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들은 아이들을 섬긴다는 마음으로 교직에 임하기 때문에 다른 교사들보다도 더 많은 피로를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으실 거라 생각해요. 무엇 보다 지금 자신을 어렵게 하는 것을 견뎌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피로감이 극에 이를 때마다 모든 것을 싹 씻어나갈 정도의 큰 은혜를 주셨어요.
안산 신길초등학교 박종태 선생님
교사로 불러주심을 감사합니다
글 / 사진·김중훈
여기는 기독교사들의 휴전선 최전방
초겨울이지만 전국이 꽁꽁 얼어붙고 있다. 첫 번째 인터뷰는 갑자기 내린 눈으로 실패했다. 이제는 해도 많이 짧아졌기 때문에 인터뷰를 하는 발걸음도 촉박하기만 하다.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야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조마조마 하는 심정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 같이 끝내는 늦고야 말았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캄캄해진 학교로 들어섰다. 그런데 캄캄하고 썰렁한 추운 복도를 지나니, 불 켜진 작은 교실이 보였다. 나는 놀랐다. 그 늦은 시간에 추운 교실에서 몇몇 선생님들이 모여 신우회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기독교사들의 휴전선 최전방에 온 것이다. 오랜 만에 함께 신우회 모임에 참여했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새해 첫 번째 ‘좋은만남’은 교사의 삶은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박종태 선생님을 만나보았습니다.
어릴 적 나의 모습
저는 4형제 중 막내로 태었나요. 태어난 곳은 충청남도 논산이지만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고 한 달이 지나서 인천으로 이사 왔습니다, 이후 초중고 그리고 대학교까지 지냈으니 인천이 어쩌면 실질적인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인천에 처음 이사 왔을 때 기억이 나는 사건이 있어요. 전학 첫 날 목조 건물이었던 시골 학교와는 달리 도시 학교는 시멘트로 된 건물이라 선생님 목소리가 교실에서 울리는 것이 너무 신기했어요. 소개하고 자리에 앉은 다음 10분 정도 있다가 ‘내 목소리도 과연 울릴까?’ 궁금해서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가 혼났어요.(정말 황당한 사건이죠?)
고향에서는 나름 잘 살았던 집이었다는데 조부께서 돌아가시면서 보증 문제가 생겨 재산이 다 사라졌고, 인천에는 거의 빈손으로 오게 되었어요. 인천에서 아버님은 일을 나가시고 약간의 돈으로 식당을 차려 일을 하셨는데, 식당이 잘 안되어서 빚을 진채 3년 후 그만두셨고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가 나가시던 회사가 문을 닫았어요. 이후 허름한 단칸방에서 월세를 내며 여섯 식구가 7년 동안 참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때 집주인이 월세 받으러 오면 부모님이 계셔도 없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이때 어머님이 참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저희가 4형제였고 어머님만 집에서 여자이다 보니 참 많은 것을 감당하셨습니다. 일을 다니시면서 집의 다섯 남자를 챙겨야 했으니 고생이 오죽 하였겠어요? 그러나 그 시절 어머님과 우리 가족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아버님이셨어요. 솔직히, 성장 과정 이야길 해야 한다고 할 때 걱정을 했어요. 성장 과정을 이야기 하려면 아버지 이야길 해야 되고, 아버지께서 가족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셔 왔기에 마음에 좀 부담이 있었어요. 정말로 가정이 화목하지 못했어요. 특별히 단칸방에서 살았던 시절에는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다 보고 감내했어야 했어요. 그때는 참 아버지가 싫었어요. 집에 돌아오시는 것도 싫었고, 집에 돌아오시기 전에 어서 잠들었으면 했으니까요.
그런 환경이다 보니 저의 자아도 많이 찌그러져 있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싶어요. 주눅 들고 자신감도 많이 없었거든요. 그때는 같은 반 친구들 중 아주 친한 친구들 외에는 우리 집을 보여준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방과 후 친구와 집에 같이 갈 때는 집을 지나쳐서 친구를 보내고 다시 돌아왔던 적도 꽤 여러 번이었으니까요. 중학교 1학년 때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한번은 담임선생님께서 학급의 임원들을 부르시더라고요.(저는 중학교 1학년 때 몸이 안 좋아서 일 년 쉬고 다시 일 년을 다녔는데, 이전까지는 한 번도 임원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때는 운이 좋아서 임원이 되었어요.)
그래서 갔는데 반에서 필요한 물건들이 있는데 임원들의 도움을 요청하더라고요. 그러다가 저를 보시면서 “종태는 좀 힘이 들지?” 그러시더라고요. 매년 하던 가정환경조사서에 항상 전세라고 표시를 했는데, 그때는 둘째 형님이 작성해 줬었는데 있는 그대로 단칸방에 월세라고 적어줬고, 선생님이 그걸 보시고 기억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창피했었어요. 그냥 목이 움츠러들고……. 비록 친구로 지냈지만 일 년 아래의 아이들 앞에서 그런 말 듣는 것이 좀 그랬어요. 그래도 이렇게 어려웠던 가정 형편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풀렸어요. 형들도 다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면서 집에 도움을 주기 시작했으니까요.
하나님과의 첫 만남이 너무나 강렬했어요
어린 시절 교회는 저와는 상관이 없는 곳이었어요. 저희 부모님들이나 형제들 중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던 탓에 교회는 저하고 상관이 없는 곳이었어요. 그래도 교회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3학년 때 집 건너편에 있던 교회에서 하는 여름 성경학교에 갔던 것이고 그 이후로는 한 번도 교회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제일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아주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교회를 같이 가자고 하며 정색을 하고 싫어했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1학년말부터 약간의 방황기가 왔어요. 그냥 목표 의식도 없고, 그렇게 삶이 덧없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러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담배도 배우고, 술도 마시고 그랬어요. 좀 불량한 길로 갈 수도 있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이런 모습은 2학년 1학기 때까지 이어졌어요. 그런데 왠지 이렇게 가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가면 내가 망가진다.’ 지금은 나를 잡아줄 뭔가가 필요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할 즈음 한 친구가 교회에 같이 가자고 해서 한 번 교회를 가볼까 했는데, 마침 그 친구의 교회에서 친구 초청의 밤 행사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친구들과 같이 갔어요. 그리 감동 없이 그 행사를 보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불을 다 끄고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닐 사람 일어나라고 하면서 통성 기도를 하는 거예요. 솔직히 그때 일어나고 싶었지만 창피해서 일어나진 못했어요. 하지만 그 시간에 제 심장은 정말로 제 귀에 들릴 정도로, 혹시나 옆의 친구에게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쿵당쿵당’ 뛰고 있었어요. 두려움이나 무서움이 이유는 아니었어요. 내일 꼭 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을 뿐,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던 것 같아요. 다음날, 지금도 그 날짜가 선명한 1989년 6월 18일, 저는 아침 일찍 그 교회 고등부 예배에 참석했고 등록을 했어요. 신기했던 것은 등록을 하면서 앞으로 계속 빠지지 않고 교회를 다녀야 갰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는 거예요. 어떤 망설임도 없었어요. 그냥 모든 것이 확실해지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리고 한 달 후인 7월 24일, 교회에서 주최한 고등부 수련회에 참석한 저는 한 선배님의 인도를 통해 저는 주님을 제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게 되었어요. 이후로는 정말 열심히 교회를 다녔어요. 비록 후배가 형 때문에 자꾸 음 틀린다고 면박을 들어도 성가대를 하였고, 매주 부평역에서 하던 전도에도 항상 나갔어요. 고3때는 주일날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자습을 해도 먼저 예배를 드리고 참석했어요. 여름에는 수련회에 가기위해 보충수업을 빠지겠다는 제 말에 음료수병을 집어 던지려던 담임선생님의 협박을 뚫고 고등부 수련회도 참석했고요. 하나님과의 첫 만남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
대학교 신입생 시절, 저는 처음부터 교사선교회가 마음에 들었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마음의 평안함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참 이 모임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임을 사랑했었습니다. 거의 매일 아침 일찍 와서 동아리방을 청소하며 모일 준비를 하였었어요. QT모임과 저녁 기도 모임에는 빠짐없이 참석했고, 수업이 없을 때는 항상 동아리방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그 당시에는 선교회에서 하는 모임에는 거의 대부분 다 참석하였던 것 같아요. 특별히 여름에 있던 선교회 수련회에서 성령 체험을 받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애정이 더욱 강해졌었어요. 한마디로 푹 빠져있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에 그 모임 안에서 이런 일 저런 일, 좋은 일, 기쁘고 행복했던 일, 너무 상처를 받아서 잠지 자지 못할 정도로 괴로운 일들을 겪게 되요.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쥐구멍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짓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20대 때 그만한 부끄러움 없는 사람 있을까 싶은 마음으로 조금은 뻔뻔하게 웃으면서 기억을 더듬게 되요. 얼마 전에 같은 과 동창들 모임이 있었는데 한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종태, 너를 보면 기독이(교사선교회의 애칭)가 생각이 난다”고 말했어요.
아무튼 대학교 생활 4년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교사선교회’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거기에서 만난 하나님, 거기에서 만난 선교회 지체들, 특별히 그 시절 저의 영적 스승이 되어주셨던 선배님들과 또한 함께 많은 시간들과 많은 일들을 함께 공유했던 친구와 후배들은 지금도 저와 강하게 연결되어 함께 하고 있으니, 교사선교회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해요.
임용고시, 그 아픔
재학 당시에는 워낙 모임에 빠져 있어서 미처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저는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교대를 온 것은 아니었어요. 그때 당시의 대입은 선지원 후시험 제도였는데 원서를 쓴 다음 시험보기 한 달 동안은 그리 공부를 하지 않았었어요. 솔직히 재수 준비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시험에는 합격하고 싶더라고요. 둘째 형이 교육 공무원이라서 다른 사람보다 일찍 저는 합격여부를 알 수 있었는데 저에게 합격했음을 알려주는 형에게 제가 한 첫마디는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해?”였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인데 대학 공부에 굉장히 소홀했었어요. 수업도 자주 빠지고, 레프트도 대충 쓰고, 시험공부도 친구들이 요약한 거 대충 외워서 들어가고 했거든요. 선교회 열심히 하느라 공부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냥 그때는 교대에서 하는 공부 자체가 참 재미가 없었어요. 그냥 의미 없는 이야기 같았고, 들어도 제 마음에 차오르는 무언가가 없었어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 모습이 마음에 안 들으셨던 것 같아요. 마지막 임용고시까지 합하여 저에게 다섯 번의 임용고시를 치르게 하셨거든요. 이 일은 <좋은교사> 교단일기에도 썼던 내용이라 여기서 그리 많이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때 있었던 일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세 번째 떨어졌을 때 이게 나의 일이 아니다 싶어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잠시 했었어요. 그것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냥 도서관에 있는 책을 대출해서 두 달 정도 공부했던 것 같아요. 결과는 당연히 안 되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다시 일을 다니시겠다고 하시더러 구요. 환갑이 넘으셔서 일할 기운도 없는 분이 일을 다니시겠다는 말을 하시나 제 마음에 열불이 확 났습니다. 다음 날 오후 도서관에 있다가 집으로 좀 일찍 들어갔는데 경비 일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비번이라 집에 계셨는데 약주를 드셨고, 취중에 저에게 잔소리를 막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가 다시 일을 나가겠다는 말에 기분이 상하셨고, 젊은 아들은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보기 싫었던 거죠. 그게 너무 듣기 싫어서 바로 집을 나왔는데, 저희 어머니도 저에게 잔소리를 한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시더니 같이 따라 나오셨어요. 그리고 잠시 후에 아버지가 나오시더라고요. 저는 그냥 뒤도 안보고 달려 나왔어요. 그날 비가 왔었는데, 우산도 없이 그냥 비를 맞으면서 여기저기 걸어 다녔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어요.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세요?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다고 저에게 이렇게 모질게 대하세요? 내가 당신을 위해 열심을 냈던 것 외에 잘못한 것이 무엇이 있었나요? 대체 왜 이러세요?’
몇 번 그 꿈을 꿨는데 그때마다 바로 잠에서 깼어요
그때는 그냥 잠이 들기 전 다음날 다시 눈뜨지 말기를 정말 간절히 기도했었으니까요. 그러나 교사가 된 이후 몇 년이 지나서 그 시간을 깊이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그 시간을 통하여 제가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는 제게 있던 거품을 제하고 싶어 하셨다는 거예요. 제가 온전해지는데 불필요한 거품이 참 많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사람이 자신에 대한 거품이 빠지기 위해서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어야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주 추한 모습이 진짜 나의 모습이구나’, ‘이게 나의 실체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고, 자연스럽게 겸손해지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신기했던 것은, 그와 동시에 제 성장기 때 안에 쌓여져있던 상처들이나 정서적인 문제들이 치유되고 회복되어지는 일들이 같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캠퍼스에서 다른 지체들과 함께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제 안에 화목하지 않았던 가정환경에서 받은 상처들이 알게 모르게 꽤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앞에서 말씀드린 밑바닥의 제 모습은 아마도 저런 상처들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 성향 때문에 참 캠퍼스에서 지체들에게 상처 많이 주었는데……. 이런 것들을 조금씩 깨달은 이후 저는 제 모습을 내려놓을 수가 있었어요. 그리고 지난해들보다 더 온전히 임용고시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고요. 그 다음해에 하나님께서는 사상 유례가 없는 교사 임용 인원의 확대를 통해 교직의 문을 저에게 열어 주셨어요. (개인적으로 이 지면을 통하여서 그 시절 저와 함께 해줬던 후배들, 특별히 월급 통장과 카드를 저에게 주면서 필요할 때 쓰라고 말해주던 후배들에게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어요. 이 녀석들이 형은 임용고시의 산 증인이라고 가끔 놀렸는데, 그 정도는 뭐 애교로…….)
저에게 있어서는 그 시간이 과거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만들어지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몇 년 전에 다시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제 모습을 꿈에서 보면서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깼었어요. 몇 번 그 꿈을 꿨는데 그때마다 바로 잠에서 깼어요.
정말로 아이들을 통해서 정말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처음 담임하며 만났던 아이들이예요. 처음 학기가 시작되던 날 6학년을 맡을 거라 생각하고 왔는데 3학년을 주더라고요. 아이들과 첫 대면하던 날 아직 애기티를 벗지 못한 아이들이 절 쳐다보는 걸 보고는 어찌나 속으로 답답하던지……. 첫날, 실수도 하였어요. 원래 4교시까지 해야 하는데 시간을 잘못보아 3교시만 하고 보냈거든요. 좀 있다가 그걸 깨닫고는 부랴부랴 뛰어가서 가던 아이들을 다시 데려왔었어요.(생각하면 아찔하네요) 그런데 이 아기 같은 아이들이 저에게 그런 행복감을 선사할 줄 몰랐어요. 원래 아이들을 좀 예뻐하는 편이고 해서 조금만 예뻐했는데 그렇게 저를 잘 따랐습니다. 애정을 주는 만큼 저에게 다시 애정을 돌려주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이렇다면 한 번 아이들에게 제 인생의 승부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정말 애정을 많이 줬고, 아이들도 저에게 애정을 많이 줬었어요. 그런데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지난 5년 동안 임용고시를 준비하느라 피폐해지고 곤고해져있던 저를 회복시키셨어요. 항상 학교를 가는 것이 즐거웠어요. 이 아이들이 오늘은 무슨 예쁜 짓을 할까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출근했고, 그날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웃으면서 퇴근했으니까요. 자주 아이들과 같이 퇴근하곤 했어요. 집에 안가고 남아서 저와 놀던 아이들이 있었고, 방과 후 활동을 하던 아이들이 하다가 교실로 와서 제 퇴근 시간까지 기다리다가 함께 가곤 했거든요. 어떤 아이들은, 제가 출장을 갈 때면 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곤 했었어요. 한번은 육상대회 나갔다가 퇴근 시간 훨씬 넘어서 돌아왔는데 칠판에 “선생님 기다리다가 가요! 사랑해요” 하는 말들을 잔뜩 써 놨더라고요. 그런 일이 두세 번 있었는데 그것을 보면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저를 교사로 불러주셨음을 감사를 드리게 되었어요. 정말로 이 아이들을 통해서 제가 정말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어요.
내 마음속의 아이들
항상 디모데들이 많이 기억이 나게 되요. 그들을 양육하면서 제 안의 것들을 가장 많이 나눈 아이들이니까요. 그 아이들은 제 내면의 것들을 아는 아이들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지막까지 잘 남아 있던 아이들보다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던 아이들이 더 기억이 많이 나요. 정말 많은 기대를 하고 애정을 줬던 아이들이 중간에 가정 사정(대부분이 부모님의 이혼 등)으로 인해 몇 번 전학을 간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마음에 공허감이 커졌습니다. 학부모님들도 아이가 정말 전학가고 싶어 하지 않는데 가게 되어 죄송하다고도 했습니다. <좋은교사> 교단일기에 썼던 아이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전학을 갔을 때는 한 일주일동안 전혀 의욕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그리고 계속 사랑을 주며 채워주고 이끌어주고 싶었는데 중간에 헤어져야 했기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아픔이 컸던 것 같아요. 어떤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제가 아이들, 특별히 제자에 대한 욕심이 있다고…….
기독교사 선생님들께
이 글을 보실 기독교사 선생님들께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니 제 자신에게 한 번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해요. 지치지 마시고 낙심하시지 마시라는 거예요. 기독교사들은 아이들을 섬긴다는 마음으로 교직에 임하기 때문에 다른 교사들보다도 더 많은 피로를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으실 거라 생각해요. 저는 무엇보다 잘 버텨나가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럴 때마다 그리고 피로감이 극에 이를 때마다 저에게 말씀 묵상을 통하여, 수련회나 예배 때의 설교 말씀 등을 통하여 그 모든 것을 싹 씻어나가는 은혜를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때마다 주시는 은혜가 아니었으면 저도 버티기 참 힘들었을 것 같아요. 지금도 간당간당하게 버티지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을 이기며 하나님의 의지를 이어가는 것에 감동받지 않으실까 싶어요. 많이 피로하고 힘들 것 같아요. 하지만 계속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감동을 선사해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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