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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책 특집 글

특집 3 기고 2 코르착에게 보내는 편지


특집 3 기고 2

 

코르착에게 보내는 편지

 

 

박준영

2011년 나는 당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의사면서 교사면서 작가셨습니다. 당신이 서 있던 교육 현장은 폭력과 거짓말과 싸움과 속임수와 게으름과 불신이 만연해 있는 아이들의 집단이었습니다. 제 초임 때 전문계 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어렵사리 임용 시험에 합격하여 이상을 품고 첫발을 내디딘 학교에서 저는 매일 울다시피 하며 다녔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당신도 나름대로 교육학적, 의학적 이론에 대한 전문성과 꿈을 가지고 노동자 아이들을 위한 여름 계절 학교에 봉사하러 갔는데 이상과 현실의 간극 가운데 처절하게 깨어지더군요. 참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런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당신은 끊임없이 관찰하며 글을 써 내려가더군요. 생활 지도서를 읽는 느낌이 들었어요. 학교에서 겪는 다양한 생활의 면면들에 대해서 구체적, 사실적으로 담담하게 또는 고민하며 풀어 가며, 때로는 물음으로, 때로는 성찰적인 깨달음으로 마무리를 짓더군요.

교사론을 이야기할 때 마음에 참 와 닿은 부분이 있었네요.

“만일 아이가 그렇게 태어나서 혹은 그가 한 경험대로 자라나서 지금 여기서 모종의 불량한 몸짓을 보인다 해도 교사는 마땅히 화를 내거나 불평을 늘어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것’이다. 아이가 비뚤어진 길을 걸어와서 그렇게 고독한 모습으로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 말이다. 화를 내지 말고 슬퍼하라. 복수가 아니라 연민의 정을 가지라는 말이다. 슬픔을 아는 사람은 적어도 당면한 교육의 현실을 적절한 의도와 노력을 통해서 정복하고 승리를 구가하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최선의 의도와 노력이 난파당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교사란 이러한 상황을 온몸으로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본다.”

잘해 준다고 애썼는데도 아이들의 거듭되는 잘못된 행동을 보면 힘들고 왜 이런 아이가 나에게 왔고,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지 힘이 다 빠집니다. 그러나 그런 아이를 긍휼의 마음으로, 슬픔의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참 중요한 인식입니다. 교사가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느냐에 따라 큰 차이를 가져올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보시는 마음, 그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네요.

 

“무능한 교사는 자신의 부주의로 인한 책임을 아이들에게 돌린다. 훌륭한 교사는 사소한 일들이라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속에 문제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작은 사소한 사건이라도 사소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해심 많은 교사는 한 아이를 이해할 수 없음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다시 생각해 보고 연구하고 아이들에게 물어본다. 아이들은 가르쳐 준다. 그가 배우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아이들은 교사를 가르치는 책이라지요. 아이들에게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받아야겠어요. 깨지는 아픔이 있다 해도요. 당신은 아이들에 대한 지극한 존중과 사랑, 아이 편에 서는 사람, 아이들 입장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사셨더군요. 진심은 아닌데 분주하다 보면 우리는 교사의 편의, 행정적 편의 등을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아이들 인권보다 교사의 인권이 앞서야 한다고, 교사가 행복해야 아이들이 행복하다고 약간은 합리화하며 살기도 하지요. 아이들의 한계, 악한 면마저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아이들의 변화를 일궈 내기 위해 일상의 면면에서 고군분투했던 삶이 위로가 되기도 하지요.

‘도’를 닦는 것이 필요하네요. 교사 중심으로 가다 보면 끊임없이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 속을 들여다보면 돌봄의 마음도 있지만 아이들을 믿지 못하는 마음도 있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을 믿어 보십시오’라고 말하시네요.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면 잔소리와 간섭이 줄어들 수밖에 없겠지요. 당신도 거듭 실패하면서도 아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았듯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지네요. 당신의 글을 보면 담담하게 때론 처절하게 당신의 치부들을 많이 드러내더군요. 잘된 모습도 있지만 괴롭고 힘들고 제대로 안된 모습마저도 있는 그대로 보며, 글로 쓸 줄 아는 그 관찰과 연구자의 마음, 겸손의 마음을 닮고 싶네요.

‘매 순간을 존중하세요! 지금 여기를 사세요!’라고 말하는 당신. 염려와 걱정 때문에 현재를 선물로 여기지 못하고 살 때가 많지요. 아이들이 변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지금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학급 운영이나 수업이 잘 안 되는 것은 아닐까? 등등 복잡한 생각들로 지금 여기를 아이들과 살지 못하네요. 내일 일은 내일 일이고 지금 여기를 충실하게 존중하면서 살고 싶네요. 아이들의 현재도 지극히 존중하며 사랑하며 살고 싶네요. 미래에 어떤 모습이 되어야 사랑한다는 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

요즘 교육 철학을 공부하며 아이들의 자발성에 대해 알아차리면서 아이들에게 물어보게 되네요. 학급의 사안이나 행사, 수업에 대한 이야기 등 아이들의 생각을 물으며 주체로 서게 하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이 2011년 저의 발전적 모습인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능력을 존중해 주고 아이들의 욕구와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아이들도 제가 아이들을 존중해 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듯합니다. 제가 철저하게 시나리오를 짜서 교육을 하던 것에 익숙한 터라 남의 옷을 입는 듯 낯설기도 하지만 아이들과 호흡하고 소통하기 위한 발걸음이라 보람도 있네요.

당신의 소리를 들으며 계속 묵상하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이들을 존중한다는 것, 그것은 진정으로 무엇일까? 추상적인 이론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실천이 따르는 사랑과 존중을 또 고민하며 한 달을 보냈습니다. 나름 제가 내린 결론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아이들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아이들을 대접하라’는 것이네요. 아이들에게 어른스런 행동을 요구하면서 저는 하고 있지 않은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있지 않은 거라는 잣대가 생긴 것입니다. 나의 한 행동, 말 한마디를 관찰하며 성찰해 보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한 행동,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여 더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합니다. 당신이 200명의 아이들과 가스실로 향했던 그 발걸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오르신 그 발걸음과 닮아 있네요. 그 발자국 따라 저도 가 보렵니다. 이번 당신과의 만남을 통해 당신의 ‘아이’로 한 수 배웠네요. 고맙습니다.

당신이 쓴 ‘한 교사가 드리는 기도문’을 선생님들께 선물로 드리며 마무리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