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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평택 아굴라와 브리스길라(2012.5)


평범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일상을 견디면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기독교사 부부. 이종갑, 조태늠 선생님의 이야기 속에는 작은 예수로서 일상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종갑, 조태늠 부부 이야기

평택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이규철 / 사진·김동휘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18:1-3)

 

좋은 만남의 새로운 방향성을 기독교사 부부로 설정하면서 애당초에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많은 어려움에 직면을 하게 되었다. 교사로 살기도 버거운 이 시대에 기독교사로 일상을 견뎌 내기란 더욱 힘든데, 이제는 기독교사 부부라고 방점을 찍어서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모두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의 눈으로 보지 않으시고, 숨겨진 보배들을 만나게 해주셨다. 평택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내려오는 순간이 기대와 설렘이었다. 누구일까 기독교사 부부의 삶을 어떻게 사셨을까 여러 가지 의문이 생겨나고 갈수록 궁금해졌다. 모두들 피하는 부부 인터뷰를 기쁨 마음으로 맞아주시는 이종갑, 조태늠 부부에 대한 상상력은 저녁놀과 함께 붉게 물들고 있었다. 오늘 진행된 인터뷰는 이 분들의 집에서 진행이 되었고, 팽택 기윤실 교사모임 선생님들이 둘러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이어나갔다. 지금부터 20년을 한결 같은 벗으로 살아온 이종갑, 조태늠 부부를 만나보러 간다. 그리고 이번호부터는 글로 전해지는 감동을 넘어서 실황중계를 좋은교사 홈페이지에서 맛볼 수 있다.

 

기독교사 부부로 살아가기

먼저 이분들에게 기독교사의 삶에 대하여 질문을 던져보았다. “기독교사란 선교사라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 오지를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선교지는 학교라는 생각을 합니다. 경쟁과 성적만 중요시 되는 세상 속에 아무도 기독교적이 삶을 가르치지 않는데 그 아이들에게 삶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기독교사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집안의 아이들이라고 해도 부모나, 아이들 모두 기독교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을 봅니다. 대부분 학교의 학생들이 그렇지요. 선생님도 그렇고 하니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배울 기회가 없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들을 기회도 없고요. 모든 아이들이 미전도 종족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기독교사의 삶은 가장 중요한 선교활동이고 기독교사는 가장 힘든 오지의 선교사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지역에 그런 일을 훌륭하게 해내는 선교사님이 여러분 있습니다. 수업 선교사 김재균, 장애우 선교사 황유정, 찬양 동아리 선교사 김복환, 배움 찬찬이 선교사 김동휘 등등. 그들을 보며 매일 배웁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쉽지만 어려운 것이었다. 어떤 선생님은 거룩함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부담스러운 부분이라고 말문을 여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독교사 부부란 단체 모임의 베이스캠프라고 정의를 내려주셨다. 이는 이분들이 2006년부터 평택 기윤실 모임을 위하여 집을 개방하였고, 모임은 그 후 더욱 튼실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다들 이야기를 하셨다. 현재 기독교 단체 모임들이 심한 감기(?)를 앓고 있으며 이것을 넘어서는 것은 이종갑, 조태늠 부부와 같은 지독한 헌신이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서 말을 하셨다. 과연 그렇다면 이 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기독교사 부부는 유정란 꾸러미다. 왜냐하면 한 꾸러미 안에 있는 유정란들이 건강한 병아리가 되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닭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기독교사가 한 가정에 살면서, 기독교적인 아이들을 길러내고 성장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독교사 부부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으면서, 타인을 섬기고 배려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초 공동체의 모습을 띠고 있어야 한다. 교사로 살아가기 힘들며 더욱이 부부 교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고통스러운 일일 수도 있는 이 시대에 살고 있다. 세속적인 평가로 본다면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연봉 1억의 부부교사라는 것이고, 대체로 총각 처녀 교사들의 로망이 부부교사인 것에 비춰본다면 기독교사 부부의 삶은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가치 지향적이며 유의미한 것이다. 다른 생명을 부화 시키는 꾸러미 역할은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동지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이들 부부만이 갖고 있는 삶의 철학이었다. 어린 시절 양계장을 했을 때 어머니가 달걀 꾸러미를 보여 주신 적이 있었다. 짚으로 만든 달걀 꾸러미 속의 달걀은 차가운 나의 손을 따뜻하게 해준 온기가 있는 마음의 선물이었다. 이 분들의 삶 역시 누군가의 차가워진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며, 위로를 해주는 온기가 되어 주리라! 마침 그 날 시골에서 가져온 유정란 삶은 계란을 꺼내 주시며, 맛나게 먹었다. 모락모락 사랑의 김을 피워 내면서

 

17년 반의 군생활을 마치고 학교로

공주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어차피 군복무를 해야 하니까 발령을 미루고 장교로 지원하였습니다. 처음 계획은 3년 의무 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생각지도 않은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군복무 중에 국립 사범대학 의무 발령에 관한 법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교육청에 문의를 하였더니 애매한 답변만 듣게 되었습니다. 교사의 길이 나의 길이 아닌가 보다 생각을 하던 차에 전우신문에서 우연히 육군항공 조종사 모집이라는 광고를 보고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습니다. 어렵게 조종사 훈련과정을 마치니 자연스레 장기 복무자가 되어 직업 군인이 되었습니다. 항공장교로서 본격적인 군 생활을 하게 되면서는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도한 곳이려니 하는 마음으로 생활했습니다. 대부분의 기간을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각종 부대업무와 비행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려 노력하였고, 부대교회에서 새벽예배, 주일학교, 성경공부 등 모든 것을 성실히 하자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군 생활을 하면서도 나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생각은 , 하나님 이게 아니잖아요?’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교대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에게서 학교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사범대를 나온 나도 언젠가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군 생활 10여년이 지나고 몇 단계의 진급을 하면서부터는 그런 생각도 점점 사라지고 군인으로서 나의 길을 가기에 바빴습니다. 힘들게 느껴졌던 주말부부 생활도 익숙해지고 군 생활도 오히려 편하다고 생각할 즈음에 하나님은 또 다른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퇴근길에 신문을 들고 왔습니다. 기사를 보여주며 학교에 갈 수 있는 길이 다시 열렸는데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 하나님 왜 이러세요?’ 이 길이다 싶으면 또 다른 길을 보여주시니 약간은 당황스러웠습니다. 예비역으로서 연금과 몇 가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20년을 얼마 두지 않은 절묘한 순간, 하나님은 기존의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가게 하였습니다. 결국 17년 반의 군 생활을 마치고 학교로 오게 된 것입니다. 200631일이었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한 기독교사대회

학교에 발령받아 처음 접하는 어려움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얘들아 조용히 해라고 하면 조용히 하는 줄 알았는데 조용하지 않더군요. 아침 조회시간에 전달사항 하나 전달하는 데도 한참 시간을 낭비하고, 수업시간에 하려던 내용은 절반도 하지 못하고 수업을 마치기가 일쑤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 맡은 학급에 대한 책임감, 교사의 사명감은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어줘도, 시간을 내서 놀아줘도, 좋은 글을 읽어줘도 아이들은 전혀 고맙거나 감동하지 않아보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학교로 보낸 이유가 이때를 위함이지하는 열정이 있었지만 아무도 만족해하지 않더군요. 학원을 빼먹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찾아냈을 때 어이없어하던 아이들, 밤에 학부모 전화를 받고 시내 PC방을 뒤져 귀가 시켰지만 아무도 훌륭한 교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보다 못한 옆의 선생님이 밤에는 애들 그냥 놔둬하고 훈수를 하더군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요즘 애들이 다 그런 것이라는 것을또 하나 어려운 것은 수업이었습니다.

아이들을 통제하거나 강의하는 것은 익숙한데 수업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밤이 늦도록 수업 준비를 하고 각종 자료를 제시하며 수업을 하고 나면 또 다음시간 준비해야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로부터 매일 수업코칭을 받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아내만큼 되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밭에 감춰진 보배라고 여기며 살았지만 그때는 아내가 더욱 위대해 보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아내가 충남에서 기독교사모임을 할 때 좋은교사 잡지 통해 알게 된 김재균 선생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렇게 만난 김재균 선생님은 정말 완벽한 교사의 조건을 갖춘 선생님이었습니다. 국어 수업에 대한 이야기, 아이들에 대한 사랑, 가진 것을 나누려는 자세, 기독교 가치관에 입각한 학생 지도 등등 배울 점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신선한 샘물이었습니다.

어려운 처음 학기를 마치고 여름 방학이 되었을 때 2006기독교사 대회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게 하였습니다. 신앙도, 열정도, 능력도 많은 선생님들이 그렇게 많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고 기독교사인 내가 해야 할 일을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 잘 되지는 않지만 협동학습을 위해 수업 구조를 바꾸고, 학급경영도 함께 하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담임을 하면 좋은교사운동의 지시(?)에 따라 편지도 쓰고, 가정방문도 하고, 남들이 기피하는 복학생을 받아 고생도 했습니다. 언제나 쉽지 않지만 좋은교사가 되고자 싫지 않은 마음으로 학생들을 만나려고 노력합니다.

 

주말 부부의 고충과 고마운 아내

처음부터 저는 교사가 아니었습니다. 국립사대를 나왔지만 군에서 오래 근무를 했습니다. 20년 가까운 군 생활을 하다 보니 주말 부부를 많이 했지요. 물론 이사를 여러 번 했습니다. 전국에 안 살아본 지역이 없고, 아이들도 초등학교를 네다섯 군데를 다녔으니까요. 주말 부부로서 주말마다 장거리 운전하는 일, 아이를 아내 혼자 키워야하는 일이 힘들었습니다. 아내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작은애를 아침에 아랫집에 아주머니께 맡기고 큰아이와 출근하여 저녁에 다시 데려오고 주말이면 아이들을 차에 싣고 장거리 운전을 하고 하는 일을 주말마다 해야 했습니다. 중간에 휴직한 기간도 있고 지역이 맞아 함께 사는 경우도 있었지만 7년 정도 주말 부부를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미안하고 아내에게 미안하고, 나이 들어 생각하니 정말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지금도 미안한 것은 저는 경북 영천에 근무를 했고, 아내는 홍성에서 직장 생활을 했기 때문에 유성 정도에서 하루 밤을 자곤 했지요. 주일 저녁이면 아내는 손수 운전을 해 가면서 다시 홍성 집으로 가곤했습니다. 당시 두 아이의 엄마였기 때문에 저녁 늦게 도착을 하면 한 아이를 들쳐 업고 빌라 4층으로 옮기고 다시 돌아와서 작은 아이를 업고 집에 들어가 잠을 자고 했지요. 그런데 그런 생활을 한 7년 동안 한 번도 짜증을 내거나 화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아내의 성품이 항상 긍정적인 면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짜증을 내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아내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요. 정말 고맙지요.”

그러다가 제대를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학교에 오게 되었는데 막상 학교에서 부부 교사로 생활하면서는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랜 기간의 주말 부부를 마친 것도 그렇지만 아이들도 웬만큼 크고 교회나 학교 모두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다지 어렵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삶을 나누는 것으로도 힘과 위로가 되는 지역모임

송탄, 평택지역이 함께 교회에서 모이다가 따로 모이면서부터 평택은 적절한 장소를 찾지 못하여 우리 가정에서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지역모임에 나가는 특별한 동기라면 기윤실 교사모임의 선생님들이 좋아서입니다.

김재균, 김복환, 김동휘, 황유정 등등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훌륭한 선생님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평택모임에서는 책 나누기, 수업 나누기,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학교 등등을 하였는데 매번 새롭고 실질적인 도움과 힘을 얻습니다. 특히 수업과 생활 지도 등 현장에서 좋은 교사 정신을 구현하도록 하는 지도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학교생활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이 됩니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거실의 산 같은 짐(?)을 치우느라 아내가 고생을 하기는 하지만 지역모임은 우리 부부에게 헌신해야할 곳이 바로 학교라는 것을 날마다 가르쳐 줍니다.

 

기독교사 부부로서의 비전

아내 조태늠 선생님께서 두분의 비전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저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는데,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요. 빚진 자로서의 삶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은 것이기 때문에 이 은혜를 나누면서 살고 싶어요. MK사역을 퇴직 후에 하고 싶어요. 그렇게 큰 것은 아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저희 부부의 소명인 것 같습니다. 저희는 큰 것 보다는 작고 소소한 것에 마음을 두고 싶습니다. 때론 빛나고 주목 받은 일을 하지 못함에 주눅이 약간 든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도 교회에서 외국인 이주민 사역을 하고 있어요. 몽골에서 온 사람을 돕고 있지요. 이주민 노동자 중에 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저는 이곳에서 한글을 가르쳐 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한 번은 어떤 젊은 부인의 아이들이 한글을 알고 싶어 해서 다짜고짜 함께 초등학교를 방문해서 교감 선생님을 만나 적이 있어요. 그 때 어떤 용기가 났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에게 글을 알고 싶어 하는 엄마의 애타는 사정을 이야기 했더니 긍정적인 답변을 해서 유치원에 입학을 시켰죠. 사실 도움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봅니다. 자세히 볼 때 그 분들의 필요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미혼 기독교사와 아직 신혼인 교사 부부들에게 하고 싶은 말

지금은 어렵고 힘들 수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교사로서 살아가는 삶도 버겁고 힘에 겹지요. 그러나 과거보다는 오늘이 더 좋다는 기대감과 설렘 속에 살았으면 합니다. 우리 부부는 항상 그렇게 살아 온 것 같습니다. 누구나 힘들었던 시기가 있을 수 있지요. 지금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일의 삶이 오늘 보다 좋다는 생각이 20년을 버텨 온 우리 부부의 사람의 철학이었습니다.”

우리 남편이 위대한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그리고 남들의 주목을 받지 않아도 저는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 만큼 우리 남편을 자랑스러워합니다. 20년을 나만 바라보고 저를 아껴 주고 지지해주는 남편이 있으니깐 행복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항상 내 옆에서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 거창하고 위대한 일보다는 소소하지만 늘 견디면서 살아가야 하는 일상의 삶 속에서 행복을 주고받는 부부로 우뚝 서려고 합니다.”

 

막장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질곡의 모습이 아니라 평범하지만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일상을 견디면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기독교사 부부. 이종갑 조태늠 선생님의 이야기 속에는 작은 예수로서 일상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