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저를 놀랍게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곳에서 내가 하고 싶은 수업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망과 우울감 속에 빠져있던 저에게 기적과 같이 다시 수업을 하고 싶은 열정이 생겨났습니다. 저에게 수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기적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저를 다시 교사로 완전히 회복이 시키셨습니다.
김포 풍무고등학교 박서정 선생님
복음의 능력으로
다시 회복되는 교실
글 / 사진·김중훈
여러분 기독교사대회에 참가한 고등학생을 알고 계신가요? 놀라운 건 그때 그 여고생이 여러분과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비교사 시절에는 기독교사대회 자원봉사자로 함께 땀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사대회 이후 수고했다고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좋은교사 사무실에 찾아왔다고 합니다. 물론 송인수 선생님은 이제는 공부 열심히 하라고 일장 훈계를 하셨다지요?(웃음). 참 놀랍기만 합니다. 그 대학생 아니 여고생이 이제는 새로운 학교를 꿈꾸는 기독교사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2월호에는 김포 풍무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인 박서정 선생님을 만나 보았습니다.
나의 고향, 섬마을 완도
저는 전라남도 완도군 금당면이라는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곳은 학교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학교생활을 즐거워했고 거의 6시가 넘어서까지 학교에서 놀거나 책을 읽다가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학교와 마을, 가정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마을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써 학교가 존재했지요. 그래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학교에 대한 저의 생각은 긍정적인 면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조부모님이 계시는 경기도 평택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홀로 전학을 왔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지냈기 때문에 정서적인 결핍이 있었지만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성장과정을 통해 교사의 꿈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난 중학교 시절
초등학교를 마치고 추첨을 통해 들어간 학교가 미션 스쿨인 한광여자중학교였는데 미션스쿨이라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자유로운 편이었고 선생님들께서는 자발적으로 학생들과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인 김영호 선생님께서도 믿는 분이셨기에 우리 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었고, 친구들의 권유로 당시 성당을 다녔던 저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성당을 다니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는데 거리낌이 있었지만 담임선생님의 인격과 친구들의 진실성을 보고 저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성당에서 이야기하는 ‘구원론’과 ‘마리아’의 권위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고 함께 공부했던 친구의 교회에 따라 나가면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기도하는 친구들과 선생님이 있어 빛나고 아름다웠던 고등학교 시절
학교 가는 것이 매일 매일 즐거웠던 중학교 시절과 달리 고등학교의 첫 시작은 무척 힘겨웠습니다. 일단 매일 계속되는 야간 자율학습 때문에 체력적으로 힘에 부쳤고, 우열반 편성으로 인해 생겨난 반들 사이의 위화감, 동아리에서 선배가 후배를 잡으려고 하는 잘못된 문화와 풍토, 성적으로 인해 희비가 엇갈리는 친구들의 모습 등 어두운 기억이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중학교 시절과 달리 신앙적 멘토가 되어 준 선배나 선생님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미션스쿨에만 있었던 임원인 선교 부장을 맡아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 있는 학교 분위기를 신앙으로 극복해 보려고 노력하고,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과 함께 다른 친구들을 전도하려고 애썼던 기억도 납니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같은 학교재단의 남자 고등학교에 계셨던 김종배 선생님과 지금 다니는 내수동교회를 소개시켜 주신 김복환 선생님이 저희 학교에 부임해 오시면서 새로운 학교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김종배 선생님께서 남자 고등학교에 계실 때 기독 동아리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지도하셨다는 이야기를 교회 후배로부터 들었었고 김복환 선생님은 대학 시절에 예수전도단(YWAM)에서 활동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점심시간마다 기도 모임에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당시 같은 교회를 다니는 친구들을 중심으로 기도 모임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두 분의 선생님이 흔쾌히 참여해 주셔서 기도 모임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급식을 운영하지 않고 도시락을 싸서 다녔는데 기도 모임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갖기 위해 먼저 밥을 먹고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모임 장소로 달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어려운 시기였지만 함께 기도하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있어 제 생애에는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시절로 기억되는 순간들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참가했던 첫 번째 기독교사대회
고등학교 시절 가장 기억에 남은 순간은 2000년도 한국교원대에서 치른 제 2회 기독교사대회에 참석한 일입니다. 중학교 시절 국어를 가르쳐 주셨던 김재균 선생님께서 기독교사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고 학교에는 기독교사대회 포스터도 붙어 있었습니다. 칠판 위에 노란색으로 웃는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를 보며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고 선생님들이 모이는 수련회인 것은 알았지만 어떤 대회인지 꼭 참석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사대회 홈페이지에 참석 가능 여부를 묻는 글을 올렸고 당시 대회조직위원장이었던 김덕기 선생님의 환대 어린 답글을 통해 용기를 내어 광복절 하루 동안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강당에서 한 목소리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천여 명의 선생님들을 통해 교사의 꿈을 꾸는 고등학생으로서 제가 따라가야 할 본이 되는 길이 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당시 큰 화두였던 ‘기독’ 교사, 기독 ‘교사’, ‘기독교사’의 차이에 대해 들으며 진정한 ‘기독교사’가 되기 위해 가르칠 교과에 대한 기독교적인 연구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 때 이루어진 인식의 변화는 지금까지 기독교사로서 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예비교사로 참가한 두 번째 기독교사대회
사범대학에 가서 교사에 대한 고민을 깊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학교 현장을 떠나자 학교에 대한 고민이 많이 흐려졌습니다. 그래서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의 공부이기보다는 국문학, 국어학적인 내용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오히려 선교 단체 활동(IVF)과 교회 활동에 더 치중해서 살았습니다. 언젠가 임용 고사를 준비해서 합격해야겠다는 어렴풋한 생각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참석한 기독교사대회가 제 머릿속에 너무 크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떤 모양으로든 좋은교사운동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2002년도 연세대 원주캠퍼스에서 열린 기독교사대회에 자원봉사자인 동시에 예비교사 신분으로 참석했습니다.
대회가 열리기 전에 엄청난 업무를 감당하는 간사님과 선생님들을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당시 몸담았던 선교단체 후배들을 동원해 몇 백 장씩 명찰에 이름을 쓰거나 자르고 붙이는 활동, 힘쓰는 활동들을 했었습니다. 몇 가지 여담을 이야기하면 선발대로 자료집을 가득 실은 트럭을 타고 간사님들과 함께 이동을 했는데 자료집이 너무 무거워서 타이어가 펑크가 나 비명횡사할 뻔 했던 기억, 대회 마지막 날 밤 누군가의 차를 타고 원주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간사님들과 함께 드라이브했던 기억, 마지막 날 아침 마라톤 대회 우승자를 위해 여기저기서 잎을 따다가 순식간에 월계관을 만들어 내는 간사님들의 능력에 감탄했던 기억들이 추억으로 떠오르네요. 당시 처음으로 김효수 선생님을 중심으로 예비 기독교사 트랙이 따로 운영되었는데 당시는 자원봉사자로서의 역할이 더 컸기 때문에 대회의 내용보다는 사실 다른 추억들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사대회가 끝나고 사무실에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갔더니 당시 대표였던 송인수 선생님께서 학생은 이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훈계하셨던 장면도 기억납니다.
우즈베크로 향한 발걸음
대학 시절 교사로서의 삶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결정적인 순간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임용고사에는 복수전공을 하면 가산점을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대생에게는 복수전공이 거의 필수처럼 여겨졌습니다. 저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복수전공 신청을 하고 졸업할 때까지 이수할 학점을 계산해 보니 학기마다 들어야 하는 전공 수도 엄청나게 많았고 계절학기도 꼬박 꼬박 들어야 간신히 졸업을 할 수 있는 시간표였습니다. 그리고 복수 전공을 하지 않으면 임용고사를 절대 통과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렇게 뭔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도 현실적인 이유로 복수전공 시간표대로 신청을 했지만 마지막 수강신청 정정 날에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단일 전공으로 시간표를 바꿔버렸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보다는 여유와 고민 없는 대학 생활을 상상하기 싫어서 바꾼 시간표였기 때문에 약간의 패배 의식을 가지고 다음 날 교회 리더 모임에 갔습니다.
그런데 교회 리더 모임에서 대학부 전도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바로 비전이 없는 사람입니다.” 순간 내가 바로 비전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임용고사 합격과 불합격으로 나의 인생이 결정된다는 거짓말에 속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비전은 임용고사 합격이 아니라 ‘좋은교사’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좋은교사가 되기 위한 자양분을 얻기 위해 파송 선교사님이 계신 우즈베크로 가서 그 곳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역을 1년 동안 하게 되었습니다. 1년 동안 그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존감이 상당히 높아졌고(당시 우즈베크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겨울연가’ 때문에 검은 머리에 단발을 한 여자들은 모두 ‘최지우’라고 불렸으므로) 영어로 인해 외국어 공포증이 있었던 저에게 한국어와 어순이 똑같은 우즈베크어는 외국어 공포증의 치료제였습니다. 한국인은 4개월이면 독파가 가능하다는 전설의 언어이거든요. 또한 어릴 때부터 떨어져 지내서 어색했던 가족들과의 관계가 여러 번의 전화 통화를 통해 돈독해지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한국어를 잘 할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수업을 통해 희열을 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교사가 천직이라는 생각도 아주 잠시 했었지요. 이 후에 실제로 학교 발령 이후 교사 생활을 하면서는 이 환상이 순식간에 무너졌지만요.
꿈같은 우즈베크에서의 생활을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서 4학년에 복학을 했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동기들은 대부분 졸업을 했거나 군대에 간 후였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은 왜 우즈베크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임용고사를 준비하는 타이밍을 놓쳤느냐는 은근한 책망을 하고 계셨습니다. 우즈베크라는 중간 휴식기를 거쳤을 뿐 사실 달라진 상황은 별로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광야 가운데 혼자 던져진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건 제 마음이었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약간 염려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오히려 마음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임용고사에 대한 부담 없이 4학년 내내 듣고 싶은 수업을 듣고 좋은교사운동에서 주최하는 예비교사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교회에서는 리더 훈련을 받고 섬기면서 안식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지금의 남편과 교제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해부터 마음을 먹고 임용고사를 준비하였지만 낙방을 하였고, 그 다음해에 시험을 봐서 합격했습니다. 모든 고시생들이 그렇듯 시험 준비를 하면서 불안감에 시달릴 때도 있었지만 함께 하는 공동체가 있었기에 서로 격려하며 비교적 수월하게 수험 생활을 마친 것 같습니다.
신규교사에게 찾아온 상실과 우울감 그리고 다시 찾은 세 번째 기독교사대회
학교로 발령을 받고난 후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학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교사라는 꿈을 꾸었고 꾸준히 교사로서의 준비를 해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는 배웠던 것을 현장 속에서 실천하고 적용하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생각이 엄청난 자만이었다는 사실을 얼마 가지 않아 깨달았습니다. 처음의 기대와 들뜸은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우울감에 시달렸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담임이 아님에도 학년부에 소속되어 도서관 자율학습 감독을 전담하는 비정상적인 업무 분장, 내가 하고 싶은 수업과 현실 속의 수업 사이의 괴리, 수업의 황폐화로 인해 학생들과의 관계 실패 등 모든 것에 실패했다고 느꼈습니다.
실오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어 울부짖으며 주님 앞에 기도했지만 상황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난독증세까지 나타났고 학교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병가를 쓰고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병가라는 것은 사실 학교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전제 하에 쓰는 휴가이지만 저는 돌아가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수업을 준비하려고 교과서를 펴면 수업 설계가 떠오르기보다는 ‘이렇게 한다고 될까?’라는 걱정과 불안만이 앞섰습니다.
그러던 중 3월에 먼저 신청해 놓았던 기독교사대회가 떠올랐고, 김포 기윤실 모임 이병환, 김경애 선생님 부부의 카풀 공지 문자를 보고 ‘회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바로 카풀 신청을 하고 올라갔습니다. 계속되는 자율 학습 감독으로 지역 모임에 초반에만 참석했기 때문에 기윤실 모임 선생님들은 저의 상황에 대해 잘 모르고 계셨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마음으로 함께 차를 타고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다시 교사로 회복이 시키셨습니다
2008 기독교사대회에서 하나님께서는 저는 놀랍게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았던 건 아침 시간에 진행되는 연수였습니다. 그 곳에서 만난 협동학습 연수는 내가 하고 싶은 수업의 모습을 발견했게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망과 우울감에 속에 빠져있던 저에게는 기적과 같이 다시 수업을 하고 싶은 열정이 생겨났습니다.
저에게 ‘수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기적이었습니다. 기독교사대회 이후 저는 용기를 내어 2학기에 다시 복직했습니다. 독서토론 연수, 협동학습연구회 등에 참석하며 새로운 수업을 열어갔습니다. 당시에는 새벽 늦게까지 수업 준비를 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다음 날의 수업이 너무 기대 될 정도로 성령에 취한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그렇게 다시 교사로 완전히 회복이 시키셨습니다.
다시 꿈을 꾸기 시작하란 의미일까?
2012년 기독교사대회에 참석해서 여러 말씀이 기억에 남지만 저에게 가장 다가온 말씀은 정병오 선생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학교생활을 하며 하는 고민 중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는 부분이 수업과 학급 운영라고 할 때, 교직생활 5년 동안이 두 가지를 잘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내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웃고 있는데 아이들은 학교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우리 반이 좋다고 하는데 역시나 아이들은 학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의 정곡을 정병오 선생님께서 찌르셨습니다. 애굽에서부터 이스라엘과 함께 해 왔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두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자기 혼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더 꼴불견이었을 것이라는 말씀. 나 혼자 수업 잘 한다고, 나 혼자 학급 운영 잘 한다고, 나만 만족스럽다고 학교가 완전해지는 건 아니라는 통찰이었습니다. 나 혼자 잘하는 건 모세 혼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꼴불견이었습니다.
학교 전체의 변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혼자서 변화시키는 내 수업과 담임반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변화시키는 학교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이번 기독교사대회에서 ‘새로운 교사가 온다’라는 표어와 함께 ‘새로운 학교가 온다’라는 표어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필요의 연장선으로 작년 2학기에 좋은학교 아카데미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혁신학교에 대한 꿈이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리고 판타지로만 여겨졌던 혁신학교 뒤에 많은 교사의 눈물과 땀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올해 3월부터는 저는 혁신학교에서 새로운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주위 선생님들은 경쟁 상대 혹은 판단과 비교의 잣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함께 소통하지 않는 구조의 폐쇄성만을 한탄했지만 내 자신 스스로가 썩으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시기 위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난을 통해 나를 연단시키셨다면, 이제는 자발적인 마음으로 고난과 헌신의 현장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한 번 실패로 보이는 연단을 겪었기에 두려운 마음도 있지만 좋은교사 여러분께서 저를 함께 응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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