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적 정의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또한 이렇게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평화가 이 땅에 임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무너진 우리 학교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것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박숙영 선생님
다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평화
글 / 사진·김중훈
회복적 정의와 비폭력대화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고 또한 그렇게 살아온 것도 아니라서 다소간 생소할 뿐만 아니라 학교 현장에서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박숙영 선생님을 만나면서 오늘날 학교 현장에 꼭 필요한 것이 관계 회복과 하나님의 평화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박숙영 선생님을 통해 ‘하나님의 샬롬’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편안하고 밝은 미소가 참 좋아 보입니다.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선생님께서 성장하신 가정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은 저는 언제나 부모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아이였습니다. 특별히 저는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오빠와 언니의 학원비, 피아노 레슨, 스카우트 활동비 등의 필요한 비용을 걱정하시면서 언제나 저의 차례가 되면 주저 주저하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필요하지 않다고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커서는 상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도 너무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저는 어머니의 돕고 싶은 마음이 더 켰고 또한 그로 인해 어머니로 부터 칭찬을 듣는 것이 저에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착하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많이 듣곤 했습니다. 하시만 사실은 굉장히 철이 없는 편입니다. 그 누구보다 저희 남편이 잘 알고 있습니다.(웃음)
신앙생활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은 누구셨나요?
저희 가정에서는 어머니께서 처음 신앙을 가지시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결혼하기 전부터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결혼 하신 후에는 신앙 때문에 핍박도 많이 받으셨어요. 저희 할머니로부터 야단도 많이 듣고, 언젠가는 할머니께서 성경책을 아궁이 넣어 태우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믿음의 어머니 덕에 저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출석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교회에서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습니다. 특히 중고등부 시절에는 ‘문학의 밤’과 같은 행사를 통해 친구들과 함께 계획하고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참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신앙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과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고민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당시 5공화국 전두환 정권시절이었고, 제가 다니던 교회가 한국기독교 장로회 소속이었습니다. 선배들은 한국신학대학교을 많이 진학했었습니다. 그 선배들을 통해 당시로는 믿을 수 없는 정말 충격적이고 무서운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투쟁에 대한 이야기, 운동권 노래 등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상당히 혼란스러웠고, 또한 세상이 참 무섭게 다가 왔습니다. 대학 진학을 고민하면서 처음에는 국문학과를 가기를 원했는데 학교와 집안의 권유 그리고 성적 등을 고려하여 공주사범대학을 선택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시대적으로 어려운 시대에 대학생활을 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대학생활을 어떠셨나요?
어느 날 고등학교 때 제가 아주 좋아했던 선생님께서 제가 공주사범대학을 진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쿠사’라는 동아리를 꼭 선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에서 그 동아리에 가입했습니다. 알고 보니 소위 말하는 운동권 동아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동아리가 어떤 부분에서는 이해는 되었지만 정서적으로는 저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저의 대학생 생활은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원해서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가 신앙을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대학교 4년 동안 저는 신앙생활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4년 동안 방황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 함께 공부했던 황혜옥, 한민아 라는 친구가 저에게는 참 위로가 되었습니다.
대학교 4학년 시절은 정말로 캄캄했었습니다. 교사 임용에 대한 제도가 바뀌면서 저희도 임용고사를 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임용고사를 준비하기 위해 교육학 학원에 가기로 했습니다. 주로 그 학원에서는 이해보다는 쇼맨십이 강한 강사가 교육학 내용을 빨리 잘 기억하는 방법을 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강의 중에 자꾸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열심히 필기를 하다가 갑자기 멈추고 ‘저 분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할까?’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의 중에 그 강사와 저는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고 “강의 마친 후에 남아주세요” 잠깐 남아서 얘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그 분이 왜 저를 부르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직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다시 강의 후에 나에게 다가와서 잠깐 만 얘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강사 대기실로 함께 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 강사는 저에게 “예수님을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그 자리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사실 그 이야기는 저에게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교회에서 쉽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찾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곤고한 저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그 후 그 분은 강의를 마친 후 함께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찬양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날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날마다 울었습니다.
하나님께 저의 마음을 진실하게 고백했습니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저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암흑의 시대가 끝이 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너무나 커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쓰임 받는 교사가 되고 싶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한국협동학습연구회에서 기독교사운동가로 성장했습니다
그 후 저의 첫 근무지는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원일중학교였습니다. 학교에 발령이 나기 전에 저는 연약한 제 자신을 바라보면서 동역자를 붙여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정말 신실하게 응답하셨습니다. 저는 믿음의 동역자인 한태실 선생님, 박신자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방과 후에 아이들과 함께 예배도 드렸고 아이들을 위해 함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MT도 가고 재미있는 이벤트를 많이 계획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뜻을 같이하는 선생님들이 늘어나면서 5명의 선생님들과 5학급 이렇게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함께 꿈꾸며 열심히 살았던 것 같습니다.
1997년 본오중학교에서 공은주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선생님과 저는 신앙적인 것뿐만 아니라 같은 도덕과목이 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도덕수업을 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고 수업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1년 동안 나누었습니다. 도덕과목은 다른 과목과 달리 이해를 해야 하거나, 암기해야 할 것이 많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왜, 질서를 지켜야 하는지’ 등과 같은 것을 깨닫게 하는 지극히 당연한 것을 가르치는 과목입니다. 따라서 가르치는 방법이 매우 중요한 과목입니다. 하지만 그다음 해에 공은주 선생님께서 다른 학교로 옮기면서 더 이상 협력수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 우리는 수업에 대한 서로의 필요가 있어서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수업에 대한 관심이 있는 안산에 있는 도덕과 선생님 7명이 모였습니다. 우리는 매주 1회 수업에 대해 고민하고, 여러 가지 책들을 읽고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공은주 선생님께서 우연히 김현섭 선생님의 협동학습 강의를 듣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김현섭 선생님이 마치 가르치는 스타일을 보니 주일학교 교사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공은주 선생님과 저는 그 해 겨울협동학습 연수에 참여하게 되었고, 안산지역 도덕과 선생님과 함께 1년 프로젝트로 협동학습연구회와 함께 《함께 하는 도덕수업 중2》이라는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협동학습에서 《신나는 도덕수업 중1, 중2》 교재를 만드는 것에 참여하면서 저는 서서히 기독교사운동가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완전히 무너짐을 경험했습니다
좋은교사운동과 협동학습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저는 가정방문, 학부모 편지쓰기 정직 캠페인, 신우회 활동 등에 아주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동료교사 후배교사, 학부모님들로부터 인정받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교장 선생님도 감동할 만큼 해마다 아주 성공적으로 학급을 운영했습니다. 저의 성장한 모습에 기분도 좋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인정받는 것을 통해 조금은 우쭐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축복을 주셔서 아이들과 행복한 추억을 많이 주셨습니다. 나름대로는 학급운영에 노하우가 있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러한 저의 방법이 조금씩 통하지 않는 것을 서서히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1년, 2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겸손히 기도로 더 준비하고, 더 열심히 학급을 운영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시작했습니다.
2007년으로 기억합니다. 그동안 교사로서 쌓아놓은 저의 모습과 명성이 명호(가명)라는 학생을 통해 무너짐을 경험했습니다. 학교에서도 동료교사로 부터도 조금은 특별한 교사로 인정받았습니다. 저의 학급의 아이들도 그런 영향을 받아서 저를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 학급운영에서 ‘지각을 하지 않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학생들에게 강조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잘 따라 주었습니다. 그런데 명호가 어느 날 5분 지각을 했습니다. 그 다음 날에는 10분 지각을 하고, 다음 날에는 의도적으로 20분을 지각했습니다. 저는 규칙대로 벌도 주고, 야단도 치고, 상담도 했지만 명호의 태도는 변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버릇없는 태도와 욕이 섞인 말을 저에게 퍼부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 학생도 점점 저를 따르지 않고 명호와 같은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학급질서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힘이 강한 학생이 약한 학생들을 괴롭히는 일이 벌어지기 까지 했습니다.
저는 이러다가 학급이 완전히 무너지겠다고 걱정하면서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명호와 힘겨운 신경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에는 저의 말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복도로 나가버리는 명호를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렸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복도에서 저와 명호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내가 왜, 이렇게 많은 학생들 앞에서 이런 낭패를 자초하고 있는가?’ 그리고 ‘명호가 서지 않고 나를 무시하고 그냥가면 어떻게 할까?’ 순간순간 저는 이미 무너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날 다행이도 명호는 다시 돌아왔고, 교무실에서 상담을 했습니다만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학기 초라서 업무가 많고 힘들었지만 퇴근 후에 가정방문했습니다. 그 와중에 학교에서는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수학여행 기간 동안 아이들을 관리하느라 거의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이후 어느 날 학교에서 저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병원에서 A형 간염이 발견되었고, 간수치가 너무 높아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높은 간수치가 나오는 것은 처음 보았다고 놀랐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저의 상태를 보고 병가를 강력하게 권고했습니다. 저는 고민했습니다. 학급담임으로서의 책임과 양심 그리고 학생들을 생각할 때 그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남편과 의사의 강력한 설득으로 저는 병가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명호로 인해 땅을 치고 울었습니다.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내가 참 무능력하구나!’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올해 교육실천위원장을 하시면 비폭력대화와 회복적 생활교육을 위해 노력하시고 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저는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비폭력대화’를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고, 한국비폭력센터에서 하고 있는 연수에 참여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과도 나눔을 약 2년을 하고, 협동학습연구회에서도 계속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몇몇 선생님께서 대화 방법만 바꾸었는데 가정이 바뀌고, 학교 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수업에도 적용했는데 학생들의 반응도 무척 좋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비폭력대화는 의사소통 방법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완전하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평화라는 가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정병오 선생님을 만났는데 평화에 대하여 배우고 싶다고 얘기 했더니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를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고민 고민하다가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 홈페이지에 있는 연수를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1분도 되지 않아 센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렇게 저는 ‘회복적 정의’라는 것을 알게 되고, 연수에 참여하면서 이재영, 서정기 간사님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그분들의 모습은 참 감동이었습니다. 평화를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삶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마음에 다가 왔습니다. ‘내가 그토록 찾던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비폭력대화의 목적이 평화적인 삶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재판관 보다는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평케 하는 자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비폭력대화 만나면서 저는 싸우던 아이들을 비폭력대화를 통해 서로의 진실한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 울고, 화해하고, 아이들은 안전하고 평화롭게 학급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학교 현장에서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회복적 정의를 처음 만났을 때 이것이 학교에서 적용 가능할 뿐만 아니라 비폭력 대회를 해야 하는 이유라는 것을 또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너무 감사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회복적 정의’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또한 우리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하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평화가 임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무너진 관계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것을 너무나 원하고 계십니다.
학교 현장에서도 학생들의 훈육방식이 예전에 제가 했던 것 같이 권위적이고 응보적 접근방법 만으로는 근본적으로 무너진 서로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실한 소통도 이루어 질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사의 역할이 학생들 사이에서 잘못과 시비를 가리는 ‘재판관’이나 ‘경찰관’의 역할 보다 무너진 관계를 조정하고, 회복시키는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회복적 생활교육’과 ‘비폭력대화’와 같은 것은 우리가 살아보지 않았고, 또한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학생들이 더 버릇없어지고, 더 망가지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걱정을 많이 하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신뢰하고 공동체적으로 함께 그 길을 걸어갔으면 합니다. 특별히 오늘날 학교 현장에서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의 역할이 우리 기독교사들의 부르심의 이유가 아닐까?’생각합니다.
나는 오늘 박숙영 선생님의 아픈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무너진 교실을 회복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었다. 그를 통해 회복시켜 나가실 우리나라 교육계를 바라보고 기대해본다. 나 역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회복의 능력이 나의 삶과 우리 학교에서 일어나길 또한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 그 어느 때보다 우리 학교에 하나님의 평화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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