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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일상에서 치유자로 산다는 것(정혜신+이명수 치유공간'이웃'_2016.5)

일상에서 치유자로 산다는 것

 

 

정혜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웃치유자)
+ 이명수 (심리기획자, 치유공간 ‘이웃’ 대표)

 

 

현장치유자로 연인으로 동지로 함께 한다. 국가 폭력 생존자들을 상담 지원했고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심리치유센터 ‘와락’을 만들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산에 거주하며 치유공간 ‘이웃’의 이웃치유자로 살아가고 있다.

 

 

 

 

인터뷰·임종화, 조창완 / 사진·주종호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앞두고(선생님들이 이 글을 읽을 즈음이면 2주기가 지나있겠군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우리의 관심, 그리고 우리가 2년 전 했던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약속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에 지금도 세월호의 아픔과 슬픔에 동참하는 분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작년 5월호에서는 유가족과 강영희 선생님, 아름다운 배움 고원형 대표를 만나보았는데요. 작년에 이어 올해에는 정혜신, 이명수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안산에 있는 치유공간 ‘이웃’을 찾았습니다.    

 

 

임종화(이하 임): 오늘은 인터뷰를 한다기보다 고민 상담을 한다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두 분은 고문 피해자,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을 돕는 일을 해오셨고,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안산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이런 활동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정혜신(이하 정): 처음 국가 폭력 피해자들을 상담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입니다. 그 후부터 주로 트라우마 현장에서 심리치유 관련 일을 주로 해왔어요.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현장 경험이 우리만큼 많은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일이 없을까 해서 진도 팽목항에 가게 되었어요. 그 곳에서 아이들 시신이 부모에게 가기 전에 수습하는 신원확인소에 있었어요. 그곳에서 아이들을 많이 봤죠.
저희가 만나왔던 분들은 광주 5·18 피해자, 7~80년대 고문 피해자,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등이에요. 길게는 30년에서 짧게는 2년 전, 과거의 트라우마를 가진 분들이었죠. 지금까지 저희가 과거를 치료하는 것이었다면, 세월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어요. 그 아픔이 와 닿는 강도가 달랐어요. 현장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았죠. 어떤 것보다도 피해자가 소중한 생명 자체인 ‘아이들’이라는 것이 견딜 수 없었어요. 둘이 의논해서 2주 만에 하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안산으로 왔어요.

 

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셨네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명수(이하 이): 정혜신 씨는 진료실이 아닌 재난 현장의 피해자들과 오래 함께 한지라 좀 다른 데가 있습니다. 현장치유자로서의 경험이 누구보다 많은 사람이라는 거죠. 그런데 팽목항에 다녀온 후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새벽 두세 시에 잠에서 깨보면 일어나 팔다리를 떨며 울고 있기도 하고, 우울증 증상이 있었어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팽목항에서 본 아이들이 꿈에 나와서 ‘아줌마, 우리 엄마아빠, 동생, 언니 잘 부탁해요’ 라고 말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살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산으로 이사 온 거예요. 정혜신 씨가 다른 사람보다 대단한 무언가 있어서 안산으로 온 것이 아니었어요. 어찌 보면 이기적인 선택이었죠. 정혜신 씨가 정신과 의사로 수십 년의 경험이 있고 현장에서는 십여 년을 일하며 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상담해 왔는데, 이렇게 무너지는 것을 처음 봤어요.
‘세월호 트라우마’라는 것이 얼마나 전 방위적이고 파괴적인지를 생생하게 느꼈습니다. 전문가마저 이렇게 무너지게 만들었다면, 유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사람들은 오죽할까 생각하게 되었죠. 그래서 현장에 직접 가서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임: 치유공간 ‘이웃’의 사역을 간단하게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치유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일상을 복원’하는 것이에요. 팔에 화상을 입은 사람을 치료하는 목적은 팔을 원래대로 복원하는 거죠. 육백만 불의 사나이처럼 만들거나 인공지능 팔처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동일하게 일상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치유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의 복원이에요. 그게 시작이죠.
‘이웃’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치유 밥상’입니다. 한 밥상에서 같이 밥 먹고 마사지 받고 뜨개질하고, 엄마들과 함께 수다를 떨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유가족을 위한 심리치유센터라고 하는데, 가면 같이 밥만 먹고 뜨개질, 마사지하고 얘기하고 텃밭 가꾸는 활동이 무슨 치유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현실 감각을 복원하는 좋은 방법이에요. 우리는 오랫동안 그걸 현장에서 검증했잖아요.
유가족 엄마들은 원래 엄마였고 주부였어요. 아이를 잃고 나서는 설거지나 요리를 한 적이 없어진 엄마들에게 이웃치유자(자원봉사자)들이 밥을 정성스럽게 차려 줍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불편해 하세요. 엄마들은 차려진 밥상을 먹다가 어느새 주춤주춤하면서 설거지도 돕고 합니다. 저희는 그것을 말리지 않아요. 원래 100m를 전력질주 하던 사람이 지금은 10m도 걷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분들에게는 한 발자국을 걷는 경험이 ‘아! 내가 원래 100m를 뛰던 사람이었지’라는 것을 생각나게 해주거든요. 실제로 아직까지도 일상에서 밥을 못하는 엄마들이 많아요. 그렇지만 여기서 잠깐 설거지를 할 때 감각이 돌아오는 거죠. 우리는 이런 것들이 모두 치유라고 보는 거예요.
뜨개질도 중요한 치유의 방법이에요. 지금까지 실 값만 5천만 원이 들었어요. 적지 않은 돈이지만 ‘이웃’에서는 이것을 실 값이 아니라 약 값이라고 봅니다. 심리치유센터에서 약 값이 엄청나다고 치료를 중단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임: ‘일상적인 치유’ 방법이 인상적입니다. 평범한 우리도 ‘이웃치유자’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언제까지 ‘이웃’에서 이런 활동을 하실 생각이신지요?

정: 현실 상황이라는 것이 계속 변하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려워요. 여러 외부 요인 때문에 부모님들이 좋아졌다가도 한순간에 심리적으로 요동을 치기도 합니다. 상태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그때마다 상황을 봐가면서 적절한 접근을 결정합니다. 우리가 의도를 가지고 무엇을 계속 하겠다는 것 보다는 그때그때 적응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거죠.
이웃치유자들은 이곳에 와서 매일 설거지와 청소만 해요. 하는 일이 너무 보잘 것 없고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이제 안와도 되겠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나 의미를 알아야 지속이 가능하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일상적인 치유’에 대해 이웃치유자들과 함께 지치지 않고 얘기를 나눕니다.
‘일상의 회복’이라고 얘기 했는데, 이것은 상담실에 데려다놓고 상담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특히 재난을 겪은 사람들은 삶의 모든 것이 부서진 사람들이죠. 직장 생활, 인간관계에서, 혹은 고부 간에 겪는 갈등은 사실 부분적인 문제거든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상담실에서 받는 상담이 도움이 될 수 있지요. 하지만 삶의 모든 부분이 부서졌고 기능이 전부 마비된 상태의 사람들에겐 상담만 한다고 치유가 되지 않아요. 함께 밥을 먹는 행위 등을 통해서 ‘치유적 공기’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우리는 그분들이 개별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식판을 안 쓰고 밥상을 각 상으로 정성껏 준비해요. 집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치유에 반하는 것이죠. 상담을 통해서 언어적으로 전달하는 것보다 일상의 삶에서 그런 것들이 스며 있을 때 치유 효과가 훨씬 탁월하다는 것을 우리는 현장에서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굉장히 공들여서 밥상을 차립니다. 그런데 잡채나 월남쌈처럼 색색가지 알록달록한 음식은 안 해요. 엄마들이 먹는 음식이 잔치음식 같다는 생각이 들면, 어느 순간 ‘내가 지금 살겠다고, 이게 맛있네’ 이런 생각이 들게 돼요. 그러면 아이들에 대해 죄의식이 생기고 체하죠. 당연한 마음의 흐름입니다. 치유적인 공기를 만든다는 것은 굉장히 섬세하게 조율해야 해요.
저희가 생각하는 치유의 원리란 일상에서 계속해서 경험되어야 하는 거예요. 질문 중에 치유가 더딜 수 있겠다고 하셨는데요. 더뎌 보이지만 이 방법이 가장 빠릅니다. 여기에 모든 피해자 부모님들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 오시는 분들은 그래도 많이 치유되었어요.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할 수 있는 치유의 경험이 있죠.

 

임: ‘이웃’의 활동에 대해 조금 더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활동을 하다보면 힘들 때가 있을 것 같은데 여기에 계신 ‘이웃치유자’들은 힘들 때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 밥상을 예로 들었지만, 뜨개질 같은 것도 복잡한 문양이 있는 것은 잘 안 해요. 예술적으로 정교한 뭔가를 하다보면 ‘이게 뭐하는 짓일까’ 그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에요. 엄마아빠들이 간담회에 갔다가 돌아올 때, 시민들이 연대해주니 고맙지만 ‘내 아이가 잘못되었는데, 저 사람들이 뭐라고 내가 고맙다고 하고 이 짓을 왜 하고 있는 걸까’ 라는 회의가 들 수 있어요. ‘좋은 사회가 되어도 우리 아이는 죽었는데, 남의 자식들 살리려고 내가 이 짓을 해’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잖아요. 그게 사람이거든요.
저희도 이웃에서 일을 하면서 하루에도 열 번씩 ‘누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이 나이에 무엇을 하겠다고 여기 와 있나, 이 일이 의미가 있을까’ 묻게 돼요. 거처를 안산으로 옮기고 나니까, 왜 낯선 데서 잠이 깨면 한순간 여기가 어딜까 당황하게 되고 그렇잖아요. 그런 낯섦이나 불편함이 여전히 있습니다. 여기서 매일같이 엄마들과 아이 얘기 하며 웃다가 울다가 밥 먹고, 이러고 있는 것이 정말 필요한 도움을 주고 있는 건가 계속 고민을 하죠. 이웃치유자들과도 이런 고민을 치열하게 함께 해요.
이렇게 익숙해지지 않는 불편함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의 본질을 잊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없는, 아이들 생일모임을 하고 있어요. ‘이게 말이 되나, 아이는 없는데 엄마와 일가친척 부르고 이웃들을 부르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일까’ 등의 생각이 모임 때마다 저절로 떠올라요. 그러면 생일모임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또 고민할 수 있게 됩니다.
치유공간 ‘이웃’이 개소하고 일 년 정도는 엄마아빠들이 너무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던 시기였어요. 당장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을 잘 보듬고 춥지 않게 해주고 밥 잘 대접하고 어깨 어루만지며 눈 맞추는 것이었죠. 같이 울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했어요. 그 다음 시즌으로 넘어갈 때는 희생자 형제자매들의 상태가 굉장히 심각해졌어요. 그 아이들의 회복을 위해 애썼어요.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는 함께 공감하고 연대하는 분들에게 관심을 집중했어요. 유가족 뿐 아니라 공감하고 연대하는 분들도 일 년이 넘어가니 너무 힘이 드는 거예요. ‘사람들 다 포기한 일인데 나만 돈키호테 같이 이러고 있는 것 아닌가, 내 자식도 아닌데 뭐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참사 직후부터 지금까지 매일 9시 출근 전에 한 시간씩 사거리에서 피케팅을 하는 분이 계세요. 이런 분들은 어깨. 팔다리 등이 아프고 피부가 튼 사람도 많아요. 지금은 유가족 뿐 아니라 이분들을 부축해주는 것이 세월호 진상규명이나 치유를 위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이분들을 만나서 힘을 주고, 지금 본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알려주고 있어요. 이웃으로 함께 가는 거죠.

 

임: 이웃치유자의 역할을 강조하셨는데 어떤 분들이 함께 하고 계시나요?

이: 이웃치유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오세요. 예를 들어 아이가 셋인 엄마인데 확률적으로 우리 아이는 셋이나 되니까 이런 사고를 당할 확률이 더 높다는 공포가 생긴 거죠. 그래서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마침 이런 곳이 있다니까 와서 일을 하고 있어요. 여기서 일해주시는 엄마들은 대부분 그렇게 온 거예요. 특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구요.

 

임: 계속 고민이 되고 조심스럽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으면서도 세밀하게 다가가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또 다른 어려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꼭 전문적인 도움만이 유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같은 입장에 서있다는 것,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돼요.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군가의 문자나 전화만으로도 사람은 견딜힘을 얻잖아요. 그런 식으로 연대해 주는 것이 엄청 힘이 됩니다.


 

임: 이제 세월호 참사 2주기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희가 볼 땐 사회적 관심이 점점 옅어지는 것 같은데. 어떻게 느끼고 계시나요?

정: 사회적 관심은 시간이 가면 옅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족들 입장에서, 세월호 문제에 깊이 연대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벌써 잊을 수 있냐고 하겠지만,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전 국민 트라우마예요. 거의 실시간으로 아이들이 희생되는 것을 전 국민이 봤어요. 정황상 훨씬 많은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는데 어른들의 책임 방기로 그 아이들을 못 구했다는 사실도 모두가 알고있죠. 세월호 참사는 어디 파병을 가서 전선에서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에요. 일반 부모들 입장에서는, 우리 아이도 갔었고 다른 집 자녀들도 다 가는 수학여행에 갔다가. 대학생에게는 학창시절에 다녀왔던 수학여행, 중학생에게는 언니오빠들이 다들 가는 수학여행에 갔다가. 나도 돌아다녔던 아주 평범한 곳에서 이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죠.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무의식적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어떤 ‘실천’을 안하는 것 같지만, 그런 분들 중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동안 무기력했다. 죄책감이 든다.” 말하는 분들이 꽤 많아요. 실제로 피케팅을 하거나 여기 나와서 자원봉사를 하는 등 구체적인 일을 하는데 까지 연결되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어요. 그들 중에서도 시간이 지나면 지쳐서 수가 줄어들 수는 있지요.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니란 겁니다. 지금도 세월호 얘기만 하면 울컥하는 주부들이 많아요. 제가 ‘세월호 세대’라고 일컫는 아이들이 갖는 심리적인 파장은 대학생 세대가 겪고 느끼는 것과 또 전혀 다르구요. 세월호 트라우마는 일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전쟁이후 가장 큰 트라우마라고 할 만큼 파급력이 엄청나요. 세월호 트라우마는 도저히 잊혀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잊혀지는 듯 보인다고 조바심 가질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임: 저도 그랬고,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뭘 했나’ 생각하다 보면 마음이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행동이 뭐가 있을까요? 저도 개인적으로 리본을 다는 정도 밖에 못하고 있습니다.

이: 그런 것들이 중요해요. 대형 참사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약간 멍해지는 측면이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없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부터 떠오르는 거죠.
리본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제가 얼마 전에 지하철 환승을 하려고 서있는데, 어떤 젊은 친구가 독립운동가 접선하듯이 오더니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러는 거예요. 제 가방에 달린 리본을 보고 그런 거죠. 그 젊은 친구는 나이 먹은 사람이 그렇게 리본으로나마 표현해주니 고마운 거죠. 서로 고맙다고 말했어요. 그 친구는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고 저도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일을 한 거예요.
어떤 선생님은 아이들 250명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매일 한 명씩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해요. 촛불 켜놓고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하는데,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도 하고 있어요. 저는 강연을 갈 때마다 이런 분들이 있어서 아이들도, 부모들도 편안해질 것이고 우리도 힘을 받았다고 꼭 언급합니다.
지금 힘들어서 감당을 못하겠으면 잠깐 뒤로 물러나 있으면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되면 그걸 하면 되고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와 눈물밖에 없다면 그걸 하세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요. 유가족들은 지하철에서나 길 가다가 리본 달고 있는 사람들이나 차에 붙어있는 리본을 보면서, ‘아! 아직 잊혀지지 않았구나’ 안심할 수 있어요. 작은 표현이 어떤 이를 살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조창완: 말씀 들으면서 저도 많이 치유가 됩니다. 저는 안산에 살고 있고, 안산에서 근무하는 교사입니다. 늘 마음에 부담감이 있어요. 참사 당시 안산의 모든 학교 현장은 정상화될 수 없었어요. 단원고 뿐이 아니었죠. 안산의 모든 학교에 친구들이 있었어요. 수업이 존재할 수 없었고 울음바다였죠.
저는 안산 교육의 문제를 풀겠다며 여러 활동을 해왔는데요. 이 어마어마한 사건 앞에서 내가 하고 있었던 모든 일, 내 자신조차 초라해졌죠. 지금도 그 트라우마가 제 안에 있거든요. 지금도 ‘세월호, 단원고’라는 이름만 들어도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두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마음의 짐을 많이 내려놓게 됩니다.

정: 저희도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이것만 하는 거예요. 사실 진정한 의미의 치유가 되려면, 전제는 진상규명이에요. 밝혀져야 할 것들이 밝혀지고 처벌도 되어야 해요. 그제야 마음에서 기억할 것은 기억하고 떠나보낼 것은 떠나보내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지요. 이것이 곧 애도이고 치유의 과정이에요. 그런데 현재 진상규명 자체가 안 되고 계속 혼란한 상황만 반복되고 있어요. 우리는 현장에서 이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죠.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어요.

 

임: 조금 다른 차원에서 학교에서 교사가 어떻게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요?

정: 치유적 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그때 비로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 시작돼요. 그런데 우리는 누가 어렵다는 얘기를 들으면 ‘이렇게 해 보면 어떻겠니’ 라고 조언을 하려고 하잖아요. 그게 아니면 ‘이건 네가 이래서 그런 것 같아’ 하고 분석, 판단, 평가하고요.
이런 말이 누구를 돕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에요. 이것을 멈춰야 해요.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은 특히나 그런 조언과 판단의 말을 소나기처럼 매일 들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 말들에 이미 질렸고 반발이 생기죠. 아이들이 문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뭐가 어려웠니, 마음이 어땠니’ 등의 이야기로 시작해야 해요. 그때부터 소통이 되기 시작하죠. 이런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 말하자면 치유이기도 하고 상담이기도 해요. 그런데 조언, 충고, 판단, 평가를 하기 시작하면 다 어그러져요. 소통의 문턱에도 못 가는 거죠.

 

임: 제대로 소통하려면 긴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아요. 당장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이는 계속 교실에서 힘들게 하고, 현재 교육 시스템에서 교사는 무능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어요. 천천히 잘하고 싶어도 학교가 너무 빠른 결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통제 잘해야 유능한 교사라고 평가받는 문화가 있어요. 이럴 때 교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지지받을 수 있을까요?

정: 선생님들에게 치유적인 경험이 있어야 해요.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누구한테 평가나 판단 받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여진 적 있는 사람은, 그것이 가진 힘이 크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에 함부로 칼을 들지 않아요. 칼을 드는 이유는 방법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 그게 확실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아요. 자기가 경험해본 사람이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임: 마지막으로 좋은교사운동의 교사들에게 조언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정: 조언 안한다고 했잖아요. (웃음)

 

임: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조언보다 당부 한 말씀 부탁드려요.

이: 치유이거나 육아이거나 교육이거나, 우리가 적용하는 법칙은 초지일관 같아요. 일종의 흑묘백묘(黑猫白猫) 정신이죠. ‘내가 무엇을 했네’ 라는 거품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금방 보이지 않겠지만 상대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고 공감해 주어야 합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에요. 아이에게 ‘계몽질’하고 ‘훈계질’한다면, 스스로의 인식이나 상식의 세계에서는 내가 부모로서, 교사로서, 어른으로서 무엇인가 한 것 같고 좋을 수 있겠죠. 그런데 아이에게는 아무 효과도 없어요.
교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내가 선생이니까 이렇게 했어, 남들 보기에도 번듯해, 나 스스로도 자부심이 생겨’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상대방에게 그런 행위가 어떻게 다가갔을까요? 이것을 계속 고민하고 회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웃’은 담당자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를 갖습니다. ‘이웃’이 이제 없어져야하는 것 아닌가,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사람들 기대도 생긴다는데 우리가 거기에 맞춰져 가는 것은 아닌가, 늘 원점에서 짚어보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웃’에 관해 얘기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유일하게 화를 내는 것이 ‘정혜신의 치유공간’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이웃’에서는 이웃치유자들이 정말로 중요해요. 정혜신 씨는 상담하는 일을 제일 잘해서 이곳에서 상담하고 있는 거예요. 관성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고 진짜로 그렇습니다. 이곳에선 정혜신 씨를 포함해서 모든 이웃치유자 분들이 진짜 ‘치유자’예요. ‘이웃’에 관해서 말할 때 정혜신, 이명수가 훌륭하게 일하고 있다는 식의 말들은 우리 둘에게도 이웃치유자에게도 결례라는 말을 꼭 하고 싶어요. 치유공간 ‘이웃’의 내부 방침은 ‘천천히, 오래’입니다. 그게 ‘이웃’이라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며 안산 세월호 분향소를 방문하였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실천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일상에서 이웃치유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돌아왔습니다. 두 분의 말씀을 들으며 오늘도 교실에서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아이들과 함께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는 선생님들이 ‘이웃치유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임이 아이들과 함께 하며 상처받은 선생님들을 판단하지 않고 온전하게 받아들여주는 따듯한 공동체가 되길 기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