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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긍휼한 복의 통로와 공동체(2012.08)

하나님을 만난 후 교회에서 저와 같이 상처가 많은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는 상처 받은 아이들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 아이들을 보며 내 마음도 아팠습니다. 단순히 내 욕심으로 교사의 길을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말씀을 통해 가르치며 영혼을 고치는 의사와 같은 교사에 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화원초등학교 허 현 선생님

긍휼한 복의 통로와 공동체

 

 

 

글 / 사진·김중훈

 

 


 


 

‘하나님의 애절한 사랑’(롬 8:38-39). 대구에서 허 현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저에게 다가온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을‘긍휼한 아이, 긍휼함을 받은 아이’라고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알 수 있어 너무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허 현 선생님과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세요.


긍휼한 아이, 긍휼함을 받은 아이

저에게 주신 말씀은 긍휼한 복의 통로입니다. 긍휼은 영어로는 compassion으로 고난 또는 고통을 함께 당하거나 아픔을 같이 한다는 의미입니다. 복의 통로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의 열매를 맺게 하지요. 저의 삶의 여정 속에서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들을 증언함으로써 긍휼한 복의 통로를 만들어 가시는 주님을 자랑하고자 합니다.

저는 자전거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전거를 고치시기도 하시고, 팔기도 하셨습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 가게가 비교적 괜찮았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가정형편이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께서는 자전거 가게를 그만 두시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희 가정은 자주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한해에 두 번 학교를 전학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잦은 전학과 이사는 저의 성격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언제나 주눅이 들어있던 것 같고, 누군가 먼저 말을 걸기 전에는 먼저 말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정확하게는 7살 때부터인 것 같습니다. 아직도 여름 성경학교와 크리스마스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다윗, 요셉 등의 재미있는 성경의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이사와 전학 때문에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계속하지는 못했습니다. 본격적인 신앙생활은 고등학교를 졸업 이후입

니다. 특별히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학력고사나 학교시험 관계없이 주요 교과는 20점이나 30점 정도 이었습니다. 가정형편도 어려워서 저는 대학을 진학하기 보다는 직업훈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직업훈련원에서 조리사가 되는 과정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저는 뷔페식당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고 군복무 시절에도 취사병으로 일했습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좀 더 안정적이고 좋은 조건인 대학교 식당에서 근무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직업을 갖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연희교회 청년부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1994년 청년부 겨울수련회입니다. 수련회 마지막 날 저녁 10시부터 새벽6시 까지 정말 긴 시간동안 기도회가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목사님과 사모님께서는 반드시 이곳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영접하고 만나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힘든 수련회였습니다.

사모님께서는 우리는 우리의 앞날을 절대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언제 우리를 데려가실지 모른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앞에서 달리고 있던 트럭에서 물건이도로에 떨어지면서 저희 교회 버스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간신히 피하면서 사고는 없었지만 이사건은 저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모님 말씀처럼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고, 당장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련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저는 혼자 성경책을 읽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큰 변화가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감격적이었습니다.


어떻게 교사의 길을 다시 걷게 되셨나요?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저와 같이 상처받은 아이들이 점점 저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어려운 가정 형편과 아버지에 대한 아픔과 상처, 그리고 저희를 위해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가득합니다. 가정으로부터 상처받은 아이들, 한 부모 가정 등에서 자란 아이들의 마음이 공감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등부 교사로 주일학교에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저의 성적표에 기록되어 있는 장래 희망은 언제나 ‘선생님’이었습니다. 나의 장래희망으로 되는‘교사’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교사가 되어야 겠다고 결심하면서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사회적으로 요리사라는 직업이 점점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요리사라는 직업을 매력적인면도 있었지만 저는 요리사라는 직업은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상처 받은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중등부 교사를 하며 교회를 다니지만 상처가 많은 아이들을 보게 되었고 그런 아이들이 학교에는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 아이들을 보며 내 마음도 아팠지만, 단순히 내 욕심으로 교사의 길을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 말씀으로 주셨던 것이 마태복음 9장 35절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가르치며 약한 것을 고치는 것에 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교대 99학번 동기였던 주님을 알던 여학생이 점심시간에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이 교대를 오게 된 것은‘영혼을 고치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는데 제게 주셨던 말씀과 열정이 일치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중등부 전도사님께서 단순한 사역자가 아닌 아이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품는 것을 보고는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주변에서 학력고사 세대가 수능을 보게 되니 어렵지 않느냐고 걱정스럽게 물어보곤 했는데, 주님께서 주신 소망 때문에 저는 정말 재미있게 공부했습니다. 학원에는 한 달에 한 번 모의고사 칠 때만 갔고, EBS 교재와 방송만으로 공부했습니다. 수능을 보기 전에 한 가지 마음이 아팠던 것이 다른 사람들은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때는 어머니께서 믿음을 가지신지 얼마 되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수능을 보기 바로 전 주일에 교회 동기들이 모여서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었습니다. 정말 저보다 저를 더 잘 아시고 긍휼히 여겨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너무 아프지만 어려움의 과정이 꼭 필요했던 것 같아요

교대에 합격하고 나서는 탄탄대로만 열리고 잘 되는 일만 남은 줄 알았습니다. 또한 등록금도 교회에서 주는 장학금도 받았고, 지도 교수님의 소개로 받게 된 장학금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임용고사에 낙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원망과 불만을 새벽 기도회에 나가서 많이 토로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특별한 소명의식이 없어 보이는 친구들은 다 합격하는데 저는 왜 입니까?”더구나 1차에서는 2~3점 커트라인 보다 높았는데, 2차 시험에서 떨어지니 더욱 고통이 컸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꼭 필요했음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저도 사랑하시지만, 저를 통해 만나게 될 아이들을 더 사랑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의 통로가 되어야하는데 저주의 통로가 되지 않도록 저의 모난 부분을 다듬으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지난해 EBS의“우리 선생님이 달라졌어요”에 참여하며 다시 한 번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보다 더 아파하시며 저를 다듬으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계속 떨어지다 보니 임용고사 교재나 임용고사 준비 학원비를 카드로 긁게 되고 카드빚이 커졌습니다. 결국은 부모님도 아시게 되었는데, 아버지께서 갚아주시는 뜻밖의 경험을 했습니다. 먼저 어머니께서 협심증을 앓고 계신데 어느 주일 전날 저의 카드빚을 아시고 숨을 못 쉬실 정도로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합니다.

그때는 그냥 지나갔는데, 다음날 주일 청년부 예배를 드리며 찬양을 통해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당하신 그 아픔이 다가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죄수들과 달리 빠른 시간에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셨던 이유가 심장 파열 때문이라고 하는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아픔을 생생하게 경험하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으로 저를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되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아버지께서도 아시게 되고 다 갚아 주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신다(막 6:34)는 원어의 의미가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라고 하는데 아버지께서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마약성 진통제를 맞으면서 고통스러워하셨던 것을 보면서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본토 친척을 떠나 부르신 곳에서 교사가 되다

마침내 제가 태어나고, 가족과 친척이 있고, 모든 학교를 나왔던 서울을 떠나 인천으로 시험을 보게 됩니다. 전혀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지역입니다. 합격하던 2005년에는 요한계시록 부분을 읽으면서 알게 해주셨습니다. 제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난이 이제 끝이나고, 임용고사에 합격하게 해 주신다는 말씀으로 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에도 역시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이 저보다 더 많이 임용고사의 합격을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당시 교회에서가는 탄자니아 선교지 방문과 비전 트립을 준비할 때라 저는 제 당면 문제인 임용고사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또 기도도 비전 트립과 당시 저희 교회의 아픔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합격했을 때 감격해서 교회 동생들이 함께 울어주었습니다. 이런 일에다가 새벽 기도회에서 주신 말씀인 창세기 12장 3절의 말씀과 2006 기독교사대회에 참여하여 은혜를 받았고 2학기 9월1일자로 학교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보다 오히려“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자랑이 컸지요. 한동안은 발령받고 맡게 된 2학년 아이들도“선생님은 웃는 모습이 좋아요”라고 하면서 잘 따라주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기독교사단체인 TCF는 어떻게 활동하게 되셨나요?

점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저의 메마름과 무감각함 그리고 아이들과 사소하게 자주 부딪치는 문제를 경험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2007년 겨울에 기독교사대회에서 알게 된 TCF 수련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4학년을 가르치면서 제가 감당하기 힘든 너무 많은 아픔을 학교에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인천 TCF 모임에 나갔습니다. 이 모임에서 함께 아픔도 나누고 기도하며 새로운 힘을얻을수있었습니다.‘ 제자사랑 큰잔치’나 수련회 준비도 하

며 같이 울고 웃으며 나만 아프고 힘든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에 더 열심히 나가게 된 것 같습니다. TCF를 통해서는 보다 넓은 시야도 갖게 되었습니다. MK 학습캠프를하며 선교사 자녀들의 상처도 알게 되었고, 그 아이들에게도 복의 통로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2008년이면 4년이 지난 사진입니다. 그 사진을 정리하며 그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데 또 울컥합니다. 또 학습 캠프 중 저녁에 선생님들과 가진 나눔의 시간은 부흥회였습니다. 선생님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집단 상담이기도 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공개 구혼(?)을 통해 아내를 만나다

돕는 배필을 만나게 된 것도 TCF 안에 있는 자매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중매(?)를 서주셨지요. 처음이자 현재까지 마지막이었던 2008년 제1회 전국리더수련회에서 마지막 날 저녁에 제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셨던 같은 방 선생님들이 다음날 공개 구혼 이벤트를 열어주셨지요. 제

성격상 그런 것 별로 좋아하지 않고 강권해도 나가지 않았었는데, 그때는 저도 유일하게 그 이벤트에 참여했습니다. ‘요리상자’로 저를 소개해주셨습니다. 유리상자를 패러디해서 TCF의 드림팀 재주꾼 선생님들이 만들어주신 이벤트 였습니다. 저는 전혀 만남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전화번호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때는 제 아내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만약 그때 이벤트를 보았다면 자기의 성격상 만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5월에 전국리더모임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점심식사 때 한 선생님께서 만나는 사람 있냐고 물어보셔서 없다고 하고 저는 그냥 지나갔는데, 마침 그 선생님과 함께있던 아내가 무슨 이야기냐고 물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 선생님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고 그때는 마음에 끌린다거나 그러지 않았고, 아내도 그냥 집에 갔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가서는 계속 그 일이 떠오르게 되어서 기도도 하고, 제게 처형과 형님이 되시는 분들에게 의논도 하고 TCF홈페이지에 제가 쓴 글도 확인하고, 제 주위에 저를 알 만한 사람들에게 조사(?)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후에 당시 TCF 인천대표와 구미대표 선생님을 통해서 첫 만남을 하고 이후 4개월 만에 극적으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제게 주신 주님의 기도제목은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볼 수 있는 자매였고, 에스더 말씀(2:9, 15, 17)을 통해서 저를 매력적으로 보게 될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셨지요. 정말 이 말씀들처럼 이루어주셨습니다.


축복의 통로와 공동체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에 주신 아가인‘기쁨’(태명)이 또한 여러 공동체의 기도의 응답이기도 합니다. 아내는 결혼한 지 4년이 가까이 되도록 아이가 없다는 것 때문에 특히 많이 아파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올해 4월 중순에 주일 설교 말씀(창 18:10-15) 을 통해서 저와 아내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아이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5월에 임신한 것을확인할수있었습니다.‘ 기쁨’이라고태명을지은이유는느헤미야8장10절말씀과 하나님과 사람에게 기쁨을 받고, 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아이가 되길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올해 송구영신 예배의 말씀이 발령받기 바로 전에 주신 복의 통로에 대한 말씀입니다(창 12:1-3). 비록 저는 함께 아픔을 계속 겪을 수도 있지만 저를 통해서 가족, 맡겨주신 학생들, 기쁨이, 동료 선생님, 학부모, MK 등이 긍휼함을 받게 되고 또 긍휼함을 나누어주는 복의 통로와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저도 복의 통로로 공동체 안에서 주님께서 빚어 가시기를 기쁘게 소망하고 있습니다. 비록 여전히 공립학교 교사로서 업무 때문에 아이들과 소통이나 복음전도에 어려움이 있지만 이제는 아파만 하지 않습니다. 긍휼히 여겨주시는 주님과 공동체가 있기에 능히 함께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고 또 그렇게 주님께서 인도하심을 저의 삶 속에서 체험을 통해 확인했기에 주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