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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만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학교에 대한 소망(2012.11)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경험했던 아픔을 잊을 수 없어요. 그때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새로운 학교'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는 아이들이 회복되고, 성장이 일어나는 학교가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소명중고등학교 김영생 선생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학교에 대한 소망

 

 

 

/ 사진·김중훈

 

 

 

오랜 만에 가을을 느끼면서 탄탄한 실력을 갖춘 기독교사들이 많이 있다는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소명중고등학교의 김영생 선생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고즈넉한 가을 풍경과는 달리 김영생 선생님은 학교 안에서는 아주 바쁘게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마침 그날은 EBS 프로그램인 우리 선생님이 달라졌어요에서 협동학습 수업을 촬영하기 위해 방문하는 날이었습니다. 오전에 간신히 틈을 내어 치열한 삶의 현장, 그 한가운데 계신 김영생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성경은 이야기 줄거리를 갖춘 한편의 드라마(drama)이다라는 말과 같이 평소 몇몇 협동학습연구회 선생님으로부터 김영생 선생님의 삶이야말로 한편의 드라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김영생 선생님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에서부터 기독교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성장과정을 좀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영화 집으로의 배경이 되었던 충청북도 영동에서 자랐습니다. 지리적으로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경상도가 함께 만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전라도 사람을 만나면 전라도 사투리, 경상도 사람을 만나면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곤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영동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저는 위로 누나가 넷 그리고 제가 막내이자 아들이었습니다. 저의 부모님께서는 어릴 시절부터 제가 목회자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저의 이름을 영생(永生)’이라고 지은 것도 어린 시절 부터 목회자가 되길 바라는 부모님의 무언(無言)의 압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강요하거나 드러내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실지 기다리고 지켜보자!” 이렇게 생각하셨어요.

 

부모님께서는 목회자가 되기를 바라셨는데, 교사가 되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누나들과 함께 청주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나들에게 참 고마워요. 저를 위해 매일 도시락 2개를 싸주셨거든요. 고등학교 내내 저의 생활기록부에 장래희망은 목회자로 기록되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저는 선교사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목회자 자녀의 특성상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가끔 아버지께서는 설교 중에 선교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심한 고난을 당하고 때로는 죽음에 직면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나도 저렇게 하나님의 직접적인 은혜를 경험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고 언제나 동경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께는 곧 바로 신학대학을 갈 생각을 하지마라고 하시면서 훌륭한 목회자가 되려면 성도들의 삶을 깊이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생활 경험이 꼭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대학을 먼저 진학하고 그 후에 신학대학원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저에게 충고를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충고에 그럼 어떻게 하지고민하면서 저는 일단 훌륭한 목회자의 자질을 잦추기 위해서는 잘 가르치는 방법 잘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신학대학원에 가려면 영어시험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듣고 영어교육과에 진학해야겠다고 조심스럽게 진로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저런 분들과 함께 대학생활을 하고 싶다

청주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하면서 H.C.C.C를 게 되었습니다. 당시 금요 채플에서는 고등학생뿐만 아니라 대학생들도 참여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한국교원대학교 C.C.C에서 활동하셨던 홍승주 간사님, 이성길 순장님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신앙과 삶의 모습이 너무 보기가 좋았습니다. 그 시절 저는 나도 저런 분들과 함께 대학생활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추억 중에 하나는 한국교원대학교 캠퍼스에서 복음성가축제가 열리던 늦가을 밤이었습니다. 평소 그 대학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당시 청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누나와 함께 교원대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아름답고 조용한 캠퍼스의 풍경이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담긴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교원대학교를 진학하기로 마음속으로 결심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저의 신앙적 가치와 학교에서 요구하는 가치가 충돌하는 아픈 경험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H.C.C.C 활동을 하면서 풍성한 은혜와 진로를 탐색할 좋은 기회도 있었지만 신앙적 가치와 학교에서 요구하는 가치가 충돌하는 아픈 경험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건이 지금까지 저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성경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작은 삶의 조각 하나 하나가 우연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 제가 공부한 학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도 주일에 학교에 나가서 자율학습을 의무적으로 실시했습니다. 저는 주일에는 고향인 영동에 내려가서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신앙 가치와 학교의 방침에 계속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직접적으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구체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저에게 너도 이제는 네 스스로 신앙적 결단을 해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긴 고민 끝에 다니엘서 말씀을 읽으면서 주일에는 공부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린다.”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로 저는 학교에서 계속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꾸중으로 듣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 밖에서와는 달리 우울한 학교생활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전국체전이 청주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전국체전 개막전을 대비하여 청주의 몇몇 고등학교에서는 단체 매스게임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학교는 태권도를 맡았었는데 월요일이 개막전이기 때문에 주일날 총예행연습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참여하기 힘들다고 조심스럽게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급한 상황을 대비해서 항상 몇 명의 대리학생들이 있었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주일 아침에 잠깐 예배를 드리고 예행연습에 참여하면 되지 않느냐?”고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고향에 내려가서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의 얘기를 듣고 선생님께서는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나도 교회 집사야!” 하면서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저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때리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그리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를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학교에 대한 소망이 그 때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목회자가 아닌 모든 영역 곳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해 나가는 선교사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그토록 바라던 한국교원대학교를 입학했고 대학생활을 선교단체인 C.C.C와 함께 했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여러 사람과 교제하면서 4년 동안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과 그 풍성함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 중에 저에게 큰 전환점이 된 것이 몽산포에서 있었던 C.C.C 여름수련회였습니다. 당시 이동원 목사님께서는 집회시간에 그리스도인 모두가 목회자의 삶을 꿈꾸면 어떻게 하느냐?”, “정말 필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나라 모든 영역 곳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해 나가는 선교사적인 삶을 살아가는 평신도가 정말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저에게 강하게 다가 왔습니다. 이후 저는 교사로서 학교 현장에서 선교사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하면서 기독교사라는 삶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범대학교 학생과 같이 교사가 되기 위해 저도 임용고사를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주일에 시험이 있어 약간의 부담도 있었지만, 바라던 기독교사의 삶과 부르심을 생각하면서 시험에 응시했지만 결과는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할 즈음하여 함께 C.C.C 활동을 하던 선배 순장님이 중에 한분이 청주에서 공군 장교로 군복무를 하면서 저녁에는 퇴근하여 후배들을 이끌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공군 장교를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사관후보생 훈련 중에 공군기술학교에 교사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훈련과정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군번을 순위를 정하는 기준)도 잘 나왔기 때문에 기술학교 교관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술학교 교관도 그리고 최소한 바라던 보직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면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공포대에 배치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양한 근무지를 경험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귀중한 것을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께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교사로 부르셨다면 제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를 넘어 저를 분명히 교사로 부르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20007월에 전역을 하고 다시 임용고사를 준비하기 위해 고시학원이 있는 노량진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엘서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고등학교 때와 같이 다시 결단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임용고사 가산점을 위한 토익시험도 모두 주일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도피였다고 볼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임용고사를 그만두기로 결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교사로 부르셨다면 이러한 문제를 다 넘어서 분명히 저의 진로를 열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친구들도 무척 당황해 했습니다. 이후 저는 고민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했습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저는 학과 조교로 근무했습니다. 대학교 조교라는 위치는 공부를 하면서 다양한 진로를 모색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기독교대안학교연맹을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교제하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학교인 기독교 대안학교로 저를 부르실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기독교학교에 대한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우연히 기독교대안학교 연맹 홈페이지에서 세인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학교에 전화를 했습니다. 어떤 선생님께서 사투리가 섞인 어투로 우리는 월급이 없고 다만 한 달에 30만원 밖에 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기독교학교입니다. 저희는 영어교사가 필요합니다. 생각해봐 주세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도전적인 한 마디가 저에게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인고등학교를 지원했습니다. 세인고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었지만 기독교 대안학교와 기독교사의 삶에 실제적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 대안학교에 대한 꿈을 키워가게 되었습니다. 1년 동안 세인고등학교에서 근무한 후 저는 다시 대학원을 마치기 위해 대학교로 돌아왔습니다. 대학원을 마치면서 여전히 저의 마음은 기독교학교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임용고사를 통해 공립학교 교사가 되기 보다는 미션스쿨에 근무하는 것도 귀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연히 서울에 있는 영락여상에서 교사를 모집한다는 공지를 보고 지원했습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인도로 영락여상에 합격했습니다. 영락여상에 근무하면서 어느 날 우연히 버스를 타고 가다가 좋은교사운동이라는 반가운 간판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너무 반가워서 그날 퇴근 후 바로 사무실로 찾아갔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저는 수시로 사무실로 찾아가서 선생님들과 교제 했습니다.

 

좋은교사운동과 협동학습연구회를 만났어요

그 당시 좋은교사운동 사무실에서는 저녁에 협동학습 세미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저도 협동학습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협동학습연구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규교사로 영락여상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학생들은 영어수업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나름대로 신나고 즐거운 수업이 되기 바라면서 협동학습 세미나에서 배운 것을 매일 적용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학생들로부터 괜히 귀찮게 한다고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학생들과 만나면서 저는 학생들 중에는 가정이 무너지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친구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는 아이들이 신규교사였던 저에게도 상처를 주기도하고, 저를 아프게도 했습니다.

협동학습연구회에서 꾸준히 활동하면서 저의 수업도 점점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귀찮다는 처음 학생들의 반응과는 달리 은근히 학생들은 저의 수업을 기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선생님, 다음에는 어떤 수업을 할 거예요?” 라고 기대하며 물어보는 학생들도 많아졌습니다. 점점 저는 학교에 적응하면서 성장했고 수업에서 많은 기쁨을 누렸습니다. 협동학습연구회에서 더 활발히 활동하면서 기독교사로서 풍성함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새로운 학교인 기독교 대안학교로 저를 부르실 수 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저를 기독교대안학교로 부르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언제나 하고 있었습니다. 막연한 저의 예상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좀 더 빨리 기독교 대안학교인 샘물중학교로 부르셨습니다. 약간의 주저함도 있었지만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생각하고 기독교 대안학교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사립학교 교사의 신분도 상당히 안정되어있는 직장이었습니다. 퇴직 후 연금도 보장되고요. 지금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샘물중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과 함께 소명중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지만 저는 그 때의 결정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학교를 함께 꿈꾸고, 함께 이루어가는 삶이 참 즐겁고 좋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기독교사 공동체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저는 학교가 아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하고,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는 아이들이 회복되고, 누구나 배움의 기쁨을 누림을 통해 성장이 일어나는 학교가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가지고 정치, 경제, 교육, 법조, 연예, 목회, 과학 등의 각 영역에서 그 곳의 아픔을 회복시키고, 그 곳의 필요한 부분을 섬기며,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그 땅을 기경하고 개혁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장하고, 활동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저의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