 잘하는 사람을 원하고 있어요. 교사의 성장에 관심이 없고, 각 개인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죠. 직업 생활에서 성장을 경험하지 못하면 정말 힘들어요. 자기 유능감을 못 느끼는 것이니까요. 그 직업을 그만둘 확률이 높아지고, 그만두지 않는다면 영혼 없는 껍데기만 남게 되겠죠.
정신과 의사들도 당연히 그런 공동체가 필요해요. 어려움을 함께 나눌 동료 친구가 없다면 생존하기 어려워요. 정신적 문제가 심각해 질 수도 있고요. 특히 어려운 환자가 있거나 환자에게 상처를 입었을 때, 동료들과 서로 치유하는 시간을 갖죠. 교사 집단 내에도 이런 공동체가 필요해요. 좋은교사운동같은 교사 모임이 전체적으로 있어야만 합니다.
아이들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이것을 기억해야 해요. 내가 아이를 맡는 기간 중에 아이가 전혀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교사인 나로서는 그 시간을 버텨주는 것이 어쩌면 최선이에요. 버티는 과정만 해도 당연히 에너지가 드는 힘든 일이죠. 내가 좋은 선생이 맞나, 자기에 대한 불신이 들기도 하고요. 그걸 함께 나누고 다독여줄 동료가 없으면 번아웃(Burn out) 돼요. 이렇게 번아웃 된 교사들이 너무 많아요. 아니면 처음부터 아이가 다가오지 못하게 무섭게 겁을 줘서 아이를 회피하는 경우도 아주 많죠.
관리자들은 아이들에게 집중하기보다 행정 업무를 하라고 해요. 제가 정말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젊은 교사들에게 너무 많은 일을 시킨다는 거예요. 이거 정말 미친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젊은 교사들이 집중해야 할 것은 아이들을 이해하고 교과과정을 배우고 학교 현장에 익숙해지는 것이죠. 그래야 교사로 성장할 수 있잖아요.
초등 교사를 예로 들까요. 아이들을 한 번씩만 경험하려고 해도 1~6학년까지 6년이 걸립니다. 단 한 번씩 경험할 때요. 그런데 그 기간에 학교에서 제일 어려운 잡일을 시켜요. 그 나이 아이들이 어떤 발달 단계인지 파악도 못한 교사한테 이런 걸 시킨다는 말은 뭡니까? 네가 학생에 관해 잘 알든 모르든, 잘 교육하든 아니든 관심 없다는 거거든요. 교사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는 거예요.
이런 학교의 문화, 교사의 성장과 아이의 성장 모두를 책임지지 않는 문화 속에서 교사도 아이도 상처를 너무 많이 받고 있어요. 상처받은 교사는 아이들의 상처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져요. 사람은 자기가 상처 많이 받으면 남의 상처에 대한 감수성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교사가 아이들의 상처에 공감하고 그 속에 함께 들어가는 것이 너무 힘든 게 현실입니다.
교사의 상처를 돌보는 사람이 생기면, 교사는 당연히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는데, 지금 우리는 이것을 각자의 능력 여부로 보고 있는 거예요. 네가 훌륭한 선생이면 너는 네 상처도 극복하고 아이들 상처도 극복하게 해줘야지, 이렇게 말해요. 이렇게 할 수 있는 일부만이 성공한 교사가 됩니다. 일부만 성공하는 조직은 망하는 거예요. 일부만이 살아남는 조직이 어떻게 굴러가겠어요? 더군다나 선발을 통해 들어온 조직이라면 적어도 7~80%의 사람들은 성공할 수 있게, 괜찮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지요. 우리의 교육 시스템이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사 문화에 대해 예리하게 보고 계시네요. 교사들에게 주는 조언으로 ‘버티는 것’만도 중요한 것이라고 하셨어요. 버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신과 의사들이 초기 수련과정에서 ‘구원망상’을 흔히 겪어요. 의사가 되었으니까 ‘내가 이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극복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 힘으로 짧은 시간 내에 문제를 다 해결한다? 어려운 문제죠.
부모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해요. ‘내가 노력하면 우리 아이를 좀 더 훌륭한 아이로 키울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요. 나는 노력하는데, 애가 안 따라 온다는 생각이 들면 싸우게 돼요. 사랑하는데도 차이가 벌어지는 이유죠.
교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 앞의 아이를 제 길로 인도해야 한다, 못 이끌면 나는 좋은 교사가 아니다.’ 이런 생각을 실제로 많이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내가 아이를 만나는 시간은 그 아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에요. 아이 입장에서, ‘나’라는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많은 교사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당연히 교사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있죠. 그 편견이 깨지는 데 일 년이 걸릴 수도 있어요.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을 현실적으로 정해야 해요. 교직경험이 많은 교사들은 젊은 교사들에게 이것을 알려 줘야 하고요. 정신과 의사들도 “내가 이 환자 꼭 고쳐야겠어요.” 하면 선배 의사들이 “그래, 네가 이 환자 다 고칠 수 있어. 그러려면 한 12년 쯤 걸리고, 네 영혼을 갈아 넣으면 돼.”(웃음)라고 하죠. 주어진 시간동안 풀 수 없는 문제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과도한 노력을 들여요. 그러다가 노력의 대가가 안 나오면 인간은 좌절을 느끼게 되죠. 좌절은 보통 분노를 유발하기 때문에, 이 분노가 그 아이 또는 자기에게 향할 수 있어요.
현실적인 목표를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요? 과도한 목표와 방임 사이에 균형을 잡을 수 있으려면요.
아이가 지금 어느 상태인지, 가족은 아이를 얼마나 도울 수 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 같아요. 저도 실제 임상에서, 내 앞에 있는 아이가 놓인 여러 조건과 상황 중 어느 지점을 파고 들어가거든요. 교사도 아이에 대해 다각적으로 바라보면서 아이를 도울 방법을 찾아야겠죠.
예를 들면 전문적인 도움을 찾도록 부모를 설득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일 수 있어요. 어떤 아이가 어른에 대해 상처를 받아왔다면, 나는 아이를 따로 만나 인간적인 접근을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처방일 수 있죠. 어떤 아이에게는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잘하는 작은 것을 칭찬을 해줘서 아이가 변화하도록 돕는 등 아이들 개인에 따라 교사의 목표는 달라질 겁니다.
경험 많은 교사들은 아이를 보면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아, 이 아이는 요런 게 약하구나, 이렇게 하면 아이에게 먹히겠다.’ 이런 것을 조금이라도 빨리 파악해서 아이와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아이가 ‘이 선생님은 나쁘지 않구나.’ 하는 정도로만 해도 관계를 쌓아 갈 수 있습니다. 요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생님이랑은 조금 더 좋은 관계를 갖게 해주는 것이에요. 아이들 눈에 선생님은 자기보다 좀 괜찮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잖아요. 나보다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나랑 관계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아이를 조금씩 변화하게 만들어줘요. 좋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또 다른 팁 몇 가지만 더 말씀해 주시죠.
비난을 많이 받은 아이들의 경우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면 굉장히 빨리 마음을 열어요. 조절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에게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고요. ‘좋은’ 선생님이라고 하는 분들이 실수하기 쉬운 부분은,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맞춰주다가 아이들에게 끌려가게 되는 것인데요. 오히려 아이들이 불안정해지고 더 지나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내가 너한테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왜 이러니’ 생각하고 또 비난하게 되거든요. 아이의 상처가 반복될 수 있는 지점이에요.
조절을 하는 선생님은 온유하고 따듯하게, 좋은 관계를 바탕으로 제지 선을 말해줘야 합니다. 단 분명하게 해야 해요. 에너지를 너무 많이 들여 설명할 필요도 없고, 아이들이 불만을 제기하면 그냥 “그러게, 원래 이런 거야.” “이렇게 해야 상황이 진행될 수 있어.” “에이, 협조 좀 해줘.” 식으로 말하며 넘어가는 게 나아요. 아이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제한 선을 만들어 두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생겨요.
착한 선생님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또 있어요. 아흔 아홉 마리 양은 두고 한 마리 길 잃은 양에‘만’ 집중하는 경우에요. 어렵고 특별한 아이니까 도와주자는 식으로 교실 분위기를 만들면 안돼요. 모든 아이는 다 똑같아요. 본능적으로 자기가 첫 번째가 되고 싶어 해요.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아이라고 해서 좀 어려운 친구보다 사랑을 덜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교사도 사람인데, 모든 아이를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어요. 다만 아이들이 모두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표현을 달리 해 줄 수는 있겠죠. 아이들마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방식이 다른데, 그것을 캐치하고 알아봐주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든 모든 아이들이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줘야 해요.
예를 들어, 어려운 아이와 선생님한테 사랑받기 위해 이 아이를 열심히 돕는 아이가 있다고 해요. 선생님은 이 둘을 특별히 챙기게 되죠. 그럼 중간에 있는 다수의 아이들은 화가 나요. 아이들이 화를 품고 피해의식을 갖게 되면 결국 화는 교사에게 돌아와요. 어려운 아이를 차별하는 것은 좋은 의도라도 상황을 악화시키게 됩니다.
원장님은 사회를 향한 발언을 좀 하는 편입니다. 우리 사회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은 주로 어떤 것입니까?
저는 생활인으로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좀 유명해지니까 사회적 메시지가 되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내 말을 사람들이 듣는다고 해서, 알려진다고 해서 말을 하지 말아야겠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옳은 의견만 말해야 하나요? 그렇지도 않고요. 각 개인마다 자기가 한 말에 책임지면 되는 것이죠. 주변에서는 그런 발언을 공공의 것이 아닌 개인의 생각으로 받아들이면 돼요.
제 생각은 이런데. 저도 아무래도 자체 검열을 하고, 적게 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시끄럽고 복잡하게 말이 나오는 것은 싫기 때문에 그렇죠. 이런 자제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개인의 발언을 조금 더 가볍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우리 사회는 오류가 있는 말을 하면 창피한 것이라고 강요라도 하는 것 같아요. 오류 없는 말, 그럴듯한 말만 하려고 해요. 중요한 것은 예의를 가지고 서로 말을 받아치기도 하면서, 토론과 논쟁의 흐름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사람들은 겉으론 아무 말도 안 하면서 뒤에서만 말을 많이 하죠. 알음알음, 얘기가 통하는 사람들끼리 쿵짝 맞추며, 이해관계와 인맥으로 논의의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 우리 사회 모습입니다. 건전하지 못하다고 봐요.
학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학교 안에도 토론이 없잖아요. 교실에서도 교무실에서도. 먼저 말하는 사람은 튀는 사람이 돼요. 한국사회에서 몇 년 살다보면 그래서 발언을 안 해요. 내가 말해봐야 한계가 있으니까, 조용히 내 할 일이나 해야겠다, 생각하죠. 이렇게 개인주의로 흐르게 돼요.
OECD 32개국 중에 ‘공동체 생활지수’, 우리가 32위에요. 전에는 선진국은 개인주의, 한국은 공동체 문화. 이렇게 배웠거든요. 공동체를 강조하는 사회였는데 어느새 꼴찌가 되었어요. 우리는 주어진 문제를 개인이 해결해야지, 공동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해요. 노력을 하지도 않고 활동을 하지도 않아요. 우리에게 남은 것은 눈치 보는 공동체, 험담하는 공동체예요.
열심히 살고 선의도 있는 많은 사람들은 다들 ‘개인’으로 충실히 살고 있어요. 하지만 개인은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아요. 함께 해야 일이 쉬워지고, 불가능이 가능해지기도 하는데. 우리 문화는 ‘너나 열심히 살고 얘기 해.’ 딱 이거잖아요.
학교 현장에서도 ‘나나 좋은 선생 되면 되지, 내가 나선다고 바뀌겠어?’ 이렇게 패배주의가 많고요. 개인들이 먼저 움직이지 못하도록, 학생들은 12년 동안 강하게 학습 받고 있어요. 교실에서도 일등 모범생만 우리 반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지각 좀 하는 학생은 우리 반이 어땠으면 좋겠다고 말 할 권리가 없는 건가요?
우리 사회가 개인주의적이고 발언하는 것에 대해 취약한 심리적 환경이 된 원인은 뭐라고 보시나요?
어떤 신문사에서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수가 6.25 전쟁을 말했어요.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개인이 살아남아야 한다, 집단은 개인을 보호할 수 없고 상처를 준다’는 생각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 와중에 말 많은 놈은 빨갱이였잖아요.
개인의 발언이 전체를 안 좋은 방향으로 몰고 간다는 인식이 형성되었어요. 토론과 대화를 해서 사회의 방향을 결정해 간다는 것은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이라고 사회적 학습이 된 것이죠. 그 영향이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IMF를 들 수 있겠죠. IMF의 교훈은 개인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 후에 엄청 유행한 예능이 <1박2일>인데, 우리에게 만연한 ‘나만 아니면 된다’ 정신을 재미있게 반영한 것이라고 봐요. 실제의 불안감이 예능에서는 페이소스가 있는 즐거움이 된 것이죠.
부모들 역시 내 아이가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가서 좋은 직장 가는 것을 바라지만, 어떻게 하면 경쟁을 최소화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줄일 수 있을지를 고민하지 않아요. 개인적인 노력을 99% 한다고 치면, 사회적인 노력은 단 1%만 하는 것이죠. 모두가 공범이에요. 같이 협력해서 차별을 줄일 수 있다는 믿음이 없어요. 불가능이라고만 생각해요.
최근 아이들에게 쉼을 찾아주자는 취지의 ‘쉼이 있는 교육’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부딪치는 것이 부모들의 불안 문제입니다. 더 ‘굴려야’ 살아남는다는 생각인데요. 부모들에게 던질 수 있는 효과적인 메시지가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사례를 발굴해서 말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열심히 시키면 당연히 잘 할 가능성이 높겠죠. 하지만 충분히 잘 하고 있는 아이들을 더 잘하게 만들기 위해 과도한 경쟁을 할 때, 플러스보다 마이너스가 많다는 사례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효과적인 방법은 학부모를 안심시키는 것이에요. 아이들이 학대당하고 정신병에 걸린다는 식으로 불안감을 조장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공부를 과도하게 시키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보다 뒤쳐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 때문인데, 그런 불안을 다른 불안감으로 상쇄시키는 방법으로 한다면, 이 운동은 성공할 수 없어요.
지금 엄마들이 듣는 정보는 온통, 돼지엄마처럼 좋다는 것 다 시키는 엄마들 이야기거나 사교육 업체가 제공하는 정보예요. 다른 정보는 유통 되지 않아요. 다른 정보를 흘려야 이 운동이 성공한다고 봐요.
학교 밖에서까지 사교육으로 쉴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사교육이 효과 없는 공교육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봐요. 과외하면 확실히 내신 성적이 오르니까 학생 스스로가 정말 좋아하거든요. 제도와 같이 맞물려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쉼이 있는 교육을 했을 때, 학교 수업만으로 아이들을 평가해서 아이들이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겠죠.
마지막으로 교사단체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작은 공동체들이 필요합니다. 공동체가 점점 사라지는 학교 속에서 좋은교사와 같은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희망이죠. 학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의 공동체, 성장의 공동체가 교사집단의 주류가 되어야 아이들도 학교에서 즐겁게 배우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런 씨앗이 되는,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을 해달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각자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사회 구조 속 아이와 학부모들, 각자 살아남는 것이 최선인 학교 구조 속 교사들이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외롭게 좌절하며 각자는 지칠 수밖에 없다. 이런 구조는 심리적 약자에게 특히 불리한 구조다. ‘상처받은 교사는 상처받은 학생들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명제를 되새긴다. 교사들이 서로 지지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학교 안 심리적 약자를 돕는 안전망을 꾸리는 것이다. 교사들의 상호지지 관계를 방해하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어떻게 걷어낼 수 있을지 고민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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